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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에버트 -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로저 에버트 지음, 윤철희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4월
평점 :
이야기거리가 말라 버려 시들해지던 막판 분위기가 누군가가 꺼낸 영화 이야기로 인해 다시 불타 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들과의 술자리였다. 영화판 언저리에서 일하던 녀석이 처음 '로저 에버트'라는 모르는 인물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코올과 함께 다 날아가 버렸지만, 꼭 읽어보라고 권한 책 이름이 기억에 남았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이런 연유로 그가 쓴 '위대한 영화'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이 책은 그가 쓴 영화 리뷰 200편을 묶은 것이다)
가령,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에 대해 평하기를 "스타워즈는 어린애들 얘기처럼 멍청하고, 일요일 오후 동시상영 영화처럼 깊이가 없으며, 8월의 캔자스 벌판처럼 식상한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는 걸작이다. 내 생각에 스타워즈에 담긴 철학을 분석하느라 열중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속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포스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라고 하였다. 일반인의 눈 높이에서 쉽게 쓰여진, 하지만 영화를 보는 그의 독특한 시각과 촌철살인의 유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책이었다.
지은이는 1967년부터 '시카고 선 타임스'에서 영화 평론을 시작하였고, 1975년에는 영화 저널리즘 부문으로는 최초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 리뷰는 대중성과 예술성을 두루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그의 책 '위대한 영화'를 읽어 본 사람이라면 대개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는 읽기가 다소 버거웠다. 만만치 않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내용 자체가 영화에 맞춰진 것이 아니라 '로저 에버트'라는 비평가에게 포커싱된, 올해 일흔이 된 그의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총 55개 소제목으로 구성된 회고록은 어린 시절에 대한 상세한 묘사로부터 시작되어 부모, 가족, 친구 등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인물은 물론 '로버트 미첨', '리 마빈', '존 웨인' 등 영화를 통해 알게된 영화계 인사들도 많이 등장한다. 책의 어느 부분을 보더라도 그의 놀라운 인지력, 기억력, 묘사력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세부적인 기억의 자취들을 공감하면서 따라 가기가 벅차 끝까지 읽어 내기가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지은이의 방대한 사고의 넓이와 깊이를 내가 제대로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를 온통 차지하는 그의 얼굴이 웬지 불균형해 보인다. 그는 6년 전 갑상샘암 수술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먹지도 마시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었고 얼굴 윤곽도 일부 잃어버렸다. 자신을 대해 그는 스스로 자각하기 오래 전부터 언어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고백한다. 글을 배우자마자 책에 빠져 들었고, 글을 쓰려는 집요한 욕구뿐 아니라 출판하려는 고집스런 욕구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런 그가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직 언어는 잃어버리지 않았다. 일그러진 얼굴이지만 미소를 머금은 듯한 사진은 바로 이 점을 말해주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