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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인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
알베르 카뮈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프랑스에서 출간되어 선풍을 일으키고, 세계 열여섯 나라에서 번역ㆍ출간된 실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유고〈최초의 인간〉, 최초의 인간은 미완성 작품이죠. 이 책이 완성작이었다면 까뮈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 되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60년 1월4일 교통사고로 사망한 카뮈의 가방 속에서 쓰다 만 소설 원고가 발견되었는데, 펜이 가는 대로 숨 가쁘게 써 내려간 1백44쪽의 초고는 카뮈의 작품목록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자전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1913년 가을 서른살 가량의 프랑스 남자가 알제리의 한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기자마자 그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3부로 예정되었으나 작가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1부에서 끝난〈최초의 인간〉은, 완전한 소설로 다듬어지지 않은 까닭에 카뮈의 감수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다른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된 요소들이 작품 곳곳에서 정제되지 않은 채 흘러넘쳐납니다. 태양의 열기와 강렬한 빛, 바다 등이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주목한 카뮈식 휴머니즘과 잘 어울러져 있으며 마치 그곳에서 그와 만나는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게 되죠.
미완성인 이 작품은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물론 카뮈를 잘 모르는 사람이나 별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따분한 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랬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자전적일줄이야. 그냥 자서전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출간된 이 책은 1960년 카뮈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차에 함께 있었던 원고를 딸인 카트린 카뮈가 모아 34년 만인 1994년 출간했기 때문입니다. 초고와 다름이 없다는 거죠. 군데군데 카뮈는 부연설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메모를 해두었고, 책에도 그 사실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괜히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3인칭 소설인 '최초의 인간'의 주인공은 자크 코르므리. 자크는 카뮈의 이름인 알베르와 큰 차이가 있지만, 코르므리는 왠지 카뮈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었습니다. 마흔살의 자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죽은 아버지의 묘를 찾아 노르망디 인근의 생브리외에 갑니다. 거기서 지금의 자신보다 묻혀 있는 아버지의 나이가 더 어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아버지의 묘를 다녀온 자크는 귀머거리이자 벙어리인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알제리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소설은 자크의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소설 속에서는 현재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죠. 그래서 묘사와 감정 전달에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 마치 프루스트의 작품을 보듯 문장의 호흡이 깁니다.(그래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하면 이 정도는 짧은 편에 속하죠. 정말 프루스트는 호흡곤란을 일으키니까요.)
소설은 빠르게 자크의, 아니 카뮈의 어린 시절을 더듬어 갑니다. 알제리의 태양, 바다, 어머니 그리고 가난. 초등학교를 마친 카뮈가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스승 제르맹 루이 덕에 가능했다고 하죠. 제르맹 루이가 노벨상 수상자 카뮈에게 1959년 보낸 편지가 부록으로 첨부돼 있습니다. "그리운 아이에게"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는 세계의 지성이 된 어린 제자에게 느끼는 '자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배어있습니다.
"나는 가난 속에서 자유를 배웠다." 카뮈는 이미 여러 글에서 자신의 가난을 얘기했었죠. 우리는 종종 불만스런 결과에 대한 변명으로 가난을 꼽는다. 하지만 카뮈에게 가난은 삶을 배우는 창의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제르맹 루이는 '말쑥한 옷차림'과 '낙천적인 성격' 때문에 가정방문 전에는 카뮈의 가난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하죠.
방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카뮈의 할머니는 중학교에 올라간 카뮈가 방학 때 노는 것을 가만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어린 카뮈에게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시키기 위해 "가난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둔 아이"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두 달의 아르바이트 기간을 지내고 일을 그만 둘 때 카뮈는 '고통스런 마음'으로 책임자에게 할머니의 거짓말을 뒤집는 진실을 얘기해야 했습니다.
"방학을 즐기지 못하는 권리를 갖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고, 그토록 좋아하는 여름 하늘과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하고 나서, 학교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또 거짓말을 한다는 이 부당함을 생각하니 죽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막혔다."
'최초의 인간'은 아버지의 부재와 어머니의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로' 창조해야 했던 카뮈 자신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무지, 기억 상실과 무관심의 세계였다." 또한 카뮈의 조상, 척박한 땅을 개척해야 했던 알제리의 프랑스인들 역시 새로운 세계를 만든 '최초의 인간들'이라는 것이죠.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계의 '최초의 인간'인 셈이다.
개인적으로 책 내용보다는 군데군데 수정을 위해 표시해 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까뮈의 그 난해함은 고치고 고치고 고치고의 산물이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까뮈, 신선한 매력이 있는 그의 미완성 유고집은 정말 미완성이 얼마나 매력있고 강한 이미지를 그대로 주는지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특히 이 <최초의 인간>을 통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