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이나 부모님이 죽을 거라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가장 걱정되는 것은 엄마였다. 세상은 엄마라는 힘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평생을 공상에 잠겨 살았던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인정사정없는 이성의 추진력으로 우주를 헤쳐나갔다. 엄마는 우리가 벌이는 모든 싸움의 재판관이었다. 엄마의 꾸짖는 말 한마디면, 우리는 구석으로 가 숨어 울면서 순교자의 고난을 겪는 자신을 상상하게 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엄마의 입맞춤 한 번이면 우리는 다시 왕자가 되었다. 엄마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혼란 속에서 분해되고 말 터였다. - P193

그것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내 집착은 막을 내렸다.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생각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앨마를 생각하지 않는 여분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시간에 죽음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벽을 세워 그런 생각을 차단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해 새롭게 배우는 것들이 하나하나 그 벽을 이루는 돌이 되었고, 마침내 어느 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영원히 떠나왔음을 이해했다. 그렇긴 하지만. 그 벽은 또한 유년기의 고통스러운 생생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었다. 목덜미에 죽음의 숨결을 느끼며 숲속에, 굴에, 지하실에 숨어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진실을,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심장마비를 겪고나서야, 나를 유년기에서 분리해준 벽의 돌들이 마침내 허물어지기 시작하고서야, 죽음의 공포는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예전 어느 때 못지않게 무서웠다. - P199

도서관을 나왔다. 도로를 건너며 무자비한 외로움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어둡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버려진 채, 간과된 채, 잊힌 채, 보도에 서 있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먼지만 모으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서둘러 지나쳐 갔다. 내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모두 나보다 행복했다. 해묵은 부러움을 느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바쳤을 것이다. - P200

세상의 문들이 제아무리 꽉 닫혀 있어도 내게는 진정으로 잠긴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외로움 속에서도 위안을 느꼈다. - P204

결국, 내 친척이 이 기술을 가르쳐준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니었을까? 내가 영원히 투명인간으로 남을 수 없음을 그는 알았던 것이다. - P2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간 춘희의 수형생활은 침묵과 망각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피해 구석자리를 찾아다녔다. 그 동안 새순처럼 여리고 무구한 춘희의 감성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춘희는 자신의 상처를 어떤 뒤틀린 증오나 교묘한 복수심으로 바꿔내는 술책을 알지 못했다.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 다른 어떤 것으로도 환치되지 않았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엔 고통이 화석처럼 굳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춘희의 방식이었다. - P35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 P301

뭔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만이 세상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그들은 한 줄 또는 두 줄로 세상을 정의하고자 한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명제가 그런 것이다.
법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 P310

재판정은 그저 피고의 운을 시험하는 무대였을 뿐 정의와는 애초에 아무런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장군의 시대는 대개 그런 식이었다. - P311

벽돌을 만지는 동안 그녀는 그 모든 것이 사라졌으며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없는 상실감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도소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었다. - P330

그는 결국 세상에는 비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비밀은 오직 혼자만이 간직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비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P3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 인간의 죽음은 죽은 사람 본인 외에는 그누구의 것도 아닌데. - P178

같은 주제에 각자 얼마나 다르게 접근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종이에 적힌 단어들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친구는 망설임을, 블랙홀을, 말과 말 사이의 가능성이 펼쳐진 들판을 보았다. 친구는 어룽거리는 빛, 비상의 희열, 중력의 슬픔을 보았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평범한 참새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았다. 리트비노프의 삶은 실재하는 것들의 무게를 느끼며 기뻐하는 것이었으나, 친구의 삶은 지척거리는 무거운 사실들로 무장한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 P179

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항상 노력해왔다. 그게 내 묘비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레오 거스키.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 P185

묘사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나는 고집스러운 노새처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 P186

내 인생의 이야기. 나는 열쇠공이었다. 이 도시의 어떤 자물쇠라도 열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열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열지 못했다. - P1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文은 점점 더 말을 잃어가 하루 종일 사람들 틈에서 일을 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그렇게 그는 현재로부터 과거로, 현실로부터 꿈으로,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사라진 것으로, 사람들간의 대화와 교통으로부터 혼자만의 고독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 P251

춘희 또한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이즈음 그녀가 새로 흥미를 가진 놀이는 죽은 곤충이나 동물들을 외진 벽돌더미 아래 모아놓는 일이었다. 그것은 점보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가 새로 인지하게 된 낯선 세계에 대한 그녀 나름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 P251

두 사람은 곧 팔씨름을 하기 위해 마당 한복판에 마주 앉았다. 춘희의 손을 맞잡는 순간, 소년은 알 수 없는 강렬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마주 앉은 소녀가 언젠가 자신의 운명과 관련이 있을 거라는 수컷으로서의 본능적인 예감이었다. - P252

-그런데 그 공산주의라는 게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죠?
그러자 정치가가 대답했다.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각의 이름이죠.
-생각에도 이름이 있나요?
-당연히 있죠. 세상에 이름이 없는 건 없어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실용주의,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물신주의, 개인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 맹견주의... - P261

끝없이 상실해가는 게 인생이라면 그녀는 이미 많은 것을 상실한 셈이었다. 유년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하고, 첫사랑을 상실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는 젊음을 상실해버려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모두가 빈 껍데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싱그러운 수련의 육체 앞에서 뼈저리게 확인해야 했다. - P264

그날 이후, 소녀를 지배한 건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그리고 인생의 절대 목표는 바로 그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 P271

사진 속에 담긴 금복의 얼굴엔 부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배타적인 아집과 거만, 자신 안에 있는 여성을 채 다 지우지 못한 당혹스런 혼돈과 퇴폐적인 분위기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긴 모습이었다. - P286

끝없이 달아나고자 했던 과거는 다시 고스란히 그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금복도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에 취하면 그는 죽은 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 P2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