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하드보일드의 절정

내가 죽인 소녀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탐정 '사와자키'가 등장하는 두 번째 소설이다. 사와자키의 캐릭터는 더욱 단단해 지고, 하드보일드 세계는 당대의 현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하라 료'는 이 작품으로 그 해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랭킹 1위에 올랐고, 대중소설에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나오키상'까지 거머쥐어, 단 2편의 작품으로 일본 미스터리계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라선다. 하드보일드 장르에 대한 선호도 차이에 따라 평가의 정도가 다르겠지만, 단언컨데 이 소설은 일본 추리문단이 배출한 걸작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미스터리 장르를 좋아한다면 필독 리스트에 올려 놓을 가치가 충분하다.

의뢰인의 집을 방문한 사와자키는 뜻밖의 상황을 맞는다. 한 소녀가 유괴되었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소녀의 아버지는 사와자키를 유괴범의 공범으로 여기며 그에게 몸값을 건네며 딸을 돌려 달라고 애원한다. 미리 잠복해 있던 경찰에게 체포당하고, 그는 전 동업자 '와타나베'로 인해 얽힌 경찰과의 악연 때문에 집요한 취조에 시달린다. 겨우 의심의 눈초리에서는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유괴범의 지목에 따라 몸값을 전달해야하는 역할을 떠맡게 된다. 유괴범들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사와자키를 헤매게 만들고, 그 와중에 그는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정신을 잃고, 돈 가방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일이 꼬일 대로 꼬려 버린 상황에서 사와자키는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새로운 의뢰를 받고 조사에 착수한다. 그러던 중 또 다시 범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그는 폐공장 하수구에 참혹하게 버려진 소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하드보일드 장르는 일반적으로 탐정이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하고, 어떤 상황에 직면하여 대응해 나가는 행동을 통해서 사건의 진상이 차츰 드러나는 구조이다. 세세한 추리과정 보다는 행동이 중심이 되므로 수수께끼 풀이는 하드보일드의 본령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충실히 구현한 것 외에도 소설 말미에 '꽝' 터지는 충격적인 반전을 통해 독자들이 미스터리를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다.

하라 료도 한 인터뷰에서 "나에게 있어 하드보일드는 오직 文體의 문제입니다. 챈들러나 해미트라도 잘 쓰지 못했다면 그건 하드보일드가 아닙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나친 문학적 결벽주의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이러한 면이 21년 동안 단 4편만 나온 사와자키 시리즈를 빛나게 만들었다. 이제, 남은 시리즈는 세 번째 '안녕 긴 잠이여'와 네 번째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한다'이다. 빠른 시간 내에 사와자키 탐정을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