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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충
슈카와 미나토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일본어 사전 '충' 항목에는 '인간의 몸 속에서 다양한 생각이나 감정을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일본인들은 사람의 몸 속에 아홉 가지의 벌레가 살고 있어, 이 놈들이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어떤 감정이나 의식까지 건드린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본인 자신이 아니라 그 벌레 탓으로 돌리는 관용구가 많다. 예를 들면 '뭔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든다'는 '벌레가 알려 주다'로 '짜증이나 경기를 일으키다'는 '벌레가 깨어난다'로 표현하는 식이다. 요컨데, 사람의 내부에 있는 또 다른 실체가 그를 조종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일곱 편의 단편은 제각각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 다른 사건들이지만 어느 편이든 이야기가 클라이막스에 다다르면 등장 인물들은 목덜미에서든, 몸 속 어디에서든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낀다. 이러한 장면은 여태껏 이끌어 오던 이야기를 뒤 엎는 '반전'과 함께 등장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도 작중 인물들처럼 벌레가 꿈틀거리는 스믈스믈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작가가 창조한 '수은충'이라는 가상의 벌레는 인간의 마음 속에 침투하여 있다가, 마음이 악의로 가득 차게 된 어느 순간, 마침내 영혼에 무수히 많은 구멍을 뚫어 버린다. 작가는 수은충이라는 벌레를 주요 모티브로 삼아 살인, 자살, 불륜, 집단 괴롭힘 등 인간의 영혼을 갉아 먹는 사건에 얽힌 이야기 일곱 편을 담고 있다.
'슈카와 미나토'는 '새빨간 사랑'에서 처음 만났지만 첫 느낌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사랑'을 테마로 삼았으나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다소 '쎈' 이야기들이 약간은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으로 읽은 '도시전설 세피아'는 고즈넉한 도시의 그늘을 배경으로 '미스터리 호러'라는 장르적 특성을 잘 살린 개성있는 작품들이 실려 있어 좋았고, 마지막으로 읽은 '꽃밥'은 '노스탤직 호러'에 능하다는 그의 장기가 가장 잘 드러난 수작이었다.
이번에 읽은 '수은충'도 작가가 이미 전작에서 보여 준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겨울이 배경인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유독 인간 내면에 근원적으로 자리하는 것 같은 외로움, 쓸쓸함, 고독과 같은 감정이 씁쓸한 여운으로 남는다. 그의 소설은 눈에 쏙쏙 잘 들어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는 그의 구성력과 묘사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느끼는 '슈키와 미나토'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는 작가인 듯하다. 공교롭게도 국내에 소개된 4편의 작품은 모두 인간 영혼의 어두운 심연을 건드리는 미스터리 호러풍의 단편집인 점이 이런 인상을 심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소개된 그의 소설과는 다른 경향의 작품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