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가상의 공간 '빈스토크'를 무대로 한 여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빈스토크라는 가상의 세계를 솜씨 좋게 펼쳐 보이는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이다. 빈스토크(Beanstalk)는 동화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하늘까지 치 솟아 올라간 콩의 줄기에서 따온 말이다. 구름을 뚫고 올라간 콩 줄기처럼 빈스토크도 지상에서 보면 까마득한 높이인 2,480미터까지 쌓아 올린 거대한 빌딩이다. 무려 674층에 이르고 50만명이 살아가는 이 거대한 빌딩은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되어 독자적인 정부와 군대 그리고 통화를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인공위성 사업을 중심으로 우주 관련 첨단 산업의 메카로 군림하며 부동산 가격과 물가가 세계 최고 수준인 부유한 이 나라는 언어와 민족구성이 완전히 동일한 주변국 사람들에게 비자 면제 혜택조차 주지 않는 비정한 나라이다. 그래서, 주변국의 젊은이는 빈스토크를 움직이는 '외주 용역업체'의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면서 빈스토크의 시민이 되기를 열망한다.

작가의 발칙한 상상력과 함께 주목할 만한 것은 비범한 풍자이다. 비현실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권력관계, 부정부패, 표현의 자유, 이념논쟁, 미사일 위기, 부동산 문제 등 현재 한국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차마 웃을 수 없고, 웃기지도 않는 사건들에 대해 웃음이라는 메스로 예리하게 해부하고 있다.

수록 작품들은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빈스토크라는 세계를 처음 열어 준 첫 번째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흔히 사용하는 '조그만 정성'이라는 표현은 빈스토크의 개념어 사전에는 '대가성 혐의를 희석시키기 위해 주로 사적인 대인관계망을 따라 전달되는 재화나 용역을 가리키는 말'로 풀이되어 있다. 빈스토크 '미세권력연구소'는 현실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컨설팅 서비스의 일환으로 35년산 고급술병에 전자 태그를 부착하여 은밀히 상류사회에 유통시킨다. 이 술병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자연스럽게 이 나라의 권력 분포 지도가 그려진다는 것이다. 차기 선거를 앞두고 현 시장의 약점을 캐내려는 야당의 의뢰를 받은 연구소장은 갓 유학을 마친 젊은 박사 세 사람을 계약직으로 영입한다. 소장 부인이 늦둥이를 출산한 크리스마스 이브 늦게까지 분석 작업에 매진하던 세 박사는 뜻밖의 진실을 밝혀 내고 연구소가 있는 27층에서부터 병원이 있는 647층까지 머나먼 모험을 떠난다.

여섯 편의 단편 외 외전격으로 4편의 짧은 글 4편을 부록으로 실었는데, 이 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내면을 아는 배우 P와의 미친 인터뷰'를 읽다가 한참을 실없이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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