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문법
박민혁 지음 / 에피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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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는 많다. 하지만 사랑을 어떻게 시작했는가보다 “어떻게 견뎠는가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생각보다 드물다. '기억의 문법'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그 지점이다. 이 책은 사랑을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시간을 통과하는 힘으로 그린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낭만적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8년, 8,500km, 8살의 나이 차. 숫자로만 보면 거리와 간극의 목록 같지만, 이 책 안에서 그것들은 모두 함께 건너야 할 시간의 다른 이름이 된다.


문장이 요란하지 않고 담담하다. 반려묘 하루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엘리베이터 소리에도 심장이 내려앉는 장면, 나무 마룻바닥이 더 이상 울리지 않는 적막, 혼자 남은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 그 상실의 장면은 유난스럽지 않다. 그렇기에 더 진짜 같다. 상실을 이렇게 조용히 써 내려갈 수 있다는 건, 이미 그 시간을 충분히 통과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슬픔은 다른 장면과 이어진다.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실감하는 순간, 비 오는 길 위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당신이랑 함께 있는 게,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에요.라고 고백하는 문장. 이 책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공백이 마음을 채운다. 그 여백이 이 책의 힘이다.


사랑을 운명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사회적 시선, 나이 차이, 물리적 거리, 각자의 불안과 완벽주의적 성향. 그 모든 것들이 균열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갈등을 극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간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은 결국 선택의 반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랑을 성장의 문법으로 서술한다. 스무 살 청년이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은 단지 신분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의 책임을 배우는 과정이다.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맴돈다. 어떤 관계는 설명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함께 보낸 시간만이 증거가 된다.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증명하려 애쓴다. 말로, 이벤트로, 약속으로. 그러나 시간이야말로 가장 냉정하고도 공정한 증인이며 끝까지 함께 걷는 사람만이 그 증언을 얻는다.


마음이 이상하게 고요해진다. 오래된 나무를 손으로 만졌을 때 느껴지는 단단함 같은 감정이었다.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의 곁에 남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그 남음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을 미화하지도, 냉소하지도 않는다. 다만 보여준다. 그래서 믿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흔들리는 관계 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는 사람에게도. '기억의 문법'은 큰 소리로 위로하지 않는다. 


시간을 건너도 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가만히 떠올리게 됐다. 누군가와 함께 견뎌온 날들, 말없이 버텨낸 계절들. 그 기억들이 문법을 이루듯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는다.


이 책은 시간을 통과한 두 사람의 기록이자, 사랑이 한 인간을 어떻게 단단하게 빚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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