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누구니 - 젓가락의 문화유전자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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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억나는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다. 바로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이다. 2005년 늦가을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했다고 들떠 있던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진실의 문이 열렸다. 이전에 언론들은 앞을 다퉈 한국인의 젓가락질 기술이 정밀한 세포 분리와 배양의 원천 기술이라고 한껏 치켜 세웠다. 기대가 컸던 만큼 허탈과 실망은 대단했던 기억이 새롭다. 얼마 전 별세한 이어령 박사는 유작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제2권 젓가락의 문화유전자를 다룬 ‘너 누구니’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필력을 과시한다.

저자는 201쪽에서 한국인의 젓가락질 DNA를 과대 포장한 언론의 보도 행태를 간명하게 바로 잡아 준다. 이런 행태를 생물학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종의 우생학으로 본다. 과거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한 대독일제국의 총통 히틀러와 나치당이 저지른 전쟁 범죄를 떠올려 보면 얼마나 위험한 주장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우리 전통과 문화의 우수성을 알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 다만 지나친 국수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60년 이상 장르를 가리지 않고 방대한 저작을 남긴 이어령 박사의 이야기 보따리를 경험할 수 있는 꼬부랑 고개 넘기를 시작해 보자.

이 책의 목차는 12개의 고개와 서른 개의 꼬부랑길로 구성되어 있다. 신작로와 포장된 넓은 길에 익숙한 세대는 꼬부랑길을 걸어본 경험이 드물 터다. 어릴 적 할머니랑 걸었던 꼬부랑길은 마주 오는 지겟꾼과 교차하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밟아도 다시 일어서는 잡초가 가득한 길. 여름이면 강렬한 태양열에 달궈지는 검은 아스팔트 길과 차원이 다르다. 이어령 박사의 젓가락 강의를 한 고개씩 넘어가다 보면 유년의 기억이 떠오르는 데는 분명 경험치와 공감대가 겹치기 때문일 터다. 적어도 젓가락질에는 세대간 격차가 덜하다. 한국인의 식생활이 밥상머리 교육에서 대를 이어 전수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저자의 통찰은 단순히 식사 도구로 젓가락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 몸에서 손에 가장 많은 뼈와 관절이 위치할 만큼 손은 정밀한 조작이 가능하다. 저자는 젓가락을 손가락의 연장으로 본다. 그래서 손가락의 ‘가락’이 ‘저+가락’이 되었다. 한국 땅에 태어난 우리는 말과 함께 젓가락질을 야단 맞아 가며 배웠다. 아마도 부모와 자녀 간의 밥상 머리 교육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당연한 것처럼 여긴 젓가락에서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끄집어 내서 한 권의 책을 써낸 고 이어령 박사의 통찰에 감사한 마음이다.

*** ***
05 우리말에 연장이란 말이 있다. 참 재미있는 말이다. 연장을 다른 말로 하면 도구인데, '도구는 신체의 연장' 이다'라는 말도 있다. 연장이란 말 속에 '도구'라는 말과 신체의 연장'이라는 말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으로 미묘하고 암시적인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인간의 도구는 모두가 몸을 연장, 확장'한 것이다. 그중에 가장 먼저 쓴 도구는 신체 가운데서도 손을 연장한 것이다. 인간이 두 발로 일어서는 순간 앞의 두 발이(다리가) 손이 되고, 몸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의 손은 스스로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15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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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놓치지 마 - 꿈과 삶을 그린 우리 그림 보물 상자
이종수 지음 / 학고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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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진 개나리꽃인듯 손에 쥔 신간 표지가 단정하다. 시동이 고삐를 쥔 말을 검은 말을 탄 선비가 늘어진 버들가지를 바라보는 그림이 좌하단을 채우고 있다. 꿈과 삶을 그린 우리 그림 보물상자라는 부제를 읽지 않아도 학고재란 출판사 이름 만으로도 이 책이 무엇을 다루는지 어림짐작이 된다. 국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한 저자 이종수는 우리 그림을 읽어내는 탁월한 안목을 연마했다. 화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그 시대 배경은 무엇인지, 화풍과 계보를 찬찬히 설명해 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덕수궁 근처 미술관과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 종종 찾곤 했다. 도슨트 선생님이 설명해 주는 시간에 맞추면 그림을 보고 읽어내는 깊이가 다르다는 경험을 자주 했다. 반면 우리 조상들이 그린 그림을 읽어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예전에 읽은 고 오주석 선생의 ‘한국의 미 특강’을 읽고서 눈이 열리는 경험을 했었다. 역시 그림이든 음악이든 아는 만큼, 생각의 넓이와 깊이만큼 받아 들이고 이해할 수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길라잡이로 나선 저자 이종수의 발길과 손길을 따라 가다 보면 눈에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그림도 제법 보인다. 솔직히 처음 보는 그림이 더 많았다. 병아리를 채가는 고양이를 쫓는 남자와 아내, 어미닭의 혼비백산하는 찰나를 그려낸 ‘야묘도추’는 잘 아는 듯했으나, 저자의 설명을 곁들이다 보니 그동안 수박 겉핥기로, 주마간산하는 것처럼 대충 봤음을 고백한다. 봄나들이를 나선 병아리떼를 낚아채는 찰나의 순간을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활약한 화가 김득신은 잘 포착해 냈다. 정지된 활동사진 같다. 저자 이종수는 ‘이 순간을 놓지지 마’하고 코치를 한다. 김득신이 살던 시대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망건을 쓴 남자와 치마, 저고리를 입은 부인네. 자리를 짜던 틀과 나무로 만든 낮은 마루 등등. 한 장의 그림으로 19세기 초 조선의 어느 마을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 뿐인가? 지난 달에 수원 화성을 다녀왔는데 ‘화성행행도병풍’(212p)를 보고 나니 1795년 정조 임금의 8일간의 화성행궁 행차 장면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 당시 최첨단의 철옹성을 완공하고 그 안에 작은 행궁까지 짓고서 죽은 아버지와 늙은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또한 국왕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장엄한 행차를 기획하고 추진한 모든 과정이 병풍 안에 빼곡하게 담겨 있다. 저지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니 국왕의 행차 모습을 큰 길에 나와서 구경하는 양반들과 평민들의 모습까지 한사람 한사람 그려진 것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책에 담긴 작은 도판으로는 그림 보는 맛이 덜하다. 아무리 돋보기를 들이대도 말이다. 원본이 소장된 **미술관에 찾아갈 목표가 생겼다.

이렇듯 저자 이종수가 소개하는 26개의 보물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는-책으로 먼저 보고, 원본을 직접 찾아가 보는- 버킷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물론 일본국에 넘어간 작품들 또한 여럿 있고,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아닌 개인 소장품의 경우 대면하기 쉽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살아있는 동안 이 순간을 놓치지 않을 안목을 길러야 함은 꼭 그림 보는 눈 뿐만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지혜와 통찰을 말하는 것 아닌가 싶다.

*** ***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이 있다. 화가에게도 붓을 들어야 할 순간이 있듯이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그림이 전하는 즐거움. 계절이 주는 기쁨도 찰나처럼 스쳐 지나버릴지 모른다. 지금 내 마음 두드리는 그림 한 점 있다면 첫걸음이 되기 충분하다. 보물찾기를 시작해 보자. 이 봄 지나기 전에 길을 나서보는 거다. (10p)

그의 화면, 변해가는 시대가 엿보이기도 한다. 호취도는 보통 매 한 마리를 우뚝 세워 제왕다운 기상을 강조하곤 한다. 그런데 장승업의 그림은 두 마리 매가 세상을 나누어 가진 형국이다. 오원의 그림 속에 불어온 시대의 바람, 그는 바다 건너의 색채와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붓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화면도 시대의 경계에서 아슬아슬, 설렘으로 마음 졸이게 한다. (3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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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 작가를 따라 작품 현장을 걷다
함정임 지음 / 열림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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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이란 쉽지 않은 제목의 신간을 읽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바로 그것이다. 무진이란 지명은 가상의 공간이지만 작가 김승옥이 유년 시절을 보낸 전남 순천의 갯벌과 갈대밭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한다. 17년 전쯤 가을 순천만 갈대밭을 직접 걸여보고 나서 1964년작 ‘무진기행’을 다시 읽었다. 안개로 뒤덮인 무진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 배경이 되어 주었다. 또한 일상 탈츨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독자와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작품 속의 공간이나 작가의 숨결과 손길이 남아 있는 장소를 직접 가보는 것은 단순한 팬덤 그 이상으로 보인다. 이번에 읽은 소설가 함정임의 신간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은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끄덕이는 문호들이 활약했던 장소와 지역을 소개한다. 저자는 직접 그곳을 찾아가 현장 사진을 찍고, 작품의 주요 부분을 소개한다. 저자는 ‘작가를 따라 그곳으로 갔고, 홀린 듯 걸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한다. 미국의 소설가 헤밍웨이가 살았던 시카고의 골목과 멕시코, 쿠바 아바나의 바다를 찾아간다. 중학생 때 지루하게(!) 처음 읽은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되는 곳엔 오늘날에도 가난한 어부가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

반백이 다 되어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붕어나 잉어 정도나 낚았던 나의 낚시 경험으론 거대한 만새기(dolphinfish)와의 사투가 실감이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작가와 소설의 배경 설명을 듣고 다시 보니 이해의 폭이 다름을 느낀다. 소설가이자 여행자인 함정임의 내공을 쫓아가기는 쉽지 않다. 책에 소개된 작가와 작품 중 생소한 것이 적지 않다. 아는 작가와 작품이 나오면 반갑지만 그렇지 않은 챕터는 당혹스럽다. 억지로 읽고 사진을 보면서 앞으로 읽어내야 할 소설 버킷 리스트를 적어 본다. 내 뜻과 욕망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조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문호들의 작품 읽기를 통해서 배운다.

책 이름 처럼 저자 함정임의 발길은 지구촌 곳곳을 아우른다. 모두 4부에 걸쳐 24꼭지를 풀어낸다.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서 백야의 땅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이스탄불에서 일본의 후지산까지, 드넓은 프랑스의 들녁과 강들은 자주 보고 들어 익숙할 느낌이다. 저자의 잔잔한 설명에 마치 나른한 오후에 책을 읽으며 뜨거운 차를 마시다 깜빡 잠이 드는 듯하다. 워낙 많은 곳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보니 한 번 읽어서 소화하긴 어려웠다. 서가, 손 가까운 곳에 두고 떠나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은 생각이다.

*** ***

파리 서쪽 미라보 다리 근처에 체류한 적이 있다. 춥고, 음울한 겨울이나 라일락꽃 피어나는 초여름이나 거리마다 은방울꽃을 파는 오월이나 센강 둑을 걸으며 미라보 다리 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이 내 머릿속에 없었다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13p)

누군가 고독이 원인이 되어 소설을 쓰고, 누군가 권태가 원인이 되어 소설을 읽는다. 고독이든 권태든 하루하루 소설을 쓰고, 소설을 읽는 행위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구, 모험이다. 미지의 세계는 '기억'에, 모험은 '여행'에 관계된다. 세상 어떤 소설도 이 두 가지, 기억과 여행을 근간으로 삼지 않는 것은 없다. (85p)

기다림 속에 삶은 흘러간다. 인생도 흘러간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진다. 아무것도 없었던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 책에 수록된 글들은 작가와 작품에 새겨진 지도의 흐름을 따라간다. 태어난 곳의 침대와 방, 책상과 창, 부엌과 계단, 뜰과 오솔길, 강과 바다. 언덕과 고원, 산과 계곡, 성과 누옥, 시장과 카페, 광장과 골방, 그리고 거리, 거리들, 모두 누군가 스치듯 살다 간 곳들이다.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도 하다. (3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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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고 데이 -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서
구유니스 지음 / 비엠케이(BMK)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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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인접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어수선한 때에 읽은 담백하고 거룩한 책 한권을 소개한다. 러시아 정교회를 믿는 두 나라는 정치, 경제,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을 벌이고 있다. 군대에 아들과 남편을 보낸 여인들의 기도에 온 몸이 떨리는 듯하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으로 내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유한함을 체감할 수 밖에 없다. 포탄이 언제 어느 방향에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한계에 봉착한 인생은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이마고 데이’라는 생소한 제목을 가진 책. 그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영감 있는 기도를 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저자 구유니스의 그림 묵상집이다. 이마고 데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30여 편의 그림 안에서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성화하면 글자 그대로 거룩한 그림이다. 하여 중세 미술의 대부분은 거대한 성당 천정이나 벽면을 장식하는 대작으로 제작했다. 그 시절에는 문맹인 사람이 많아 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성화를 그렸다고 한다.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성화의 이미지는 거룩 그 자체다.

그러나 저자 구유니스가 신작 ‘이마고 데이’에서 소개하는 30여 편의 그림들은 기존의 성화에 대한 선입견을 깬다. 그림이나 음악 등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가의 의도와 그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이 좋다. 이 책에 소개된 한 작가 중 눈에 띄는 마르크 샤갈, 조르주 루오의 작품에 눈이 간다. 특히 조르주 루오의 투박한(?) 터치는 눈길 뿐만 아니라 분주한 마음의 발걸음도 멈추게 한다. 118쪽을 가득 채운 조르주 루오의 ‘피난’이란 작품은 과거가 현재이자 미래인 것을 보여 준다. 실제 전쟁을 겪고 삶의 터전을 떠나 긴박하게 피난길에 오른 사람들의 고통을 어찌 모두 체감할 수 있을까?

사순절 기간 중 마르크 샤갈의 연작 ‘성서 메시지’ 중 ‘인간의 창조’ (20p)를 보고 읽는 경험도 새롭다. 한 장의 그림에 성서의 주요 내용을 동화책 삽화처럼 담아내는 내공에 감탄을 한다. 여기에 저자의 잔잔한 설명을 곁들이면 보이지 않던 이야기가 마음 속에 들려 온다.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 조용한 시간과 장소에 앉아 그림을 보고 저자의 설명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보라. 이마고 데이. 절대자의 모습을 찾는 여정이 결코 혼자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 ***

글을 쓰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성화를 대하는 나의 첫 관점과는 다르게 글이 흘러가서 새로운 결론이 생겼고, 연관이 없는 작품들이 같은 주제로 모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들은 평소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5p)

과학에서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땅이 움직이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물질 세계의 겉보기는 거의 변함이 없었고, 해석이 불가능했던 오류와 오차들이 조정되었습니다. 승천의 묘사도 예수 그리스도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경험하는 사람들 앞에서 생명의 세계가 닫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1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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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전쟁 - 세금과 복지의 정치경제학
전주성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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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2대 대선이 끝났다. 아직 승패의 여운이 남아있는 듯하다. 여러 이슈 중에 세금과 기본소득에 대한 정책 대결에 관심이 많았다. 과세를 통한 부동산 안정을 도모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주장도 들었다. 복지 정책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기본소득 지급 방안이다. 말 그대로 현금을 나눠주겠다는 것인데 재원 마련은 어떻게 할 것인지 주장은 있는데 근거가 흐릿해 보인다. 여튼 머리가 복잡하던 차에 솔깃한 제목의 신간을 발견했다. 세금과 복지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단 ‘재정전쟁’이 그것이다.

저자 전주성은 경재학을 전공한 박사로 대학과 정부 자문 등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지난 2년 넘게 전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란 위기 가운데 정부가 새롭게 출범하는 2022년에 세금과 복지, 정부 지출 등을 둘러싼 재정 논쟁의 필요성에 대해 이 책을 통해 설명한다. 역대로 진보와 보수를 표방한 정부들은 각기 지지층의 기대에 부응(?)하는 세금과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 우리 현대사는 이런 많은 시행착오를 축적하면서 보다 나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기후변화와 재해, 심화되는 양극화, 계층과 세대, 지역 간의 갈등은 대화와 타협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 때 성장과 분배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하는 논쟁이 있었다. 저자의 답은 명료하다. 성장과 분배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장 없는 분배 없고, 적정한 수준의 보편적 복지가 없이 인구 감소 등의 위기를 막을 수 없기에 분배를 배제한 성장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급등을 막기 위해 종부세 등 보유세를 강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는 시장을 구성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라 봤다. 전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전세 제도를 운영하는 우리나라의 특성 상 아파트 등의 부동산 과세를 높일 때 세입자에게 세금을 전가하게 된다.

결국 복지를 위해서는 세금을 거둬야 하는데 법인세, 소득세, 상속세, 보유세 같은 직접세와 부가가치세 같은 간접세 모두 조세저항의 여지가 있다. 관건은 납세의 주권자인 시민들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과세를 수용하는가인데 저자는 정부의 투명성을 강조한다. 내가 낸 세금이 사회 인프라와 복지를 위해 누수(?) 없이 사용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조세와 재정 정책 등 나라 살림은 무엇보다 균형이 중요하다. 진영 논리에 치우치지 않아야 하며, 현 세대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냉철한 계획 아래 추진해야 한다. 다소 딱딱한 내용도 있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책읽기였다. 가정 경제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도 곳간 관리하기에 달려 있다.

국민연금과 군인, 공무원 연금도 극심한 고령화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분배와 복지를 줄이면 사회 안정이 흔들릴 수 있다. 쉽지 않다. 저자는 말한다. 재정 정책에 정답은 없다. 다만 사익을 버리고 최선을 위한 대책을 사회 구성원의 신뢰와 지지 아래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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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앞으로의 복지 논쟁이나 복지 경쟁의 핵심은 누가 더 많은 복지를 약속하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약속이 지속 가능한 복지의 차원에서 신뢰가 가느냐다. (60p)

결국 납세자 주권의 궁극적 표현 방식은 선거가 될 것이다. 어차피 계층이나 이념에 따라 조세에 대한 견해가 갈린다면 집합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세금을 좋아하는 유권자는 드물기 때문에 선거 때 증세 논의가 나오기는 어렵다. (124p)

미국과 영국에서 기업의 독립성과 주주의 권한이 본격적으로 강화된 것은 레이건과 대처가 집권하는 1980년대 이후의 일이다. 정치 이념의 보수화에 따른 국가 개입의 축소라는 시대 조류를 바탕으로 주주의 권익에 대한 인식이 커졌고, 이는 다양한 형태의 주주 보호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동시에 공익을 강조하는 여론 단체의 목소리 역시 커지며 환경보호나 인종, 지역 간 배분 등 사회적 성격의 규제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된 서구 국가들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답은 사전적으로 정해졌다기보다 사후적으로 조정되는 측면이 강하다. (187p)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좀 더 시급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영역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재정 규율이다. 요즘 같은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정부의 부채 비율이 빠르게 느는 것 자체를 시비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빚을 지고 난 다음도 생각해야 한다. 평소에는 재정 규율을 유지하며 여력을 비축해야 필요할 때 쓸 수 있다. 불가피하게 적자를 해야하는 경우 짧은 기간에 그치는 것이 좋다. 적자가 구조적 성격을 띠며 장기간 지속되면 경제 안정이 흔들리고, 장기 투자가 소홀해지며, 미래 세대의 세금 부담이 높아질 수 있다.(228p)

요컨대 성장과 분배의 가치를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 라인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은 오류에 가깝다. 어차피 현실 정책의 영역으로 들어서면 보수와 진보 어느 진영도 의식적으로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기 어렵고, 설사 구조적 차원의 제도 변화를 꾀하려 해도 시대 조류라는 더 큰 힘에 의해 압도당하기 쉽다. 결국 성장이건 분배건 주어진 정책 수단으로 최대한 성과를 내는 유능한 정부가 자신의 이념 성향과 무관하게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확률이 높아. (236p)

하지만 우리는 있는 제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제도의 설계가 아닌 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개혁에는 승자와 패자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아무리 합리적인 대안이라도 정치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어차피 세금과 복지의 절반은 정치다. 경제 논리와 정치 논리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대안을 만들고 이를 실천하는 정책 능력을 갖춘 세력만이 ‘재정전쟁’의 승자로 남을 것이다. (2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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