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왜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눈물 같은 건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았다.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 없을 무거운 쇳날이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 P12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 P12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경비실을 지나 아파트 광장을 가로질러 걸으며 나는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날의 날씨를. 공기 중의 습도와 중력의 감각을. - P14

지나치게 뜨거운 그걸 천천히 먹는 동안,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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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는 아기가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새로운 존재는 작디작은 몸 전체를 산다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 P99

찰리의 죽음과 로즈가 그 죽음에서 본 배신이 재회 가능성을 전부 망쳤다. - P105

실비는 나무에 -생각과 고민을 털어놓던 나무에 -소설책을 숨겨두고 읽었고, 줄리아는 학업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전부 뛰어넘었다. - P108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인생은 정말 짧아. 중요한 것을 위해 중요하지 않은 것을 멀리하는 널 말리고 싶지 않았다. 넌 나랑 비슷해, 실비, 둘 다 학교나 직장이 우릴 채워주리라기대하지 않지. 우린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서 창밖을 내다보거나 우리 안을 들여다봐." - P108

"넌 더 많은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시간에 맞춰 지루한 수업에 들어가거나 말도 안 되는 규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늘 알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차이를 몰라, 그래서 주변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물론 그렇게 사는 게 짜증도 나고 지루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삶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너랑 나는 다행히도 꼭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지." - P108

"하늘도, 네 엄마의 텃밭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기차역에서 자는 노인도 우리의 일부야. 우린 전부 연결되어 있고, 그 사실을 깨달으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돼. 엄마랑 네 언니와 동생들은 그걸 모르지. 아무튼 아직은 몰라. 자신이 자기 몸안에 갇혀 있다고, 인생의 전기적 사실이 곧 자기라고 생각하지." - P109

"우리는 우리의 모자와 신발 사이에 갇혀 있지 않다." - P109

신부님과 추도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찰리를 전기적 사실에 따라 정의하겠지만 사실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큰 존재였기 때문에 실비는 마음이 아팠다. 찰리는 거대하고 아름다웠고, 제지공장에서 보낸 시간이 아니라 어린 어머니들에게 선물한 이유식에 존재했다. 친절한 행동, 딸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날 저녁 식료품점 뒤에서 실비와 함께 보낸 이십 분이 바로 찰리였다. - P110

그날 나눈 대화 덕분에 실비는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실비가 제3의 문을 찾으려 한 것은 아버지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줄리아는 최우수 학생, 여자친구, 아내 같은 꼬리표를 수집하려 했지만 실비는 꼬리표와 거리가 먼 곳을 향해서만 나아갔다. 실비는 무슨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믿음을 갖든 자신에게 진실하고 싶었다. - P110

실비와 자매들은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서 스스로를 깨달았다. 이제 그 시선이 사라지자 가족을 단단하게 묶고 있던 끈이 느슨해졌다. 아무 노력도 필요하지 않았던 일에 이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두의 집이었던 곳이 이제 로즈만의 집이 되었다. - P111

찰리의 시선을 받을 때 실비는 완전했다. 그런데 이제 어머니 앞에서는 구멍이 뻥뻥 뚫린 채 사라지고 있었다. - P112

줄리아가 말했다. "베스가 된 기분이야."
실비가 언니를 더욱 가까이 끌어안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말을 한 사람은 실비와 에멀라인, 세실리아밖에 없었다. 이전에 줄리아는 베스 같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감기나 독감에 걸려서 아프면 얼른 힘을 내서 나으려고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아연 정제를 빨아먹고 샐러드를 먹었다. 병이나 실망은 극복 대상일 뿐이었다. 줄리아는 농담으로도 굴복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 P115

줄리아의 계획에 아버지의 죽음은 없었고, 그 충격이 줄리아의 세계관 자체를위협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고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P115

역사 공부에서 중요한 것은 범위, 즉 중요한 사건을 둘러싼 지형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무엇도, 그 누구도 진공상태에 존재하지 않았다. - P137

두 자매는 서로에게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윌리엄은 두 사람의 그런 모습에 항상 감탄했다. 줄리아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정말 좋았다. 자매들 사이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사실 그의 아내는 절대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파다바노가의 네 자매는 인생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강점을 칭찬하거나 활용하고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었다. 줄리아는 설계자이자 리더였고, 실비는 독서가이자 신중한 목소리였으며, 에멀라인은 돌보는 사람, 세실리아는 미술가였다. - P140

"난 몰랐어요" 실비가 잠시 말을 멈췄다 "상실이 전부가 될 줄은, 모든 순간의 일부가 될 줄은 말이에요. 누군가를 잃는 것이 너무나많은 것을 같이 잃는다는 뜻인 줄은 몰랐어요." - P145

줄리아는 평생 다른 사람들-부모님, 동생들, 윌리엄-을 고치려고 애썼지만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줄리아는 아버지를 되살리거나, 어머니를 시카고에 붙잡아두거나, 세실리아를 금욕주의자로 만들거나, 윌리엄을 야심 차게 만들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을 위해서, 정말 중요한 것을 위해서,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그동안 기술을 미세하게 가다듬었던 것이다. 줄리아는 귀여운 딸을 보호하고 찬양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자기 멋대로 하게 놔둘 생각이었다. 딸이 있으므로 줄리아는 온전했다. 그녀는 감탄하며 깨달았다. 나는 날 사랑해. 지금까지는 이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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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은 부모님에 대한 희망에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했지만 편지가 오자 원치 않는 감정이 치솟았다. 베개 밑에 봉투를 넣고 창밖으로 새를 쫓듯이 마음속에서 희망을 내몰았다. 그는 부모님이 본인들 인생에 그를 원하지 않았음을 늘 받아들였다. - P70

"전부 다 고마워요, 엄마." 윌리엄이 말했다. 엄마라는 말이 나올 때 목이 아팠다. 거의 써본 적 없는 단어였다. 친어머니는 윌리엄이 아예 부르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는 듯해서 그렇게 했다. 이 단어는 윌리엄의 마음속에서 녹이 슨 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 P84

로즈는 도끼로 가족이라는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잘라내는 중이었고, 이는 아픔을 주는 동시에 겪고 있다는 뜻이었다. - P95

그뒤 이십 분 동안 줄리아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실리아의 진통을 겪었고, 새로운 인간을 만들고 만나는 일의 어마어마한 무게에압도당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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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태어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해보았을까?
나는 그 사람에게 죽는 것 역시 행운이라고 얼른 알려준다. 나는 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과 죽음을 지나치고, 새로 씻긴 아기들과 탄생을 지나친다. 그리고 내 모자와 신발 사이에 갇히지 않고,
여러 겹의 목적들을 살핀다. 똑같은 둘은 없다. 전부 다 좋다.
대지는 훌륭하며 별은 아름답고, 그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좋다.
-월트 휘트먼, 「나 자신의 노래 7」 - P9

그동안은 아이든 어른이든 윌리엄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항상 시선이 그를 통과했다. 부모님은 윌리엄을 거의 쳐다보지도 않았다. 윌리엄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윌리엄은 재미없고 잊어버리기 쉬운 아이였으니까. - P13

그날 오후 윌리엄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집으로 달려갔다. 어른이 그를 똑바로 바라본 것-윌리엄을, 윌리엄이 뭘 하는지를 알아본 것-은 처음이었고, 그 관심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 P14

윌리엄은 이제 아플 시간도, 걱정할 시간도 없었다. 이제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 퍼즐이 맞춰진 것 같았다. 코트에서 남자애들이 윌리엄을 알아보았고, 체육 선생님도 알아보았다. 윌리엄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을지언정 세상이 가르쳐주었다. 윌리엄은 농구선수였다. - P15

그는 농구코트 바깥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아무도 윌리엄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라지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 같으리라. 아무도 캐럴라인에 대해 말하지 않았듯이 아무도 윌리엄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다. - P17

아버지의 손을 꽉 잡으면서 부모님을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고, 두 사람에게는 아이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게 자신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 P18

그가 생각하는 학생의 역할은 입을 닫고 지식을 최대한 흡수하는 것이었다. 윌리엄은 곱슬머리 여학생에 대해 교수와 의견이 같았다. 즉, 자주 끼어들어서 질문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윌리엄에게도 흥미로운 질문인 경우가 많았지만 말이다. 진지한 수업이라는 직물은 학생들이 귀를 기울이고 교수가 말로 이루어진 카펫을 신중하게 펼쳐 지혜를 전달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 P19

줄리아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자기 삶이 저멀리가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내 빨리 자라서 이 자리에 오려고, 성공한 어른이 되려고 기다렸다. - P44

실비는 이 도시의 모든 빛과 날씨를 보여주는 통창과 널찍한 도서관을 구석구석까지 사랑했다. 도서관이 누구나 환영하는 것도, 아무리 애매하고 우스꽝스러운 질문을 해도 사서들이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것도 좋았다. - P50

로즈가 결혼생활에 실망한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즈에게는 딸들이 교육을 받으며 강하게 자라서 사랑처럼 모호하고 못 믿을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두 발로 서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했다. - P51

줄리아는 사랑 때문에 더 행복하고 밝아졌지만 실비와 달리 사랑을 삶의 이유가 아니라 잘 쌓아올린 삶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 P52

줄리아는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믿었다. 교육은 좋은 결혼으로, 좋은 결혼은 적당한 수의 아이들과 재정적 안정으로, 그리고 부동산으로 이어졌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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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편하면 절대로 좋은지 알 수없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 P169

스웨덴에서 사회보호대상자가 되려면 양심 없이 태어나야 한다. 사회복지과에 가는 일을 짜증나고 창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인권‘ 조항도 외워야 한다. 그러고 나면 아마 더 쉬울 것이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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