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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오츠 이치'는 천재작가라는 꼬리가 붙어 다닌다. 불과 17세에 쓴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로 제6회 점프소설 대상을 수상하며 작가로 데뷔한 화려한 이력과 함께 특유의 차가운 유머 감각과 인간 내면에 내재하는 고독을 통찰하는 날카로운 시선, 근원적인 곳을 자극하는 심리적 공포가 어우러진 독특한 작품세계로 논란과 찬사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GOTH' 같은 소설은 수준작이라 생각한다.
이 작품집에는 중편이라 하기에는 다소 분량이 짧은 소설 두 편이 실려 있다. 흔히, 오츠 이치의 작품세계를 '블랙'과 '화이트'로 구분할 때, 이 작품집의 수록작은 블랙 계열로 분류할 수 있겠는데 그 강도가 센 편은 아니다.
'천제 요호'는 '야기'와 '교코'라는 두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어려서 병약했던 소년, 야기는 혼자서 영혼을 부른다는 '코쿠리 상'이라는 놀이를 하다가 '사나에'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와 통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는 사나에와 위험한 계약을 맺고야 만다. 이로 인해 야기의 평범한 일상은 파괴되고 하루하루를 어둠과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전락한다. 한편,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사는 쿨한 성격의 소녀, 교코는 방과 후 귀가길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한 남자를 발견한다. 야기라는 이름의 그 남자의 주위에는 웬지 모를 불길함이 감돌지만 교코는 그를 집으로 데려와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는 방을 내어 준다. 교코의 호의로 얻은 평화도 잠시, 야기는 큰 사건을 저지르고 자기의 운명에 대해 고백하는 긴 편지를 남기로 교코의 곁을 떠난다.
'가면 무도회'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후반에 사이코가 등장하는 약간 오싹한 장면도 있지만 '일상의 미스터리' 계열로 보아도 무방한 깔끔한 미스터리 소품이다. '우에무라'는 학교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기 위해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검도장 뒤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한다. 어느 날, '낙서하지 말라'는 말이 타일에 딱딱하게 각진 정자체로 쓰인 것을 발견한다. 다음 날, 그 말 옆에 'K.E', '2C 갈색머리', 'V3'라고 자신을 밝힌 사람들이 덧 붙인 낙서를 발견하고 자기도 'G.U'라고 칭하며 낙서를 남긴다. 이후, 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모른 채, 교내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사건과 자기의 고민 등에 대해 낙서를 통해 서로에게 털어 놓는다. 그런데, 이니셜도 없이 특유의 정자체 글씨로 자신을 표현하는 그 '정자체'가 교내에서 발생하는 '악'에 대한 경고와 함께 처단을 예고한다. 그런데, 처단의 대상 중에 우에무라도 아는 '미야시타'라는 여학생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에무라는 친구 '히가시'의 도움으로 위험한 인물 '정자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한 모험에 뛰어든다.
두 편의 이야기는 분량도 길지 않고 비교적 흡입력도 좋아 단숨에 읽힌다. 첫 번째 작품은 호러와 판타지가 뒤섞인 느낌을 주었는데, 아쉽게도 이도 저도 아닌 느낌이 들었다. 작품 수준이 떨어지는 정도는 아니지만 엄지 손가락을 세울 수 있는 수준작은 아닌 것 같다. 두 번째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착상은 참신했는데, 좀 더 다듬었으며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