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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백만 광년 너머에 사는 토끼
나스다 준 지음, 양윤옥 옮김 / 좋은생각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올해 첫 번째 책은 따뜻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싶었다. '나스다 준'은 소년 시절을 테마로 한 작품을 주로 쓰고 있으며,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소설은 옴니버스처럼 몇 가지 이야기가 엇갈리면서 다시 이어지며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독일 키르 지방에 전해오는 '사랑나무' 전설을 소개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발트 해에서 그리 멀지 않는 한 호수의 숲에 오래되고 거대한 떡갈나무 하나가 서 있었는데, 이 나무가 유명해진 것은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인 즉, 숲 지기의 딸이 한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는데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마음껏 연인에게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에 적어 떡갈나무의 빈 구멍에 넣어 두고 그에게 전해지길 신에게 빌었다. 한편 아가씨의 진심을 알지 못해 숲 속을 방황하던 청년은 무심코 떡갈나무의 빈 구멍을 들여다보다가 그 편지를 발견한다. 이후 떡갈나무는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우편함이 되어 주었고, 끝내 둘은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쇼타'는 중학교 3학년이다. 유서 깊은 옛 도시의 모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가마쿠라'의 상점가에서 커피가게를 경영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미술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다. 이웃집 심부름센터의 아르바이트로 혼자 사는 노인의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돕는 일을 하는데, 사랑나무 전설도 그가 일을 돕는 '아다치' 선생에게서 들었다. 아다치 선생은 대학에서 독문학을 가르치다 정년 퇴직하였는데, 실제로 그는 이 사랑나무 전설을 들은 여학생과 근처 숲 속에 있는 벗 나무를 우체통 삼아 여러 가지 고민들을 상담해 주고 있었다.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숲 속에 편지를 넣어 두기 위해 가는 길에 쇼타는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 받는 이가 '케이'임을 알게 된다.
케이는 쇼타가 일하는 심부름센터 주인의 외동딸로 그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이다. 그녀는 살짝 화장도 하고 귀도 뚫어서, 이러한 모습을 약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문제 학생'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쇼타는 자신의 개성을 잘 살리고 멋을 부릴 줄 아는 케이를 은근히 좋아한다. 그런데, 케이는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어느 날 벽장 속 오래된 물건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사잔 한 장에는 잎이 무성한 큰 나무 아래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낯 선 청년이 함께 찍혀 있다. 이 사진 외에도 몇 가지 의문들의 앞뒤를 맞춘 결과 지금의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가 아닐 지 모른다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쇼타가 다니는 학교에 교환 학생으로 유학 온 '마리'는 일본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눈부신 미모를 가졌지만, 어려서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친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일본으로 온 사연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쇼타와 케이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들 주변 인물들의 이리 저리 얽힌 사연과 세대를 초월하여 각자가 간직한 각기 다른 사랑의 인연들을 풀어 놓고 있다. 이러한 점이 이 소설을 단순히 청소년용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히려 이 소설의 저변에 강하게 흐르는 정서는 노스탤지어이다. 소설의 주요한 제재가 되기도 하는 '도리스 데이'가 부르는 'Que sera, sera' 뿐 아니라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제곡이었던 'As time goes by','Somebody loves me','Liebeslieid' 등 주옥 같은 옛 노래들도 배경으로 깔린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 쯤 이면 오래된 LP판을 뒤져 그 동안 쌓인 먼지를 털고 그윽한 아날로그 선율을 듣고픈 마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