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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문학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 호기심, 상상입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었고 다른 운신의 여지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 앞으로의 삶도 그러할 것이라면 우리에겐 온갖 가능성으로 가득한 fiction을 논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2013년 캐나다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입니다. 앨리스 먼로는 캐나다 ‘총독문학상’ 3회, ‘길러 상’을 2회 수상하며 마거릿 애트우드, 얀 마텔 등과 함께 캐나다를 대표하는 작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 문단의 작가들이 다투어 존경을 표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이야기꾼’이기도 합니다.
음악 앨범이라면 타이틀곡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런어웨이의 첫 번째 이야기인 런어웨이의 뒷부분을 마저 읽어 보았다.
자신으로부터 아내가 도망가려는 것을 실비아가 도와준 것에 분개한 클라크가 그녀를 찾아왔다. 미처 문을 닫아놓지 않은 베란다에 서서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런어웨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변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칠 법한, 제각기 나름의 상처나 사연을 지닌,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소설의 주인공들이죠. 남편과의 삶에 찌들어 도피를 꾀하는 칼라, 기차에서 우연히 낯선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줄리엣, 사랑했던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낸시 등 앨리스 먼로가 불러낸 다양한 군상의 삶이 워낙 다채롭고 심오하며 완전해서 마치 인생을 압축시켜 모아놓은 듯합니다.
작가는 인간의 미스터리에 대한 절제된 관찰을 펼치며, 서스펜스마저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그녀가 그리는 스릴 넘치는 현실의 의외성은 아주 사소한 순간조차 일평생 가장 중요한 진리를 담는다는 사실을 제대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죠. 욕망과 절망, 희미해진 희망과 밀려드는 깨달음으로 소설 속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하나같이 남다릅니다. 희망을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또 다른 희망을 짓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 소설은 담담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삶 속에 스며든 첨예한 현실의 문제들을 마주하여 복잡한 기교 없이도 실오라기 하나가 풀려나듯 자연스럽게 해결해나가는 작가의 필력은, 정교한 보석 세공사의 작업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여성의 섬세한 자의식과 내면의 풍경을 담담하게 수놓듯 보여주는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어디 한군데 모나지 않습니다
"훗날 그녀에게 그녀가 지금 택한 길, 그녀의 인생에 일어난 지금과 같은 변화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한다면, 그녀는 문 하나가 뒤에서 꽝하고 닫힌 것 같았다고 말했을 것이고 실제로도 그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꽝 소리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묵인이 파문을 일으키며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고, 남은 사람들의 권리는 간단하게 묵살되었다."(p.275)
먼로는 이처럼 설명할 길 없는 인간의 심리 상태를 매우 명징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먼로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면서 시상 배경으로 "심리적인 리얼리즘을 담아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먼로는 어쩌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종합적으로 묘사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 감정의 연산에 대한 먼로의 직감은 고스란히 이들에게 축복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