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도 끊기고 더이상 뉴스거리조차 되지 못하던 그 지역은 사람들 사이에서 금세 잊혀졌다. 일상은 정신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무도 찾지않는 K구역에 대해 까맣게 잊고 지냈다. 내 청춘의 가장 농밀했던 시간이 묻혀 있는 장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래 일상은 그런 것이다. 마치 사막의 마른 유사처럼 한번 잡아끌기 시작하면 결코 헤어나올 수 없는 것. - P270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욕망을 지닌 사람이었으나 언젠가부터 합격 이후의 삶에 대해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게 선명한 현실로 다가오는 것은 찬란한 미래가 아니었다. 변해가는 애인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었던 날들의 참담함. 내게 현실이란 그런 참담한 기억 뿐이었다. - P287
생존을 위해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그런 커피 때문에 선배가 지금 여기에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 P292
희망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절박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의 말을 기록했다.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 P263
당신은 회사에서 시위하는 여자를 내몰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세웠다고 했다. 바리케이드 밖으로 밀려난 여자와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숙이고 잰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당신은 식은땀이 났다고 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비겁해지는 나 자신이 두려워. 당신은 어느 날 밤, 침대 위에서 내 손으로 당신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 P245
피로감에 잠식당해 서로 주고받는 말들이 줄었다. 우리는 익숙한 얼굴의 이웃만큼만 친밀했고, 오래전에 헤어진 남매처럼 서먹했다. 서로의 탓이 아닌 것쯤은 알았는데도 과로의 시간이 누적되고 서운함이 켜켜이 쌓이면서 우리는 새된 목소리로 싸웠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모를 수가있어. 빗나가고, 빗나가고, 빗나가던 마음들. - P249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말을 받아 적는 것은 처음이었다. - P263
어쨌든 기억력이 단 삼 초뿐인 생명체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불현듯 궁금해져. 삼초 후면 소멸될 것이 자명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면 삶은 훨씬 수월해질까. - P169
아니, 어쩌면 지금의 행복과 짜릿함이 삼초 후면 또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라는 불안에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어버릴지도. 분명한 것은 기억이 오직 삼 초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그 생명에게 역사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거야. 그렇지? 결국에는 사랑도, 슬픔도,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마저도. 그것들은 모두 기억에 의해 지속될 수 있는 것일 테니까. - P170
나의 기다림이 우리 관계를 지속시켜준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어. 알고는 있지만, 있잖아. 아주 가끔은 가슴이 아파. 때로는 당신이 그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 P171
사실 사랑이 식는데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만은 동서고금의 진리였다. - P209
충동은 의지보다 언제나 강했다. - P149
행복에 겨운 사람은 타인의 불행 앞에서 무감해지는 법이었다. - P151
우습게도 상대가 나보다 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면 할수록 나는 상대에게 더욱 관대해졌다. - P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