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도 훨씬 더 나쁜 것들이 많이 존재한다. - P61

왜냐하면 이 기소사건과 관련된 한 재판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이 역사적 재판의 심판대에 서 있는 것은 한 개인이 아니고 나치 정부도 아니며 바로 역사 전체에 나타나는 반유대주의이다."
이것은 벤구리온이 설정한 기조였고, 이를 하우스너 씨는 충실하게 따랐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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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네다의 짧은 일생 속에 담겨진 많은 의미를 생각해본다. 35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 그해까지도 땡볕에서 부소산성을 측량하던 백면의 기술자이고 무명의 건축학도였던 그가 7년간 말없이 성실하고 치밀하게 측량했던 그 경험을 토대로 불과 3년 만에 이처럼 위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인생을 사는 법과 학문하는 법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그의 삶과 학문은 ‘작은 것의 힘, 작은 것의 위대함,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P197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 - P197

석굴은 경이적인 정확도로써 기하학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정확도는 1천분의 1, 아니 1만분의 1에 달한다. 1만분의 1이란 10m에 대하여 1mm의 오차를 말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석굴의 각 석재가 얼마나 정확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뜻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석굴 본당은 정원(正圓)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원호(圓弧)를 구성하고 있는 조각의 숫자만도 15구에 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거대한 화강암의 암석을 갖고 마치 밀가루반죽이라도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듬어놓았던 신라인의 솜씨도 놀랍거니와 그러한 솜씨를 뒷받침하여준 신라인의 기하학에 대해서도 경탄할 뿐이다. - P200

진짜 과학자란 모름지기 자연현상을 거스르지 않으며, 거기에 순응하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분임을 나는 여기서 알았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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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피고인이 기소되면 변호를 받고 판결을 받아야 한다. 또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다른 질문들, 즉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왜 그 일이 일어났던가?" "왜 유대인이?" "왜 독일인들이?" "다른 나라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동맹국들의 공통 책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어떻게 유대인은 자신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에 협조할 수 있었을까?" "왜 그들은 도살장에 가는 양처럼 자신들의 죽음을 향해 걸어갔을까?" 등과 같은 질문들은 중지되어야 한다. - P52

심판대에 오른것은 그의 행위에 대한 것이지, 유대인의 고통이나 독일 민족 또는 인류, 심지어는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 - P52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고, 분노보다는 슬픔을 허용하며, 그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 P53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하는 참상의 중압감 아래 무너진 것은 바로 이 재판의 연극적 측면이었다. 재판이란 희생자가 아니라 행위자와 함께 시작되고 끝나는 연극과 흡사하다. 쇼와 같은 재판은 무슨 일이 일어났고 또 어떻게 일어났던가에 대한, 한정된 분량의 잘 정리된 개요를 보통 재판보다 훨씬 더 절실히 요구한다. 재판의 중심에는 행위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행위자는 연극의 주인공과 같다. 따라서 만일 그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가 행한 일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지, 그의 행위가 야기한 타인의 고통 때문에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 - P57

비유대인의 세계에 주는 교훈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100여만 명의 아기들이 단지 유대인의 아기라는 이유 때문에, 어떻게 나치스에 의해 살해되었는가를 우리는 세계만방에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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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석굴암은 분명히 하나의 마음에 의해 통일된 계획의 표현이다. 인도 아잔타나 중국 용문석굴처럼누대의 제작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하나의 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연한 구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적 제작이다. 외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놀랄 만큼 주도면밀히 계획된 완전한 통일체이다. - P186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도 또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불타는 소리없이 조용히 그 부동의 모습을 연화좌대 위에 갖춘다. 우러러보는 자는 그 모습의 장엄과 미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완전히 내적인 영(靈)의 세계다. 그는 앞에 네 명의 여보살을, 뒤에는 십일면관음을, 그리고 좌우에는 그가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영원의 영광을 고한다. 감실에 있는 여러 불상들은 그 법열을 찬송하는 듯하다. 여기는 (석굴 밖) 외부의 힘의 세계가 아니다. 내적인 깊이의 세계다. 미와 평화의 시현이다. 또한 장엄과 그윽함의 영기(靈氣)이다.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 안팎에 나타나 있는가! 모든것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간다. 힘에서 깊이로 들어간다. 움직임[動]보다도 고요함 속에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석굴암 속에서 다하는 느낌이다. - P186

침묵의 물체를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솜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 P189

불상이란 곧 인간이 만들어낸 절대자의 상이다. 신, 절대자, 완전자,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곧 이상적 인간상의 구현이다. 그것은 모든 고대인들이 추구한 조화적 이상미이기도 하다.
모든 양극의 모순이 극복되어 하나의 이상적 질서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고전적 가치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전은 고전으로서 통한다. 그것은 양의 동서, 때의 고금을 관통하는 이상인 것이다.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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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는 자아와 타자의 비대칭적 차이와 더불어 시작한다. 윤리적 또는 도덕적인 것은 서로에 대한 적절한 질서지음 또는 서열 매김에 기초한다. - P39

아이히만은 타인 또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또한 ‘행위‘할 능력,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예컨대 그에게는 어떤 것을 말하기‘란 언어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했다. - P40

아이히만은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던 것이다. - P41

아이히만은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책임의 윤리를 실천할 수 없었다. - P41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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