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리가 겪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그가 내미는 손길을 철저히 외면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간 얼굴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추악했다.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매일을 보냈다. - P252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을 알게 되었을 때의 고독감 - P282

어쩌면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일지도 몰랐다. 커다란 고민에 맞닥뜨렸을 때 충실히 고민하는 대신, 일상의 과업들로 도망쳐버리는 사람. 그렇게 함으로써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다잡고 기어이 모든 감정을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사람.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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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다. 문제가 있는 근육을 정상화하라는 일이 주어지면 전력을 다해 그것에 임한다. 어떤 인물을 살해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래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나는 또한 전력을 다해 그것에 임한다. - P272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실증 가능한 진실 따위는 원하지 않아. 진실이란 대개의 경우, 자네가 말했듯이 강한 아픔이 따르는 것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아픔이 따르는 진실 따윈 원치 않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야. 그러니 종교가 성립되는 거지." - P276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선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어." 남자는 말했다. "선악이란 정지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장소와 입장을 바꿔가는 것이지. 하나의 선이 다음 순간에 악으로 전환할지도 모르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묘사한 것도 그러한 세계의 양상이야.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내가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하는 말이네" - P289

"복수만큼 코스트는 높고 이익은 생기지 않는 일은 없다." - P293

"마음에서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 따위,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아." - P295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어보는 게 좋다. 고 덴고는 생각했다. 이론적으로라기보다 어디까지나 경험상. - P296

세계가 ‘비참한 것‘과 ‘기쁨이 결여된 것‘ 사이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제각각의 형태를 만들어가는 작은 세계의 한없는 집적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창밖의 풍경은 보여주고 있었다. - P303

"무엇이 진짜 세계냐 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문제야." 리더라고 불리는 사내는 엎드려 누운 채 그렇게 말했다. "그건 결국 형이상학적인 명제가 되지. 하지만 이곳은 진짜 세계야. 그건 틀림없어. 이 세계에서 맛보는 고통은 진짜 고통이야. 이 세계에 찾아오는 죽음은 진짜 죽음이지. 흐르는 건 진짜 피야. 이곳은 가짜 세계가 아니야. 가상의 세계도 아니지. 형이상학적인 세계도 아니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하지만 이곳은 자네가 알고 있는 1984년이 아니야." - P320

어느 세계에 있건, 어떠한 세계에 있건, 가설과 사실을 가르는 선은 대개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아. 그 선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어." - P323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의 비율이 균형을 잡고 유지되는 것이야. 리틀 피플은, 혹은 그곳에 있는 어떤 의지는 분명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 하지만 그들이 힘을 쓰면 쓸수록, 그 힘에 대항하는 힘도 저절로 강해져. 그렇게 해서 세계는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 나가지. 어떤 세계에서도 그 원리는 변하지 않아. - P324

모든 일은 서로 마주보는 거울이니까. - P330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은 그저 싸구려 연극일 뿐이다." -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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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때로 애정은 그 무엇보다도 폭력적이고 직설적인 감정으로 돌변하곤 한다. - P198

우린 애초에 너무 다른 사람이었으니,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던 두 개의 선이 우연히 한 점에서 만난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멀어지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까. 누군가는 그게 성장이라고, 아니면 자연스러운 이별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 P200

나는 마치 미라처럼, 혹은 소금 기둥처럼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말라붙어가는 기분이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에 맞게 커가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가 자신의 속도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 P200

불행은 참 진부하지만 행복은 특별하다. - P221

어느새 그때의 일은 우리에게 일종의 외딴섬이 되었다. 명백히 우리 관계의 한중간에 놓여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려 하지도 않으며 심지어는 말조차 꺼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 - P229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나는 언제나 침묵해 버리는 사람이니까.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상처를 썩혀버리는 종류의 사람이니까. 그것이 내 삶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내 유일한 삶의 방식을 바꿀 수는 없었다. - P240

떠나간 것은 떠나보내야 한다. 기억도 사람도. 기억의 주인은 나다. -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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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세상 마음대로 굴러가게 놔두면 된다. - P246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일이라는 건 바라는 대로 풀리지 않는다. 세계는 오히려 그가 어떤 것을 바라지 않는지를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P246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말이죠. 세상에는 모르는 채로 덮어두는 게 좋은 일도 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당신 어머니 일도 그래요. 진상을 알게 되면 그건 당신에게 상처가 돼요. 그리고 일단 진상을 알게 되면 거기에 대한 책임도 떠맡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 P265

남자는 잠시 틈을 두고 나서 말했다. "내가 아직 맛본 적이 없는 고통이 있다면 그게 어떤 것인지 한번 보고 싶군." 거기에는가벼운 야유의 여운이 담겨 있었다.
"어떤 사람에게든 고통이란 즐거운 게 아니죠."
"하지만 아픔을 수반하는 게 효과는 더 크겠지. 그렇지 않은가? 의미 있는 고통이라면 나는 견딜 수 있어." - P267

"아픔은 많은 경우에 다른 아픔에 의해 경감되고 상쇄되지. 감각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야."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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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있는 정상적인 사람은 눈사태가 일어날 법한 계절에 눈사태가 일어날 법한 곳에는 가까이 가지 않아." - P126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가 아니다. 황폐하고 메마른 사막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변함없이 덴고라는 열 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의 강함과 총명함과 다정함을 그리워한다. 그는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육체는 멸하지 않고, 서로 나누지 않은 약속은 깨지는 일이 없다. - P133

신문은 ‘일어난‘ 일은 적극적으로 다루지만 ‘진행중인‘ 일에는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로 임하는 매체다. - P138

고전적으로 표현하자면, 당신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렸다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 두 사람은 우연히 만나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파워풀한 조합이었다. 각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서로 효과적으로 보완할 수 있는. - P187

친절이라는 건 지금(혹은 항상) 이 세계에 부족한 것 중 하나였다. - P188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런 행위를 통해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는 거예요. - P211

"공백이 생기면 누군가가 와서 채워야 해요. 다들 그렇게 하는거니까." - P215

"설명을 안 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 - P215

이 사람은 텅 빈 잔해 같은게 아니다. 그냥 빈 집도 아니다. 고집스럽고 협소한 영혼과 음울한 기억을 안고 바닷가 요양소에서 더듬더듬 삶을 이어가는 살아 있는 한 남자다. 자신의 내면에서 서서히 퍼져가는 공백과 어쩔 도리 없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아직 공백과 기억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윽고 공백이, 본인이 그것을 원하건 원하지 않건, 남겨져 있는 기억을 완전히 삼켜버릴 것이다. 그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가 이제부터 맞서려는 공백은, 내가 태어난 곳과 똑같은 공백일까.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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