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으로선 일기장이 그녀의 존엄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겉으로는 수련 간호사로 행동하며 살아갈지 몰라도 사실은 변장한 위대한 작가라는 긍지를 갖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 P392

아무리 힘들고 비천한 일을 해도, 그 일을 잘 해내도, 또 형편없이 해도, 수업시간에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아니 간호사 되기를 포기하고 대학 교정에서 평생을 학문에 매달려 지낸다 해도 그녀가 저지른 범죄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 P399

로비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실리아와 로비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면...... 그녀만의 비밀스런 고통과 전쟁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항상 서로 다른 세계의 일처럼 보였는데, 전쟁이 그녀의 범죄를 얼마나 더 무겁게 만들 수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브리오니는 다른 누군가의 과거를 갖고 싶었고, 다른 누군가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했다. - P403

브리오니에게 주어진 삶은 도망갈 문이 없는 방안에 갇혀 사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 P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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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게. 돌아와. 여기에는 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편지와 새 주소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생존해야 할 이유였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독수리처럼 맴돌며 먹이를 기다리는 스투카가 있는 주요 도로를 벗어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 P286

모든 어린애가 그렇게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태도로, 시간이 지나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회의를 갖지 않을 만큼 지독할 수는 없다. - P323

마을 끝의 집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 앞에 펼쳐진 들판에 한 남자와 콜리 종의 개가 말이 끄는 쟁기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구두 가게에서 본 여자들처럼 이 농부도 퇴각 행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삶은 계속되며, 전쟁은 전쟁광들의 취미일 뿐 심각할 건 없었다. 사냥개를 풀어 미친 듯이 사냥감을 쫓는 동안, 울타리 저 너머로 지나가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여자는 뜨개질에 여념이 없었고, 새로 지은 집의 휑한 정원에서는 한 남자가 아들에게 공차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렇다. 쟁기질은 계속될 것이고, 누군가는 그 농작물을 거둬들여 빻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그것을 먹고...... 모두 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 P332

오래 전, 전쟁이 터지기 전과 감옥에 가기 전에는 잭 탈리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기는 했어도 스스로 진로를 선택하고 또 바꿀 수 있다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만이 만들어낸 망상이었다.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는 자라지 못한다. 그는 아버지를 원했고, 바로 그 때문에 아버지가 되기를 원했다. 지천에 깔린 죽음을 목격하면서 아이를 바라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그래서 인간적인 이런 바람이 무엇보다 간절해졌다. - P341

기다림. 상대방이 다가올 때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기다림이란 너무나 힘겨운 말이었다. - P368

인간은 오만에서 나오는 자기 비난의 감정에 휩싸이면 너무 많은 책임을 떠안으려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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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는 삶을 배우는 인간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동물도, 기계도, 신도 실수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 - P39

"실수는 인간적이지만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악하다." - P39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힘을,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의지를, 그리고 이를 구분하는 지혜를 주소서." - P41

수 세기 동안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옛사람들의 지혜와 멀어졌다. - P42

지혜의 반대말은 현실 거부다. - P44

현실에 불평하는 것은 현실로부터 도망치며 주관적 판단 뒤에 숨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 P48

삶은 삶이다. 그뿐이다. 공정하냐, 아니냐를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 P48

기꺼이 흔들리며 단단해지겠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현실을 마주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나의 세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 P48

"선택은 저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길 한구석에 앉아서 하얀색 지팡이와 동냥 그릇을 놓고 구걸하거나, 음악가가 되기 위해 악착같이 노력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죠.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이것이야말로 내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 P49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체념과는 다르다. 받아들임은 긍정이고 현실에 공감하는 것이다. 시련이 닥쳤을 때 이것이 정당한지 아닌지 질문하지 않고 이 경험을 통해 어떤 지혜를 얻을지 묻는다. 그리고 그 위 또 다른 무언가를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한다. - P50

"바위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면 바위 주변에 강한 저항이 생긴다. 그러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바위에 오르면 바위의 도움을 받는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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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오그라들 것 같은 그 순간,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증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증오는 사랑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감정이었지만, 사랑과는 달리 얼음처럼 냉정하고 이성적인 감정이었다. - P200

언젠가 손님들을 초대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무슨 분야인진 몰라도 과학을 가르친다는 어느 교수가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큰 장식촛대들 위를 날아다니는 벌레 몇 마리를 가리키며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이 벌레들을 빛 속으로 유혹하는 것은 빛 너머에 있는 더 깊은 어둠이라고 했다. 벌레들은 잡아먹히는 한이 있더라도 빛의 가장자리에 있는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가려는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곤충들 눈에 보이는 빛 속의 어둠은 착시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그의 이런 설명은 궤변처럼, 단지 설명을 위한 설명처럼 들렸다. 어느 누가 곤충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것에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그것들을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세상사를 그르치는 일이며 쓸데없는 짓일 뿐 아니라 화를 부를 수도 있다. 어떤 일들은정말로 그렇다. - P214

그의 증오가 두렵기는 했지만, 어른에게서 증오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어른으로 자리매김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아이들도 남을 증오할 수는 있지만 변덕이 너무 심하다. 어린애의 증오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른의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엄숙한 의식과도 같았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올라섰다는 의미였다. - P226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 P241

브리오니가 조금만 덜 순진했더라면, 덜 어리석었더라면.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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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의 인생에는, 아니 자신의 인생에 대한 그의 이야기 속에는 비열한 사람도 없었고, 음모를 꾸미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배신을 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적어도 한 가지씩은 좋은 면을 가지고 있다는 레온의 말을 듣고 있으면 마치 그것이 모든 인간이 존재한다는 경이로운 사실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친구들이 했던 재미있는 농담을 기억해내어 들려주곤 했다. 레온이 하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인간에 대해서,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 너그러워지곤 했다. - P155

그가 아무 욕심 없이 그저 무사태평하게 사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노력과 천성의 합작품이었다. 세실리아는 결코 상상할 수도, 따라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P158

성장한다는 것은 참으로 쓸쓸한 일이었다. - P167

결국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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