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자기가 살지 않은 과거는 뭉뚱그리는 관성이 있다‘ - P149

냉소는 독이었지만 적당히 쓰면 자기 연민을 경계하는 데에 유용했다. - P150

"교사는 감사한 직업이고, 가끔은 아주 감사한 직업이에요. 학생에게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말예요." - P151

있는 꿈도 없는 듯 주머니에 쑤셔넣고 문제집을 푸는 게 과거의 입시라면, 없는 꿈도 있는 듯 만들어서 스토리텔링을 하는 게 지금의 입시였다. - P152

교실에 들어서며 대다수 학생이 노트 한 권, 펜 한 자루 없이 나타났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불길한 암시로 해석하지 않았다. 선입견을 경계해야 했다. 고전에 담긴 지혜와 아름다움은 닫힌 마음에 스며들 수 없었다. 그러한 조건을 곽 자신도 공평히 수용했다. 수강생들의 성적 자료도 열람하지 않았으며, 담임교사에게 평판을 묻지도 않았다. ‘학생‘으로 통칭하며 ‘성적‘이라는 가치로 파악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야 했다. - P156

그날 밤 곽은 사철 제본되어 펼침이 좋은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수업 첫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수업 마지막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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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봉투 받는 애구나.‘
여자애라거나 남자애라거나, 귀엽다거나 못생겼다거나, 공부를 잘한다거나 못한다거나 이전에 권진주와 김니콜라이는서로를 그렇게 알아봤다. - P114

고등학교 졸업식 날 진주는 그녀를 찾아가 롤케이크를 내밀었고 감사 인사를 떠올리며 쭈뼛거렸다. 그녀는 진주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고 덕담 몇 마디 끝에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 밖에서 기다리시겠다. 얼른가봐." - P117

실습이 끝나고 니콜라이가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으로 시작하는 근로계약서를 읽으며 ‘통상임금‘과 ‘기본급‘ ‘고정적 수당‘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할 때, 진주는 모니터에 얼굴을 붙이고 국가장학금 홈페이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소득 평가액에 재산의 소득환산액을 더한뒤・・・・・・ 기준중위소득 대비 비율에 따라......‘ 두 사람의 스무살은 낯선 단어들을 마주하면서 시작되었다. - P119

머슴질도 대감집에서 하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 P123

진주는 돈은 꽤 써버렸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고 느꼈다. 같은 동네에 지글지글 보글보글을 함께할 사람이 한 명쯤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인 듯했다. - P124

라면 다섯 봉지와 계란 여섯 알, 조미김 한 팩과 인스턴트 건조 미역국을 주문하는 사람. 그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비싼 캐나다산 개 사료를 한 번에 다섯 봉지씩 주문하는 사람. 오만이천원짜리 스페인산 올리브유 아홉 병을 한 번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요리해서 먹는지, 십삼만구천원짜리 이탈리아산 소가죽 벨트를 쏜살배송으로 주문하는 사람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했다. 진주 자신도 즉석밥이나 생수 따위를 종종 주문했는데, 그 점에 비춰보면 그들도 단지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서 자기가 시급을 받고 시간을 팔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 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 주는 행복의 알맹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 P127

낙엽이 다 떨어지는 동안 진주와 니콜라이는 서로의 방에 몇 번 갔다.
다를 것도 없는 방이었다. 자취생들이 애용한다는 인터넷쇼핑몰에서 낮은 가격 순으로 검색해 고른 가구들. 다이소에서 산 생활용품들. 당장이라도 상자 두어 개에 쑤셔넣을 수 있으며 일부는 실제로 상자에 담긴 채 방치된 것들. 집이라기보다는 이사와 이사 사이에 잠시 머무르는 방. 난데없는 에펠탑 엽서라거나 포켓몬 봉제 인형, 배드민턴 채 세트 같은 것들만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 P131

잠들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그저 누운 채로 숨을 쉬다보면 방안으로 노을이 스며들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사라진 뒤 조용히 일렁거리는 커튼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남 얘기 같았다. 예쁘고 멋있고 촉감 좋은 물건들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어느 날 흰 봉투가 날아와 계약 종료 통지서나 처음 들어보는 병명의 진단서를 덜컥 내놓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 P133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 P142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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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움을 찾아 퇴사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나다움을 유지하는 다섯 가지 습관을 알아볼까요. 나답게 살기 위해 비혼을 선택했어요. 그는 "나다운 게 뭔데! 나다운게 뭐냐고!"라고 소리내보고 큭큭 웃었다. 그것 또한 언젠가 본 드라마 주인공을 흉내낸 것이었으므로 그는 다시 큭큭웃었다. 그리고 자기다운 게 뭔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 - P90

삼겹살이 다 익을 때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결혼이란 적령기에 옆에 있던 사람과 하는 것이며, 돈을 모으려면 꼭 해야 하지만 돈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죽음만큼이나 미룰수록 좋지만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하긴 해야 하며, 요새 젊은 친구들은 책임감이 없어서 어려운 일이지만, "시발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며 분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P90

그는 한 인간의 본질을 예고하는 구체적인 징후들은 따로 있으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면 그것들을 포착할 수있다고 믿었다. - P92

아내의 경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남직원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내 불문율을 깼다. 몇몇 상사가 빈정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회사에는 그와 같은 직군으로 이백여 명이 근무했고 그중 열한 명은 정확히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어떤 무대에서도 그녀의 남편은 자신 하나뿐이었고 그 사실을 떠올리면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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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청 공무원인 아버지와 농협 창구원인 어머니는 많은 것을 가르쳤다. 대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였다. - P82

스무 살 새내기. 그는 얼마간의 설렘과 잉여 시간을 연극부에 투자하기로 했다. 의외라는 동기들의 반응에 그는 네모나지도 둥글지도 않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답했다.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잖아." - P83

"중세의 예술가들은 조각을 대리석 안에 감춰진 신의 형상을 꺼내는 일이라고 여겼죠. 통계학이란 마찬가지로 숫자 안에 숨은 메시지를 꺼내는 일이랍니다"라는 옛 교수의 말은 멋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메시지는 숫자 안에 숨은 것이 아니라 그가 참석하지 못하는 회의실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정해진 결론에 봉사하도록 숫자를 가공하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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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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