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반 다인'은 일찌기 이런 말을 남겼다. "한 작가에게 여섯 편 이상의 미스터리 소설을 구상할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나에게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무한하게 추리소설을 쓸 능력이 있다고 해도 여섯 권으로 끝낼 것이다" 하지만, 그도 결국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하고 열두 편의 장편을 남겼다.
'하라 료'야 말로 반 다인의 금언에 가장 가까운 미스터리 작가이다. 그는 1988년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 난다'를 발표한 이후 19년 동안 장편소설 네 편과 '천사들의 탐정'이라는 단편집 한 편만을 발표하였다. 전업작가로는 보기 드문 과작(寡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장편소설은 모두 중년의 사립탐정 '사와자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하드 보일드(Hard Boiled) 스타일의 미스터리이다. 하드 보일드 미스터리는 그 기법상 불필요한 수식은 일체 배제하고 퍼즐 풀기 보다는 행동에 중점을 두어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린다. 이러한 스타일 상의 특성으로 하드 보일드는 몇 가지 대표적인 상징적 이미지가 있다. 타협을 거부하고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 들이는 선이 굵은 탐정의 존재, 비정한 도시 뒷골목의 우수(憂愁)와 상류계급의 권태(倦怠)의 대비, 메마르고 냉담한 문체,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니컬한 시각 등이 그것이다. 하드 보일드 미스터리를 읽다 보면 웬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곤 하는데, 아마도 하드 보일드 쟝르가 지극히 미국적인 토양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 졸업후 재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하라 료'는 서른 무렵부터 미스터리에 깊이 빠져 들게 되는데,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시리즈에 깊이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가 데뷰로는 다소 늦은 나이인 마흔 셋에 챈들러에 바치는 헌사와도 같은 이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았다.
동업자가 경찰과 야쿠자를 동시에 골탕을 먹인 사건을 일으키고는 사라진 후, 홀로 탐정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와자키'에게 의문의 남자가 찾아와서는 처음 들어보는 '사에키'라는 남자의 행방을 묻고는 20만엔이 든 봉투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곧 이어, 재벌가 '사라시나' 가문의 고문 변호사라는 사람이 역시 사에키의 행방을 묻고는 그에게 '사라시나' 저택을 방문할 것을 요청한다. 사에키는 사라시나 재벌의 전 회장 '사라시나 슈조'의 사위로 부인과 이혼을 앞두고 돌연 실종된 상태에 있었다. 사와자키는 사에키의 부인인 '나오코'의 의뢰를 받아 그의 행방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실종은 당시 정계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도쿄 도지사 저격사건과 관련이 있는 정황이 속속 드러난다.
소설의 구성에서 챈들러의 여러 작품에서 차용한 듯한 부분이 눈에 보인다. 작가가 존경하는 거장에게 바치는 오마쥬일 수도 있지만, 설령 오마쥬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을 챈들러의 아류작 내지는 모방작으로 폄하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말로'시리즈가 아무리 걸작의 반열에 든다고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독자들에게는 과거의 인물인 '말로' 보다는 동시대를 호흡하는 '사와자키'에게 더 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은 현대의 도쿄를 배경으로 정통 하드 보일드 스타일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 외에도 미스터리의 구조가 단단하고 흡입력이 강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이 작품을 1988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랭킹에 2위로 올려 놓은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레이먼드 첸들러는 어느 영화 제작자에게 쓴 편지에서 "필립 말로 시리즈는 정직한 한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 고귀하게 살아가려는 분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분투에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말로'의 후계자 '사와자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시리즈의 후속 작품의 출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