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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볼프강 카이저 지음, 이지혜 옮김 / 아모르문디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순히 비(非)자연적인 것, 형태의 왜곡이 가져오는 그로테스크라는 예술의 성격은 이제는 그 생경함이 주는 공포, 낯섬의 정도로 파악하는 의미로 그 탄생 이래 변화해 왔다. 그로테스크한 예술작품이 먼저 있었고 그 이후 변화해 온 이 용어의 변천을 듣다 보면 그 정도와 의미가 크게 변화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도 우리는 15세기에 그로테스크 예술작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그로테스크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거나 새롭게 발생하는 현대예술의 다양한 표현방식 안에서 그로테스크라는 의미의 범위는 어떻게 한정지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신화 속에서 흔히 반인 반수의 그로테스크의 전형을 보게 된다. 이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의 저자 볼프강 카이저의 표현과 역자의 번역에 의하면 ‘생경함’을 주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로테스크의 전형들은 흔히 애니메이션 속에서 동화적으로 미화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아는 배우(사람)의 모습의 변형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없으며 이는 관객에게 오히려 너무 큰 낯선 효과를 주어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너무나 진짜 같은 그림이 된 배우들의 모습 또한 뭔가 이질적인 피부의 질감 등 생경함을 일으키는 요소를 갖게 되고 이것이 트랜스포머의 옵티머스가 지지를 받고 ‘퍼시잭슨과 번개도둑’의 케이런(피어스 브로스넌 역) 의 반인반마가 코미디로 보여 그 리얼리티를 조롱받는 것의 원인을 증명한다.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적정 수준의 생경함, 혹은 완벽한 리얼리티를 구사함에서 대중의 선호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익숙한 것들의 변형과 왜곡이 주는 효과로 문학과 미술에서 그 형태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카이저가 제시하는 예시들에서 당시의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개념사적으로 그로테스크를 둘러싼 사회적 배경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 대한 해석과 연구는 독자의 몫이다.
엄연히 말하면 브레히트의 소격 기법과 다른 것으로, 미학적 측면의 새로운 표현이지만 그로테스크가 가진 저항적 가능성은 존재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브레히트의 연극이 자꾸 자신의 매체성을 드러낸다면 그로테스크 예술 또한 자연모방의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자신의 매체성을 강조하고 있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그로테스크가 아방가르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그 아방가르 형식이 여성주의 미술 등에서 큰 부분의 형식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현대 여성주의 미술에서의 화두는 남성적인 미술작업에서 벗어나 여성들만의 이미지 언어를 발전시킨 데 있다. 아방가르드한 표현방식은 관객에게 생경함을 주면서 작가와의 소통을 유발시킨다.  


우리가 흔히 보는 공포 영화 속의 캐릭터(인체의 변형이 주는 공포), 혹은 풍경(익숙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뭔가가 부재하거나 특이한 것의 존재로 변형된 공간)이 주는 익숙한 것의 낯섬이 주는 그로테스크의 일환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즉 (저자가 잘 설명하고 있듯) 고대 동굴의 벽화라는 시각적인 대상에서 시작된 그로테스크라는 어휘는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것들에게서 무언가는 부재시킬 때, 시각적인 대상의 등장이 아닌 소멸로도 발생할 수 있는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저자가 렌츠의 작품에서 말했 듯 인형극 그 자체가 그로테스크하지 않지만 인물이 마리오네트가 될 때 그로테스크가 되는 것에서 우리는 현대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가장 크게 결정짓는 것이 일단 시각적인 기괴함이라는 데 접근할 수 있다.


삶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을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성격을 생각할 때 이는 그 표현의 무한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자가 제시한 그림들처럼 사후의 세계가 그려질 가능성도 (그로테스크를 예술의 한 사조로 간주할 때) 매우 유효한 표현방식일 수 있으며 종교적인 세계와 같이 경험적 세계에서 벗어난 소재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이는 지금의 판타지 문학과 영화, 미술 등 다양한 문자매체와 미술매체에서 확인 할 수 있으며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의 왜곡과 변질을 통한 생경하거나 혹은 다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와 세계를 그려낼 예술매체로서의 가능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비자연적이고 생경한 존재와 세계가 과연 상상 속의 세계만을 그려낸 것이라기 보다는 현실의 나와, 우리와, 여기를 다르게 혹은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데 이렇게 본다면 크로테스크 예술의 풍자성이 매우 설득력 있어진다. 저자의 말대로 허상의 무엇을 그려낸 그로테스크의 세계는 그 허상이 실재일 수 있는 수용자의 태도에서 현실에 대한 자각와 거울역할을 하게 되고 허위의식의 세계 속에 진정한 실재를 그로테스크예술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로테스크와 풍자에 있어서는 저자가 예로 든 독일문학가 모르겐슈테른이 이 둘의 별개성을 강조했듯 역사 안에서 구분지어 사용하려 했지만 현대예술세계에서는 그로테스크는 풍자가 가능하고 풍자가 그로테스크 적인 미학적 면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이 둘이 같다고 말할 수는 전혀 없다. 그로테스크는 매우 주관적인 예술적 감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수용자에게는 그로테스크로 느껴질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하도 그 기준과 범위를 설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만큼 예술에서의 표현은 다양하며 그로테스크라는 개념이 창작에서부터 수용에까지 각각의 감상으로 발생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을 수용해도 그 개념은 여전히 주관적이다. 창작된 작품에서는 보편적인 그로테스크적인 미학적 측면을 전혀 느낄 수 없다 하더라도 창작과정에서의 그로테스크적인 기법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이 창작과정이 관객에게 공유되었을 때 비로소 그로테스크 예술이 된다. 이처럼 다양해진 현대예술의 창작과정과 수용과정의 그로테스크라는 의미는 모호한 채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저자가 연구해 온 것처럼 지금까지의 그로테스크 예술의 발전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다양한 예술의 표현이 발생하면서 늘 그로테스크적으로 예술계에서 읽혀졌지만 지금은 보편적인 여러 연극과 미술의 전파는 단지 표현의 차이로 인정되어 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새로운 표현의 탄생, 늘 그 지점들이 그로테스크와 예술의 개념 변화를 이끌어 온 포인트가 되었으리라 예상해볼 수 있다.
저자의 이 책은 1957년작으로 당시까지의 독일문학에서의 그로테스크가 중심이며 우리가 쉽게 그로테스크와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미술작품의 예 정도이다. 그 이후로도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늘 변화해왔으며 명확한 그로테스크의 이미지적인 요소는 저자가 제시한 몇몇의 그림들처럼 전형적인 형태의 왜곡과 비자연적인 것의 배치이다. 현대의 이미지에서 수용자는 판타지라는 장르로 비자연적인 것에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저자가 그로테스크의 가장 독특한 감상으로 말해진 ‘생경함’만의 그로테스크를 더 이상 과거와 같게 감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오히려 ‘비천함’으로 표현되는 ‘좀비’ 식의 호러 표현법 정도가 당시의 그로테스크 예술에 가까우며 왜곡이 아닌 완전히 ‘드러냄’으로 충격을 주거나 창작 기법에서 기존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하려는 벤야민 식의 ‘거리 두기’ 기법들이 현대예술의 그로테스크 성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여성미술에서는 ‘드러냄’의 표현기법들은 전혀 왜곡되지 않았는데도 숨겨진 욕망 혹은 사회적 억압 속에 가려진 몸을 드러냄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여성주의적 미술이 주도적이었는데 이는 기존의 풍자시와 연극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현실에 대한 저항적일 수 있는 그로테스크의 면모는 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로테스크는 이미지로 그 범위를 한정짓기 보다는 잠시라도 수용자로 하여금 그로테스크로 감상된 예술에 있어서 그 수용효과, 예술의 저항적 힘으로 그 성격과 개념을 정의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판타지로 말하는 과거 그로테스크의 면과 문학에서의 풍자적인 그로테스크에 대해 주로 이야기하고 있다. 말했듯 사상과 문화와 예술적 경험과 표현의 충격의 개인차에 따라 표현과 수용의 다양성이 일어나고 그로테스크의 개념은 이제 개인적인 판단이지 더 이상 시대적 해석으로 일반화, 즉 개념사적인 측면을 논하기는 어려워졌다.
저자에 의하면 과거 그로테스크는 신과 같은 경외감의 존재, 심판과 처벌의 주체인 종교적 존재들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에서 동물과 결합하거나 형태의 왜곡으로 어느 정도의 생경함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종교가 가진 공포의 힘, 공포의 정치에 가까웠으리라 생각하며 적어도 그로테스크적인 미술적 표현에 있어서는 당시 인간의 욕망을 풍자하고 종교적인 공포의 결합이 가져온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연구해온 그로테스크를 넘어서서 현재를 사는 독자인 우리는 좀 더 다양한 것에서 그로테스크를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전혀 그로테스크라고 여기지 않았던 현실세계라고 믿었던 세계가 오히려 그로테스크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하다, 기괴하다는 표현에 시각과 청각적인 표현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이제는 시각적인 것에서 뿐 아니라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감상을 시도하는 예술이나 일상에서도 그로테스크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예술적 감상은 수용자의 몫이니 보다 다양한 그로테스크에 대한 수용자의 해석들이 논의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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