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 P43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들을 참과 거짓의 성근 그물코 사이로 빠져나가게 한 뒤 사금 한줌 같은 명제를 건져올리는 논증의 과정에는 늘 위태하고 석연찮은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담하게 오류들을 내던지며 한 발 한 발 좁다란 평균대 위를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 묻고 답한 명철한 문장들의 그물 사이로 시퍼런 물 같은 침묵이 일렁이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계속 묻고 답합니다.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 P44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 P52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 P55

오래전에 끓어올랐던 증오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 P62

말로 열리는 통로가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는 것을, 이대로 가면 아이를 영영 잃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통로는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갔다. 간절히 구할수록 그것을 거꾸로 행하는 신이 있는 것처럼. 신음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더 고요해졌다. 피도 고름도 눈에서 흐르지 않았다. - P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무슨 수로 자애롭고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것을 믿으라는 거지요?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다.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빨래통 두 개, 모탕, 벽에 걸린 갈퀴와 삽, 어쩐지 모든 것이 제 안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말하는 듯하다, 자신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쓰였는지, 모든 것이 그 자신처럼 나이들어, 각자의 무게를 지탱하며 거기 서서, 전에는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고요를 내뿜고 있다. - P43

물건들은 제각기 지금까지 해온 일들로 인해 무겁고, 동시에 가볍다, 가늠할 수 없을 만큼, - P43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 P43

그의 연장은 빠짐없이 제자리에 놓여 있다. 대부분이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들인데 그 모든 것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럴 수가, 생각하며 요한네스는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바라본다, 모든 것이 어쩐지 원래 그대로이면서 전혀 다르다, 평소와 다름없는 물건들인데 왠지 귀해 보이며 금빛으로 반짝인다. 그리고 묵직해 보인다. 여느 때보다 훨씬 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 같으면서 전혀 무게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 P44

여기 서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미친 영감탱이 같으니, 평범하기 짝이 없는 물건들을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고 있잖아,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 P45

요한네스는 언덕을 오르며 생각한다, 어쩐지 모든 것이 너무 다른걸, 사물들도 집들도 달라 보여, 더 무거운 듯하면서도 어쩐지 더 가벼워 보이고, 뭔가가 땅에서부터 그리고 하늘로부터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 P47

풀이 무성히 자라 막히다시피한 길을 걸어 만으로 내려간다. 거기 그의 배와 페테르의 작은 고깃배가 있고, 레이프의 배와 다른 배들도 계류밧줄에 묶여 있다. 멈춰 서서 만의 보트하우스들을 내려다보니 그것들 역시 어딘가 다른 느낌이다. 요한네스는 선 채로 눈을 감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보는 것마다 변해 있으니, 눈앞의 보트하우스들 역시 너무 무거운 동시에 믿을 수 없이 가벼워 보인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요한네스는 생각한다, - P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딘가에 반드시 끝은 있는 법이야. ‘여기가 끝입니다‘ 라고 일일이 적어놓지 않았을 뿐이지.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에 ‘여기가 끝입니다. 이보다 위쪽에는 발을 얹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어?" - P187

"상식을 발휘하고, 눈을 똑똑히 뜨고 있으면 어디가 끝인지는 저절로 알게 된다?" 아오마메가 물었다. - P187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엄격한 작업 뒤에는 육체의 접촉을 수반하는 따스하고 조용한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 P191

만일 인생이 에피소드의 다채로움에 의해 측량되는 것이라면, 그의 인생은 나름대로 풍성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P204

아버지와 아들은 저마다 깊고도 어두운 비밀을 껴안고 있었다. - P2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그런 쪽의 감이 뛰어나. 매사에 재능이라고는 타고나지를 못했지만 감만은 넉넉히 갖고 있지. 외람되지만 그거 하나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어. 이봐, 덴고 재능과 감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알아?"
"모르겠는데요."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도 반드시 배부르게 살 수 있는건 아니야. 하지만 뛰어난 감을 가지고 있으면 굶어죽을 걱정은 없다는 거야." - P144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하는 일도 있어. 어른의 세계에서도 비슷하지만 아이들 세계에서는 그게 좀더 직접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거야." - P158

"자신이 배척당하는 소수가 아니라 배척하는 다수에 속한다는 것으로 다들 안심을 하는 거지. 아, 저쪽에 있는 게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하고. 어떤 시대든 어떤 사회든 기본적으로 다 똑같지만 많은 사람들 쪽에 붙어 있으면 성가신 일은 별로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래, 소수의 사람 쪽에 있으면 성가신 일만 생각해야 하지." - P160

노부인은 미소 지었다. "세상에는 대신할 자를 찾을 수 없는사람이라는 건 없지요. 제아무리 지식이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어도 그 후임자가 대개는 어딘가에 있는 법이에요. 만일 세상이 대신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하다면 우리는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빠질 겁니다. 물론......" - P176

"나비와 친구가 되려면 우선 당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해요. 인간으로서의 기척을 지우고 여기서 가만히 자신을 나무나 풀이나 꽃이라고 믿는 거예요. 시간은 걸리지만 일단 상대가 마음을 허락하면 그다음은 저절로 사이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요." - P177

나비는 그 무엇보다도 허망하고 우아한 생물이랍니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게 태어나 한정된 아주 조금의 것만을 조용히 원하고, 이윽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살그머니 사라져요. 아마도 이곳과는 다른 세계로 - P178

"우리는 잘못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노부인은 아오마메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P181

"우리는 올바른 일을 했어요." 노부인은 말했다. - P1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