슬롯 - 2007년 제3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신경진 지음 / 문이당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현대사회의 적막함과 고독, 그리고 단절은 현대문학이 자주 사용하는 글감이다. 이런 주제나 내용은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다. 다만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는 방식이 오늘의 문학에서 가장 중요하단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그래서 주제를 알고 보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거나 공유감을 느끼는 것, 바로 그것이 현대소설을 읽는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뻔한 주제를 풀어가는 작가의 능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런 인식을 기본으로 할 때 소설 ‘슬롯’은 매우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문학작품이다.
공유감을 끌어내기 위해 작가는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작가는 카지노를 선택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간의 관심을 철저히 차단하고 모른체하는 단절된 사회. 이런 점에서 카지노는 현대사회의 훌륭한 제유일 것이다.
여기에 현대인들의 삶에서의 성적인 문제 역시 작가는 다루고 있다. 적나라한 잠자리가 묘사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성들간의 관계들을 통해 현대인들의 고독을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류 탄생에서부터 가장 끌리는 관계인 남녀관계는 결혼이란 결말이든 연인의 관계이든 언제나 편한 관계로 묘사되었다. 어떤 문학에는 사랑과 그 맺음이 행복의 마지막인 것처럼 형상화되기도 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혼이 50%에 육박하는 현실이고 보면 현대사회에서 남녀간의 달콤한 관계 역시 인간의 행복을 담보해주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또한 ‘슬롯’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인다.
주인공 ‘나’는 다양한 여자들을 만난다. 그런데 주인공 ‘나’에겐 그녀들이 그냥 머나먼 타인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은 여자라는 속성이 무시된 채, ‘그’라고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한국어의 변화인지 아님 짧을수록 좋다는 믿음에서인지 신문에서 사용되는 3인칭 단수가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냥 ‘그’로 표현될 뿐이다. 이젠 동성도 똑 같은 사랑이라고 우겨도 할 말은 없을 듯하다. 이미 이성으로서의 안락함과 매력, 그리고 환상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는 그것을 느끼도록 한 기술적 수사인지 모른다. 아무튼 이젠 여자로서의 환상은 제거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은 좀 머나먼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에서 남녀관계는 무엇보다 서로간에 위로를 해줄 수 있는 그런 관계보다 사업상의 관계거나 단기적이고 이용하는 관계, 심지어는 불신의 관계로만 묘사되고 있다. 이런 그의 시각은 경쟁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관계를 또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방을 함께 쓰는 남녀의 관계가 파탄 난 상황에서 편안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 ‘나’는 너무 현대적이다. 내쫓기지 않을 만큼 직장에 다니면서 어지간한 장벽을 갖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용기 없는 남자? 과거 386세대의 열정은 자본주의란 풍파에 깎인 직장인일 뿐이다. 마르크스나 기타 등등을 봤지만 사회적 현실 속에서 그냥 평범하게 된 그이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그의 주변에 맴도는 여자들은 7살 난 여아에서부터 시작해서 애 딸린 엄마까지 다양하다. 그 사이에 그를 카지노로 이끈 수진이란 대학교 후배 이혼녀, 그리고 천재 고등학교 졸업생인 윤미가 그의 주변을 인공위성처럼 맴돈다. 그녀들 혹은 그들이 주인공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는 언제나 망설였다. 깊은 관계를 철저히 막는 벽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들은 왠지 모를 탐익의 대상이 될 지 언정 어떤 선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현대인으로서의 ‘나’는 타인을 통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슬롯’이란 제목에서 드러나듯 카지노의 다양한 경기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문적으로 이야기된다. 확률이란 단어에서 나오는 막연한 것의 위험한 구체화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카지노에 참가한 자들의 속성이고 보면 현대인들은 자본주의란 위험한 게임에 막연한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막연함 속에서 돈을 잃을 각오로 온 자라도 그들은 어느 사이엔가 카지노란 경기에서 감히 이기려 달려든다. 결국 카지노 딜러들에게 이길 수 없지만 순응하는 이런 기이한 맥락 속에서 현대인들은 점점 작아지고 그것을 수긍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런 수긍 속에서 만들어지는 인간관계들의 나약함과 파편화는 인간의 불행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슬롯’을 재미있게 읽었는지 지루하게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떨 때는 다 읽기를 포기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그 이유는 주인공 ‘나’란 위치에 정말 내가 투입되어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내 거울이었다. 카지노란 장소에서 보인 주인공 ‘나’의 소심함은 나 역시 어느 순간 내 속성이 됐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또한 내가 갖고 있는 인간관계 역시 어딘지 모를 거리감을 두고 만나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제 내 속마음을 내 주변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소설은 그냥 내 이야기일 뿐이다. 내가 카지노에 간다고 해서 전혀 다른 행동과 선택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럼 추측을 이끌어내고 있는 이 소설에 대해 뭔가 감추고 싶은 그 무엇이 들킨 느낌이 무척 드는 것은 아마 카지노 같은 현실에서 내가 방황해서 그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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