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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왕관 - 유럽 왕실을 뒤흔든 병의 연대기
여지현 지음 / 히스토리퀸 / 2025년 12월
평점 :
노란 테이블이 밝은 카페에서 이 책을 읽었다. 오후 세 시쯤, 에스프레소 머신이 쉭- 소리를 내며 증기를 뿜었고 창밖에는 겨울 햇빛이 번들거렸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와이파이 왜 이렇게 느려… 하고 투덜거렸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소음들이 책과 잘 어울렸다.
왕 한 사람의 몸 상태가 나라 전체의 리듬을 바꿔버리던 시대 이야기니까.
읽기 전: 좀 재미 위주일 줄 알았다
제목부터 강렬하다.
왕관, 고통, 유럽 왕실, 유전병, 근친혼, 정신 질환, 산욕열, 포르피린증, 춤추는 병…
그래서 처음엔 약간 이런 기대를 했다.
왕실판 의학 미스터리 모음집 아닐까?
조지 3세는 결국 무슨 병이었는지,
합스부르크 가문의 턱은 유전적으로 얼마나 심각했는지,
누가 어떤 증상을 앓았는지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그런 책일 줄 알았다.
말하자면, 역사 속 왕들의 진단서를 구경하는 기분으로 읽게 될 줄 알았다.
읽고 난 뒤: 병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 이야기였다
그런데 '고통의 왕관'은 생각보다 훨씬 조심스럽고, 훨씬 구조적이다.
누가 무슨 병이었다를 단정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왕의 병이 어떻게 국가의 운명이 되었는지 묻는다.
조지 3세의 소변 색을 둘러싼 기록의 차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턱이 초상화 속에서 권위의 상징처럼 소비된 방식,
제인 시모어의 난산이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왕위 계승의 압박과 직결된 사건이었다는 점.
읽다 보니 병의 카탈로그가 아니라, 몸과 권력이 서로 얽힌 역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카페 음악이 잠깐 끊겼다.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고,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왕 한 사람의 정신이 흔들리면, 그 정적이 곧 국가적 공백이 되었겠구나.
과거를 함부로 비웃지 않는 점이 좋았다.
지금이라면 고칠 수 있었을 병이라는 문장이 반복해서 떠오르지만,
그건 우월감의 어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무지해서가 아니라, 조건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질병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고,
왕의 실패도 전부 개인의 결함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점.
읽다 보니 푸른 피라는 말이 낭만이 아니라
취약성의 은유처럼 느껴진다.
기대: 왕실 질병 썰 모음집
실제: 신체, 혈통, 상징, 권력이 교차하는 역사 분석
처음엔 가십처럼 흥미롭다가,
읽을수록 점점 생각이 많아지는 책이다.
가볍게 펼쳤다가,
권력은 결국 얼마나 육체에 의존하는가? 라는 질문을 들고 나오게 된다.
카페를 나올 때쯤, 노란 테이블 위에 햇빛이 기울어 있었다.
밖은 평온했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걷고 있었다.
그 평온함도 어쩌면 아주 많은 취약성 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통의 왕관'은 왕들의 병을 다루지만,
결국은 권력의 인간적 한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재미로 시작했다가,
생각을 오래 남기는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