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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는 미스터리, SF, 역사소설, 로맨스 소설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백 권도 넘는 작품을 발표한 대중문학의 거장이다. 그가 '리처드 스타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인간사냥'은 파커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데, 아주 오래 전 동서추리문고판으로 읽었다. 주인공 '파커'는 은행을 털거나 도둑질을 일삼는 말 그대로 악당인데 그런 그가 자신을 배반한 자들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하는 스토리를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그렸다. 대개 사립탐정이나 경찰이 주인공인 하드보일드에 악당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두 번째로 읽은 소설은 '도끼'이다. 원제인 'The Ax'는 대규모 감원을 의미하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버크'는 정리해고를 당한 평범한 중년남자이다. 실직상태에 있던 그는 자신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경쟁자들이 사라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가짜 구인광고를 내어 이 광고를 보고 이력서를 보내 온 사람들을 한 명씩 살해한다는 이야기이다. IMF 시절인 1998년에 국내에 출간되었고, 그 비슷한 즈음에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스토리 자체도 상당히 흥미로웠지만 읽은 후 진한 여운이 남았던 기억이 난다.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장편으로는 세 번째로 읽은 이 소설에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전에 읽었던 작품과는 너무도 다른 소설 속 분위기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도트문더' 패거리들 역시 범죄자들이고, 그들이 계획하고 실행하는 작업도 범죄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어둡고 음침한 구석은 전혀 없이 시종 밝고 경쾌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총과 폭력이 난무하고 심지어 폭탄까지 터뜨리지만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심각한 위해를 끼치는 장면은 없다. 범죄사건을 아주 가볍고 유쾌하게 다루는 코믹 케이퍼 소설의 수작이다.
모범적인 수형 생활로 가석방의 특전을 받아 막 감옥 문을 나온 '도트문더'에게 오랜 친구이자 전처의 사촌인 '켈프'가 마중을 와서 구미가 당기는 일거리를 제안한다. 그것은 아프리카의 신생국가인 '탈라보'의 의뢰를 받아 이웃나라 '아킨지'가 소유하고 있으나 현재 미국에서 순회 전시 중인 에머랄드를 훔쳐내는 것이다. 도트문더와 켈프와 같이 작업할 동료로 자동차 속도광 '머치', 자물쇠 전문가이자 모형 기차에 미친 '체프윅', 그리고 천하의 바람둥이 '그린우드'가 합세한다. 범죄에는 가히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도트문더가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거의 그 계획대로 진행이 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에머랄드를 가지고 있던 그린우드가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그것을 다시 찾기 위해 도트문더 패거리는 감옥으로, 경찰서로, 정신병원으로, 은행으로, 공항으로 종횡무진 대소동을 일으킨다.
이 소설은 시종 실소를 자아내는 대화와 장면들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점이 가장 볼 만한 요소이다. 이야기 초반에 도트문더와 켈프가 동료를 모으기 위해 주고 받은 대사를 보면 이 소설의 분위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바로 감이 온다. 가령 도트문더가 먼저 찍었던 자물쇠 담당을 쓸 수없는 이유가 나오는 부분을 대화는 다음과 같다.
"어쩌다 잡혀 갔다고?"
"내 탓은 아니야. 그냥 그렇게 들었어. 애들을 데리고 동물원에 갔다가 지루해서 별 생각없이 자물쇠를 가지고 장난을 쳤대. 말하자면 너나 내가 낙서하듯이 말이야. 그러다 보니 사자가 풀려 나와 있더라는 거야"
코믹한 부분이 부각되다보니 이들의 화려한 범죄행각에 비해 경찰들의 활약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경찰서를 습격하고 감옥에서도 탈옥을 감행한 일당들이 이렇게 잡히지 않고 활개치고 다닌다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없지는 않지만, 그런 저런 거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