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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망했다 - 우리 시대 고승 18인의 출가기
유응오 엮음 / 샘터사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한암 큰 스님이 남기신 구도기의 제목이 "一生敗闕" 이라는데
사전적 의미로"이번 생은 크게 망쳤다"는 뜻이라고 한다.
저자 거리의 이름 없는 중생의 한탄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의 이 말씀이 겸양의 표현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凡夫의 눈으로는 엄청난 경지에 도달한 듯 보이나,
깨달음의 길이 너무나도 아득함을 한탄하는 수행자의 회한인지
선사들의 禪 언어는 범부에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준다.
불교에 소양이 있는 필자에 의해 열여덟 스님들의 출가기로 엮어진 이 책은
한편 한편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좋은 글이다.
단명 한다는 점괘 때문에 불가에 귀의한 만봉 스님
생노병사 四苦에 생사해탈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머리를 깍은 지종 스님
道를 구하기 위해 출가한 성수 스님
전쟁의 참상을 겪고 번뇌에 몸부림 치다 부처님께 귀의한 월서 스님
철학적 문제로 고민하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친 현해 스님
어느 한 분 할 것 없이 스님들이 풀어 놓은
"부처님과의 인연"과 "속세의 사연" 그리고 "수행의 일화들"은
마치 가뭄 끝 단비를 맞아
말라 가던 뿌리가 수분을 빨아들이듯
눈으로 가슴으로 머리로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
가령
"손에 붓을 쥔 뒤로, 나는 오직 꽃과 불보살님 밖에 모르고 살았다.
1년 열두 달 꽃만 그렸기 때문에 마음은 매양 봄날이었고,
사시사철 불보살님들만 그리워했기 때문에 늘 화엄 세계였다."
"태어나지 말라, 그 죽음이 괴로우니. 죽지 말라, 그 태어남이 괴로우니"
"내 道가 道가 아니면 효봉의 道를 내 놓으시오.
천하만물은 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無非道가 아닙니까?"
이렇게 쉽게 마음에 와 닿으면서도, 곱씹어 지는 문장이 많고
한 분의 이야기가 길지 않아 지루하지도 않으면서 어려운 내용도 거의 없다.
복잡한 세파와 인생사 번뇌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집으로 돌아온 날이면
잠 자기 전에 한 편씩 읽으면 좋을 듯하다.
아마 꿈 속에서 고즈넉한 산사의 공기를 호흡하고
정적의 소리가 들려올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