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그녀의 특별한 재능은 바로 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무의미한 것들, 끊임없이 변화하며 덧없이 스러져버리는 세상의 온갖 사물과 현상을 자신의 오감을 통해 감지해내는 것이었다. - P149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이미 초래된 결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마디라도 더 이야기를 보태려는 사람들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가보다. - P151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 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증오였다. - P154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 P154

금복은 역시 무언가 자신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피어나는 여자였다. 그녀의 얼굴엔 조금씩 생기가 돌고 부둣가 사내들을 안달나게 했던 그 향기도, 이전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다시 풍겨나기 시작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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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여러 번, 우리의 만남을 상상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 아이는 나의 아들로서 만나는 일을. 그렇긴 하지만,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객석의 한 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받아들였다. - P45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날려가는 바람이 불지도 않았다. 심장마비도 없었다. 문간에 서 있는 천사도 없었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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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눈에 띄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 P10

나는 다만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날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P11

오십 년이 넘도록 열쇠공 일을 했다. 그것은 과거의 내가 상상했을 법한 삶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실은 그 일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혹은 안으로 들이면 안 되는 것들을 막아내 악몽을 꾸지 않고 잘 수 있게 도왔다. - P12

바보라도 창가에 세워두면 스피노자가 된다. - P12

심근의 이십오 퍼센트가 죽었다. 몸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렸고 다시는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났다. 시간 그 자체를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의식하게 되었다. - P12

삶은 새로운 언어를 요구했다. - P14

시도했다가 실패하는 편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 P14

탁자를 쾅쾅 내리치고 숨을 헐떡이며 나는 생각했다. 아마도 이렇게 가려나보다. 발작적으로 웃다가, 더 나은 길이 뭐가 있을까, 웃으며 울고, 웃으며 노래하고, 웃으며 혼자라는 사실을, 인생이 끝났다는 사실을, 죽음이 문밖에서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는 것보다.

때때로 나는 내 책의 마지막 페이지와 내 인생의 마지막 페이지가 하나이며 똑같다고 믿었다. 책이 끝나면 나도 끝날 거라고, 큰바람이 방을 휩쓸어 원고를 모두 날려버릴 거라고, 허공에 펄럭이던 흰 종잇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방이 고요해질 거라고, 내가앉아 있던 의자가 텅 빌 거라고. - P20

앞으로도 하나뿐인 사랑일 여자를 위해 그래야 한다면. 어쨌거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남자에게 한 가지를 더 숨기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 P26

죽어 있는 나를 처음으로 보게 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 P29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얼굴에 닿는 바람과 빗방울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 P29

어딘가에 말하고 싶다. 용서하려고 노력해왔다고. 그렇긴 하지만. 살면서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던 때가, 아니 여러 해가 있었다.
추함이 나를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원한을 품을 때 느끼는 어떤 만족감이 있었다. 원한을 자초했다. 바깥에 서 있는 그것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세상을 향해 인상을 썼다. 그러자 세상도 내게 인상을썼다. 우리는 서로를 향한 혐오의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 P34

나는 바로 뒤에 사람이 오는데도 문을 쾅 닫아버리곤 했다. 아무데서나 방귀를 뀌었다. 계산원들이 동전을 가로챈다고, 그 동전을 손에 쥐고서, 욕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비둘기에게 독약이나 먹이는 부류의 얼간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날 피하려고 도로를 건너갔다. 나는 암적인 인간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더는 그렇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분노를 어딘가에 두고 왔다. 공원 벤치에 내려놓고 걸어나왔다. 그렇긴 하지만 너무 오래 그렇게 살아와서 다른 존재 방식을 알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잠에서 깨어나 혼잣말을 했다. 아직 너무 늦진 않았어. 처음 며칠은 이상했다. 거울 앞에서 미소를 연습해야 했다. 하지만 되돌아왔다. 마치 묵직한 추를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내가 내려놓았더니 무언가가 나를 내려놓았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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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앞으로 흘러가는 한, 그녀에게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두려운 건 과거였다. 칼자국이 작살에 배가 꿰뚫린 채 물 속으로 잠겨들던 시간이었으며 폭풍우 몰아치던 밤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두려운 건 가슴을 풀어헤친 채 미친년처럼 바닷가를 허우적거리던 순간이었으며, 시간이 거꾸로 흘러 그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녀는 잠드는 것이 두려웠다. 잠이 들면 꿈을 꾸고 꿈을 꾸면 어김없이 칼자국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 P128

당연하지.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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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허상을 좇는 동안 나오꼬만 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청춘도 이미 모두 흘러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인한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인생을 희롱한 신에 대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가 택한 복수의 방법은 죽을 때까지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결심한 거였다. 그리고 그 맹세로 그는 손가락을 하나 더 잘랐다. - P96

살다보면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엉뚱한 미망이나 부조리한 집착에사로잡힐 때가 있게 마련이다. - P106

과연 객관적 진실이란 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입을 통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일까? 칼자국이 죽어가면서 금복에게 한 말은 과연 진실일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조차도 인간의 교활함은 여전히 그 능력을 발휘할 수있는 것일까? - P117

평생을 하역부로 일한 그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나르게 된 짐은 바로 그 어떤 짐보다도 무거운 제 자신의 몸뚱이였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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