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사회경제사상
마르틴 헹엘 지음, 이영욱 옮김 / 감은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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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이 책을 소개하려는가? (목적)

헹엘은 친숙한 학자다. 그는 기독교/유대교와 관련된 제2성전기 연구와 헬레니즘 연구에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의 책들 중, “유대교와 헬레니즘”, “신구약 중간사”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이는 그의 관심 분야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 준다.


 그의 여러 책들 중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현대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사회경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관점으로 사회경제를 바라보아야 할까?” 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해하는 이 질문에 대해서 헹엘은 답을 찾아보려고 시도하기에 우리에게 의미있는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 저자의 관점이 기존의 방법이나 이론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가?

 헹엘이 완벽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다시피 이 책을 쓸 때는 앞으로 이와 관련된 주제가 계속 연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언급하기 쉽지 않았던 사회, 경제의 문제를 헹엘에 의해 서론적 연구가 나오게 된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신약성서, 초대 교부들)에 등장하는 “재산”에 관련한 내용들을 다루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3. 내용 정리

 헹엘은 구약성서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초기 기독교에 집중되어 있다. 시대를 따라 그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구약성서에서는 적법한 재산 소유가 가능했지만(예, 십계명), 재산에 대한 권리는 약자를 돌보는 의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희년 제도를 통해 빚과 노예의 해방과 땅의 재분배라는 사상이 녹아 있었다. 구약성서의 세상에서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산의 오용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인간이 부를 탐하고 매이며, 부정한 방법으로 증식하고, 권력의 도구로 오용하는 모든 곳에서 재물은 숭배를 받는다고 경고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울서신에는 가난과 부, 재산과 무소유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당시 공동체의 빈부의 격차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유지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예수의 메시지처럼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서 재산을 가져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상실된 것 같아 보였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 개인의 소유는 공동체의 뜻과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사회적 격차는 사라지고, 가난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주후 40년 이후에, 체계적인 경제 생산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은 금전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이면에는 경건한 자들을 위한 명예로운 호칭임과 동시에 실제로 빈곤함을 겪고 있던 현실이 있었다.


고대 교부들도 사유재산은 인간 불화의 근원이라고 정의했고, 당시 사람들은 기술에 억압되지 않고, 사유재산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의 시대(거의 원시 시대에 가까운)를 소망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생각이 아니었고, 고대에 널리퍼져있던 신화적 역사에 대한 사유였다.


분명한 것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는 일에 대한 권리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4세기 기독교인들은 교회 공동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빈곤함에도 관심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자선을 행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 상승하는 시기가 이 때였다. 어느 종교 공동체나 그 외 모임에서도 이렇게 행하는 곳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부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공존할 수 있는가였다. 그래서 헹엘은 소유를 포기하는 급진적 입장, 자족에 대한 철학적-금욕주의적 모티브, 효과적인 균등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모두 정리해 준다. 세 입장을 정리한 후, 효과적인 균등을 제시하면서도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묵시적 세계관이나 엄격한 금욕주의적 이상이 아니라, 로고스를 통해 인도될 수 있으며 궁핍한 이웃에게 몫을 충분하게 나누어주는 이성적이고도 규율적인 절제를 강조했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는 사유 재산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는 엄격한 금욕주의와 공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헹엘은 오늘날과 초기 기독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10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제안은 재산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 인간을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공적인 통체력으로 권력의 오용을 막아야하고, 의무적으로 이웃들의 안녕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결단코 재산 모으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4. 평가

헹엘의 입장은 “낭비와 가난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소비를 거부하고 사치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유명한 구호였던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본질로 돌아가자”가 중요하지만, 그 때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체성의 재점검이다. 헹엘은 서론에서 ‘시대 정신(Zeitgeist)’을 선도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작업을 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근원을 바로 알 때에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확신에 찬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기독교인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서 혼동되는 부분이 있을 때, 우리는 정체성을 다시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바로 알 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좋은 점검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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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그리스도인의 공동읽기 - 예수 시대 기독교 전승은 어떻게 형성되고 보존되었는가
브라이언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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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박사 논문을 기반으로하였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예상하는 학위 논문의 순서가 그대로 녹아있다. 저자의 주요 주제인 ‘공동 읽기(Communal Reading)’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 단어와 저자의 의도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1장에서 저자는 먼저 기독교 전승을 통제해 왔던 ‘공동 읽기’에 대한 연구에 그동안 어떤 한계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연구사를 정리한다. 특별히 그는 ‘공동 읽기’에 관심이 있었던 학자들도 깊은 연구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언급한다. 연구사가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의 한계를 명확히 볼 수 있고, 저자의 주장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저자가 밝히고 싶어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던 공동 읽기의 사건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공동(Communal)’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사회적 측면이 부각되고, 둘 이상의 참여가 있던 사건임을 정의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동 읽기가 일어난 시점을 기원후 1세기로 주장하고 싶어하는 저자는 1세기 공동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밝히기 위해 초창기 기독교 전승을 통제한 것을 고찰하는데 필요한 변수만을 제시할 것이고, 그 외에는 자신의 연구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2장에서는 저자의 연구 대상의 시기와 장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3장에서는 공동 읽기의 확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경제와 정치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기원후 1세기의 지중해 경제는 대부분 번영하였고, 안정된 상태였다고 본다. 이런 상황은 공동 읽기가 널리 퍼졌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설명한다. 물론, 경제적 번영과 안정이 직접 요인이 아니라, 뒷받침했을 정도였을 것이라고 정리한다. 이와 더불어 정치적 안정 또한 공동 읽기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Q1. 이 부분부터 많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공동 읽기의 퍼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경제와 정치의 상황에 대한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었는가? 그리고 기원후 1세기에 정치, 경제가 정말 안정되었을까? 특별히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에 적용할 만한 것이었을까? 당시 이들의 역사에는 계속되는 반란과 탄압 등이 이어지는 상황이지 않았나?



 4장에서는 사회적 배경을 제시한다. 당시 엘리트 계층은 읽거나, 받아쓰거나 두 개를 다 할 수 있는 노예를 고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당시 공동 읽기의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다양하였고, 빈번하였다고 본다. 저자는 실내와 실외에서 일어났던 당시 공동 읽기 사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을 증거로 제시한다. 


Q2. 당시 그들은 무엇을 읽었을까? 


Q3. 공동 읽기를 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당시에 넘쳐났기 때문에 다양한 곳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가? 


Q4. 그 양이 여러 사람이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나? 


Q5. 엘리트가 고용한 노예들은 대부분 문맹이 아니었나? 일정 교육을 받은 노예들이었나? 


Q6. 공동 읽기 자료는 회람용이었나? 복사본이 여러 개 있었나? 


Q7. 저자는 청중이 낭독자의 실수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예를 제시하는데, 그들이 읽었던 자료들은 권위있는 하나의 자료였는가?


5장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일어난 공동 읽기의 사건의 증거가 신약성서외 어디에서 밝힐 수 있는지를 조사한다. 1세기 그리스-로마의 저자들 20여명과 그들의 작품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을 제시한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양은 실로 방대하다. 이후, 유대 자료(마카베오 4서, 필론, 위필론, 요세푸스, 에스라4서)를 소개한다. 이 작업들을 통해 저자는 공동 읽기의 수요는 능력이 다양한 수준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여러 개의 통제의 수단(목격자, 검토, 폐기, 게시, 비교, 저자 확인 등)이 있었고, 공동 읽기에 대한 인상과 반응이 존재했고, 당시에는 글쓰기에 대한 억압도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Q8. 나름의 통제가 있기는 했으나, 저자들 각각에 따라 분류가 되다보니 공통적인 통제의 수단은 없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 통제의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6장은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 나타난 공동 읽기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거의 모든 신약성서를 다룬다. 거의 130여 페이지에 가까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핵심은 하나다. 기원후 1세기의 공동 읽기는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논의하고자 했던 핵심에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Q9.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다수였다는 언급(216)은 앞선 설명과 상반되지 않는가?


Q10. 두루마리가 아닌 기억으로의 연설이 이어지거나, 메모로 된 형태의 글을 읽었다면 어떻게 통제를 하였을까?


Q11. 공동 읽기의 ‘질 통제(quality control)’은 텍스트 내용에 대한 정확도의 통제인가? 해석에 관한 통제인가(참조. 270)?


Q12. 신약성서의 공동 읽기는 그야 말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기 보다 특정 장소(예, 회당), 인물, 계층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263페이지의 언급처럼 텍스트 접근이 가능한 사람이 소수였다면, 그리스-로마 시대에 여러 계층에 의해서 공동 읽기가 이루어졌다는 앞선 언급과 조금 달라보인다.


정리하면, 많은 추천사에서 반복된 것처럼 저자는 상당한 분량의 1차 문헌을 근거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하여금 놀라게 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본문뿐만 아니라, 부록을 통해 ‘공동 읽기’ 사건이 있었던 추가 증거들을 제시해 준 것은 정말 대단한 연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아니면 독자인 나의 생각에 궁금증이 많아져서 그런지 각 챕터를 읽을 때마다 여러 궁금증이 생겨난 상태로 다음 챕터를 맞이한다. 다음 부분을 읽으며 어느 정도 해소되는 부분도 있지만, 더 많은 궁금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초반부터 저자가 밝히고자했던 “공동 읽기의 사건은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에 대한 연구는 분명히 밝혀진 것 같다. 그 외에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추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을 내비칠 수 있기 때문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공동 읽기’라는 특별한 주제를 연구하면서 교과서로 삼을 만한 책이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 또 다른 몇 가지 궁금증


1. 64페이지에서는 아래 갈릴리로, 69페이지에서는 하부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이유가 무엇일까? 같은 단어인 Lower를 사용한 것 같은데 말이다.


2.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공동 읽기’ 보다는 ‘공동 읽힘’ 이나 ‘공동 듣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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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신학의 탐구 -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앤드류 린지 지음, 장윤재 옮김 / 대장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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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주변인들에게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인 ‘맙소사, 그것들은 단지 동물일 뿐이야!”는 그가 동물 신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몇 가지 대답을 한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동물권을 옹호하는 ‘이성적’ 논거는 매우 튼튼하나, 왜 동물에 가하는 고통에 대해서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둘째는 기독교는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기반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노예, 여성 등에 관해서도). 이것은 현대까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잘못 해석한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셋째는 지극히 저자 개인적인 고민으로서, 지구 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며, 동물은 어떻게 대우받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1장에서 저자는 종교와 동물보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물보호자들을 종교의 지지가 필요하고, 종교는 동물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보면 대부분 종교인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가 훨씬 강하게 들린다.


 그러나 2장에서는 동물에 대한 신학을 다루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감정적인 문제로 여기고 등한시해왔지만, 생각보다 이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물 문제는 윤리적, 신학적, 영적 도전들이 있음을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윤리적 문제는 동물들의 착취를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모든 내용에서 동물에게 연민과 친절을 보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은 있다. 신학적 도전들에서는 ‘신정론’에 관하여 획일적을 피조물의 한 종인 ‘인간’에게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현 신학을 비판한다.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계시겠는가?” 이것이 저자의 질문이다.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영적 도전들에서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다스린다’는 지배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힘과 지배에 대해 성경은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가지신 예수는 섬기는 분으로 오셨다. 인간이 힘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3장에서는 동물권에 대한 오해와 동물권에 대한 개념의 발전등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동물권-신학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4장에서는 생태신학과 동물신학의 차이를 설명한다. 저자는 그 차이에 대한 기준들을 몇 가지 제시한다. 죽임에 대한 윤리, 고통의 문제, 동물의 경영, 생태신학은 자연속에 자연스럽게? 있는 ‘포식 체계’를 창조주가 만든것이라고 본다. 생태신학은 자연 전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 생각속에서 은연 중에 야생 동물을 살상하며,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 동물신학은 지금의 자연은 타락했고, 각각의 피조물은 지각있는 존재들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동물신학이 자연 전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물에게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5장은 구약, 신약, 조직신학의 분야의 교수들이 동물신학에 대해서 비평한 논쟁에 대해서 저자가 대답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도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했던 내용들이 등장한다. 피조물에 대해서 가진 인식을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보면 동물에게도 모든 피조물들이 존중속에 있어야 한다는 ‘신적 권리(theos-rights)’가 있다는 동물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저자 주장의 핵심이다. 


6장에서는 외경에서 예수와 동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을 선별하여 기독교인들이 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문서들에는 동물들에 대한 예수의 모습은 지극히 윤리적이며, 동물들과 공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8장은 초기 중국 기독교에 퍼져있었던 동물에 대한 관심과 채식주의를 다룬다. 저자의 생각에 초기 중국 기독교인들은 동물보호를 위한 윤리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본다. 


 9장은 과연 동물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한가를 논한다. 이곳에서 그는 동물들을 위한 장례식을 진행했고, 그와 관련된 책을 쓰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을 언급한다. 또한 책이 출판된 후에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놀랄만한 ‘동물의 구원’을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구원이란, 동물들이 살면서 겪었던 불평등과 고통을 보상받는 차원의 구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10장에서는 교회는 동물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제안한다. 첫째는 성서 안에서 모든 동물 친화적인 요소들을 끌어내는 ‘동물성서’다. 둘째는 동물이라는 대의에 목소리를 내는 ‘동물신학’이다. 셋째는 동물을 보살피고, 동물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동물목회’다. 마지막 넷째는 동물들의 생명을 경축하고, 인생의 반려자가 된 것에 감사하며, 그들의 고통이 경감되기를 기도하고,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배 즉, ‘동물 의례’다.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질문들이 생각난다.


Q1. 2장에서 저자는 동물권이 성서에서 간단히 도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물보호에 대한 신학적 가치를 정립해 갈 때, 충돌될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6장에서도 동일한 언급이 있다. 기독교 사상이 동물에 대해 무관심 하거나 적대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서들도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충돌이 생기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생략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Q2. 율법에 나와 있는 음식에 관한 법을 저자는 인간 중심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까? 만약 창세기의 논지에 따라 ‘채식주의’가 중요하다면 율법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Q3. 저자는 애완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들의 행동은 창조주의 섭리에 맞는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인간을 위해 애완동물이 이용되고 있다고 평가할까? 


Q4. 예수께서 생선을 드시지 않았을까? 세례 요한도 메뚜기를 먹지 않았는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저자는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의 말을 빌려 개혁 운동의 세 단계(조롱하기, 토론하기, 받아들이기) 중에 동물 보호 운동이 토론하기의 단계에 와 있음을 좋은 징조로 여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당연히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과 샬롬에는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동물신학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물론 애완동물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진행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목회자로서 고민한적이 정말 많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토론을 통해 나은 방향이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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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비평의 도전과 복음주의의 응답
크리스토퍼 M. 헤이스.크리스토퍼 B. 안스베리 지음, 성기문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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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벌써 흥미를 자극한다. 역사비평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주의를 어떻게 규정할까에 대해서 궁금할 것 같다. 각 챕터에서 할 이야기가 많아 3부에 걸쳐서 리뷰를 해볼 예정이다.

본서에서 말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정의는 Cambridge Companion to Evangelical Theology에서 라슨(Timothy Larsen)이 제시한 개념을 따를 것이라고 밝힌다(44-5페이지 참조). 1장에서는 성서 비평을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을 잘 정리했고, 이 책의 입장을 말해준다. 일단 본서에서 정의하는 복음주의는 성서무오설을 따르지 않고, 역사비평을 활용한다. 그렇다고 성서무오설을 아예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2장(창세기) 요약

 2장에서는 오랜 시간 다양한 학문에서 접근했던 창세기 2-3장을 다룬다. 첫 부분은 아주 간략히창세기의 형성사를 요약해 준다. 그 후, 아담과 에덴 동산의 역사성을 부정해 온 현대 신학자들에게는 기독교 교리중 하나인 ‘원죄’의 교리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신화와 역사라는 두 주제는 결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으며 고대 근동의 상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본서는 제시한다. 또한 구약성서의 아담의 타락을 구약성서 이후 시대에 미친 원죄 교리의 영향을 정리한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아담의 타락이 원죄로써 후손들에게 죄와 죄책을 전가한다는 교리보다는 후손들이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같은 개념으로 바울도 이해했다고 본서는 보고 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영향이 세상에 온 것은 맞겠지만, 아담과 같이 인간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로마서 5장을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면 아담의 역사성이 부인되어도, 본서의 해석을 따른 원죄는 무너지지 않는다. 반대로 아담의 역사성을 부인하면, 그로부터 원죄와 원죄책이 생겨났다고 하는 주장은 무너지게 된다. 사실 바울에게는 ‘원죄’의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서의 주장이다. 이 책에서는 아담으로부터 말미암은 원죄, 원죄책이 아니어도 원죄의 교리는 무너지지 않으며, 인간의 내면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정’에 관한 접근은 다른 방법으로 열려 있다는 것으로 정리한다.

2장에 대한 생각


1. 이 부분에서 유대교 문헌과 쿰란 문헌 그리고 신약성서뿐만 아니라, 랍비 문헌까지 거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악한 성향’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을 해주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2. 창세기 3장과 원죄 교리를 수용사로 연구한 분도 있다. 나보다 앞서 같은 지도 교수님 아래에서 수용사를 사용하여 박사 학위 논문을 썼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분이다. 그분의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창세기 3장의 초기 수용사 연구: 주전 3세기부터 주후 5세기까지의 문헌을 중심으로’ 다. 이 글을 본다면 2장의 내용을 조금 더 풍성하게 정리해 볼 수 있다.


3장(출애굽기) 요약

3장은 출애굽의 역사성에 대해서 사실과 허구의 대립에 있는 최대주의와 최소주의 역사가들의 생각을 비교한다. 특히 이들의 생각은 고고학과 관련이 있다. 최대주의는 고고학과 출애굽의 조화를 꾀하하여 출애굽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최소주의는 고고학이 출애굽의 사건들에 의심을 제기한다. 최대주의의 입장에서 제시한 다양한 역사적 증거들은 성서 내러티브와 부조화가 일어난다. 그럼에도 출애굽이 역사성이 분명한 사건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는 않는다. 호프마이어를 중심으로 그들은 출애굽의 역사성이 가능하지 않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역사성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와 반대로 최소주의자들은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신적 개입을 통한 자신들의 정체성 강화에 목적이 있기 때문에 허구적이며, 편향성을 띨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들은 출애굽을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본다. 이에 대해 안스베리(C. B. Ansberry)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성서의 역사기술 방법은 과거의 내러티브로 역사를 전달하는데, 그 과정에서 특정 사건들은 취합되고,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면서 해석되고, 사건들에 의미가 부여된다. 이 과정에 참여한 어떤 저자나 해석자도 포괄적인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스베리는 그런 의미에서 출애굽은 역사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작업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어떻게 기억하고 재진술하는지를 살펴보는 ‘문화적 기억’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출애굽 사건은 신학적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미래적 소망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고 저자는 강력히 주장한다.


3장에 대한 생각

1. 저자가 표현한 문장 중에 “출애굽 이야기는 각 세대가 자신들의 고유한 상황에 맞추어 적용할 수 있는 역사와 기억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속적 개입을 보여주는 전형적 표현인 출애굽 사건이 예언서에서는 임박한 미래의 구원을 계시하기 위해 기억되고, 재구성되고, 재진술된다”라는 표현은 가다머의 ‘지평의 융합’을 생각나게 한다.

2. 2-3장을 읽으면 역사비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왜 ‘실제적 역사’에 관련된 부분만을 언급하고 있나 궁금증을 가질 수도 있다. 역사비평은 문학적 자료층을 구분하고 구전 단계와 문학 양식, 삶의 자리 등만을 작업한 것이 아니라, 종교, 역사, 문화, 사회 배경에도 관심이 많았다. 성서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나름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역사비평 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본서는 그 부분에 중점을 두고 2-3장을 서술했다고 생각한다.


4장 요약

원신명기의 기원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간단하게 정리해 준다. 그리고 가장 설득력있게 알려졌는 두 시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한 시기는 요시아 시대이고, 또 다른 시기는 포로 시대 또는 포로 이후 시대다. 저자는 원신명기의 연대와 기원와 관현 역사비평의 관찰은 정경 형태의 신명기 형성사에 대한 학문적 판단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언급한 후, 신명기 형성사에 관한 기본적 윤곽들을 제공한다. 역사비평에서 가지고 있는 신명기의 접근 방법에 대해 복음주의의 입장에서 취해야 할 자세를 주장하는 저자의 설명에서는 저자-권위가 중심 내용이다.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권위에 더해 저자는 텍스트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전통에 대한 권위적 주장의 대변자라는 것이다. 저자의 문제가 흔들린다고 해서 텍스트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이제 대해서는 6장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역사비평이 가지고 있는 연구에 대해서 비판적 자세도 있지만, 아울러 역사비평에서 했던 신명기 역사서에 대한 연구는 신명기-신명기 역사서를 상호 보완하려는 정경적 해석의 노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장점에 대해서도 논한다. 저자의 중요한 관점은 “신명기 모세 전승의 산문 연설들이 후속 세대들에게 권위적 전승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지속적으로 개정된 결과로 여기는 것”(156)인 것 같다. 그래서 저자는 신명기를 정적인 책이 아니라, 나름 수용사를 지닌 역동적 문서로 설명했던거 같다(150). 


4장에 대한 생각

1. 저자는 이 부분에서 피쉬베인(M. Fishbane)이 언급했던 개념중에 하나인 ‘유전(traditum)’과 ‘전승(traditio)’를 언급한다. 이 두 개의 단어 번역을 번역자도 고민했을 것 같다. 나도 논문을 쓰며 피쉬베인의 언급을 작게나마 했었는데, 그 때 두 개의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전승물(traditum)’과 ‘전승 과정(traditio)’로 했었다. 아마 이 단어에 대한 이해가 덧붙여 진다면 이 챕터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전체적인 책의 느낌이 그렇지만, 특별히 4장을 읽으면서 역사비평을 대하고 혼란에 빠져 있는 독자들을 위해 혼란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가장 좋은 해결책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5장 요약

5장을 시작하며 첫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예언의 진정성’이다. 예언자들의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이 문제 대해 하나님의 지유와 인간의 책임성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언의 목적, 언어, 기능을 재검토하여 해결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복음주의 학자들에게 외면을 받아온 ‘사후 예언(vaticinium ex eventu)’을 언급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을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소망을 가지고 계속 기도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여줄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일단 예언을 미래 지향적 예언과 야웨의 직접적인 말씀을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예언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계시되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언이 인간의 언어로 표현됨으로써 가지는 한계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때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취의 방법은 ‘하나님의 자유’다. 다음으로 언급하는 것은 사후예언이다. 사후예언은 “사건이 먼저 발생하고, 그 후에 작성된 예언적 텍스트가 스스로를 예보(forerelling)라고 주장하는 것이다”(175). 복음주의의 보수적 학계에서 사후예언이 비판을 받아온 것은 텍스트가 만들어진 시기가 텍스트 자체에서 주장되는 것보다 후대라면 텍스트가 독자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나 다니엘 7-12장이 논쟁의 핵심 본문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성경의 영감을 불신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단 고대 근동에 있었던 사후 예언의 자료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다니엘 본문을 설명한다. 저자의 종합적 결론은 예언은 “예보적 특징”과 그에 따른 성취/미성취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원대한 정경적 증거로부터 취해진 예언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예언과 종말 성취의 지연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왜 아직까지 성취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인간의 신실성 즉, 선포된 예언에 대해서 인간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뢰성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장에 대한 생각

1. 예언의 미성취 또는 종말의 지연에 대한 부분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구약성서의 미성취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자유’라는 것에서 심판이 구원으로, 구원이 심판으로 바뀌는 일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종말의 지연을 인간의 신실성에 대한 문제로만 접근할 때 이해는 되지만 거의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을 지속적으로 부여해 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궁금함이 많아졌으며,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6장의 요약과 생각

 위작과 정경에 대해서 다룬다. 특히나 역사비평이 정경의 저자, 권위, 영감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강화하고(오경, 요한복음), 때론 어떤 것이 문제가 되는지를 다룬다(이사야, 바울 서신). 역사비평의 연구는 오경을 문학적 ‘위작(pseudepigraphon)’으로 분류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개념에서 저자와 편집자 사이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으며 대부분의 저자들은 익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현대의 관점에서 고대 자료의 저자를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고대의 저자 개념은 익명성의 근거도 제공하지만, 고대 텍스트의 권위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에 대한 역사 비평의 연구는 텍스트의 기원을 의미하기 보다는, 권위적이며 계시적인 전승에 집중하도록 하여 정경의 이해를 강화하였다. 요한복음은 오경과 달리 저자와 권위에 관한 문제를 조금은 열린 결론으로 마무리한다. 이사야와 바울 서신에서도 저자와 위작에 대한 부분을 다룬다. 그런데 앞선 두 문헌과는 달리 문제를 성찰하게 만들 뿐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데, 이것은 저자의 의도처럼 보인다. 이런 고민과 성찰을 정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개선해 줄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7장의 요약과 생각

 7장은 그 유명한 ‘역사적 예수’에 관한 핵심적 주제를 예수의 자기제시, 기적, 동정녀 탄생, 부활로 선별하여 분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역사비평이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묘사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으로 묘사하지 않는 등으로 신앙에 흔들리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 비평적 연구가 가지는 한계를 지적한다. 그럴 수 있지만, 이는 앞선 주장들과는 달리 너무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섣부른 결론으로 마무리 한게 아닌가 싶다. 다른 세 주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결론적 논평에서 저자는 무비평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받아들이지 않게 하기 위한 시도라고 밝힌다. 그렇다면 앞선 구약성서에서 역사비평을 접근한 방식과 복음서의 역사비평을 접근한 저자의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책의 전체 부분에서 가장 아쉬운 파트였다.


8장의 요약과 생각

 이 장에서는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이 차이가 있을지에 대해서 비교한다. 특히나 사도행전 9-15장과 갈라디아서 1-2장의 불일치에 대한 부분의 논쟁을 다룬다. 이에 대한 연구는 몇 그룹으로 나눠진다. 두 본문을 조화시키려는 학자들은 신학적 근거(무오성)를 가지고 어떻게든 조화시키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다. 조금 다른 입장에서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신학들이 공존했기 때문에 불일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전혀 다른 입장에서는 정경으로 접근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오류를 인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들에게 두 본문은 탐구의 대상일 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저자는 각 주제별로 탁월한 학자들의 글을 요약한다. 바우어(F. C. Baur)를 통해서는 두 본문의 차이와 모순을 살펴본다. 그는 신학적 강조점이 누가에서 바울로 이동하여, 누가에게서는 바울 신학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다. 보르겐(P. Borgen)을 통해서는 상보성과 조화로 접근한다. 이는 서로 다른 해석적 전제가 있다는 접근이다. 그래서 보르겐은 바우어와 달리 신학적 강조점이 바울에게서 누가로 이어진다고 본다. 차일즈(B. Childs)의 정경비평적 접근을 통해서는 정경의 신학적, 역사적 중요성을 살펴본다. 저자는 차일즈가 각 인물의 신학보다는 텍스트가 기독교 신학에 기여하고 있는 바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다. 이후 저자는 제안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평가한다. 그 안에는 역사비평이 이 부분에 관한 연구에서 기여한 바를 언급한다. 결론적으로 이 책이 가장 지지하는 바인 상호보완적 접근을 지지한다. 


9장의 요약과 생각

 저자는 역사비평이 성서 연구에 독이 아니며, 해석자들은 역사 속에서 성서를 해석해야 하는 상황임을 분명하게 언급한다. 그러나 역사비평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가장 좋은 비평 방법은 “역사비평을 통해 성경 자료를 생산해 낸 인간의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그 자료가 보도하는 역사적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동시에 신학적 접근법을 통해 성령께서 그러한 인간의 작업과정과 그것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설명하고 텍스트가 증언하는 신적 실체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무리하는 부분에서는 아주 친절하게 독자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말로 신학과 영성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해 준다.


총 정리

이 책의 목적은 역사비평이 기독교의 근본적 교리주장들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책은 복음주의자들과 역사비평의 관계를 재설정하도록 요청한다. 역사비평 자체에 비평적으로 접근하고, 비포괄적 형태로 방법들을 차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궁극적으로 복음주의자들이 역사비평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흔들릴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역사비평이 줄 수 있는 신학적 영향력에 대해서 평가하고 파장을 분석하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목적이다. 1장의 후반부에는 이어 나올 장들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해두었다. 이 책을 반드시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요약을 보고 필요한 부분만 선별해서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각 챕터가 연속성이 있다기 보다 논문집안에 각 저자들이 각자의 글을 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역사비평을 공부하며 신앙이 흔들릴 것만 같던 고민이 있던 분들과 역사 비평이 과연 오늘날 성서 해석을 위해 꼭 필요한가에 대해서 고민하는 분들에게 적극적으로 권하고 싶은 책이다.


* 각 장의 마지막에는 ‘후속 연구를 위한 제안’으로 선별한 좋은 책들을 소개한다. 대부분 원서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각 주제에 대한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참고해도 좋을 만한 책들이 잘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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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무성전 시대 - 포로기의 역사, 문헌, 그리고 신학에 대한 개요
질 미들마스 지음, 홍성혁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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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전 시대"라는 용어가 굉장히 낯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포로기'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포로기라는 용어를 사용할 경우, 남유다의 멸망 후, 바빌론의 포로로 잡혀간 이들이나 이집트에 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한다는 의미가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무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의 복잡한 생활상을 함께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저자인 질 미들마스는 이 단어의 사용을 통해 두 성전 사이에 놓인 명확한 시간적 틀(주전 587-515년)을 중심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다. 저자는 무성전 시대에 관한 연구는 현재 해석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당시 핵심 이슈들을 강조하며, 당시에 문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저자의 언급 중에 "고통과 위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독자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하게 한다.


 서론에서 저자는 남유다의 멸망 후 나타난 신학적인 변화와 "무성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계기를 밝힌다. 그리고 이 시기를 설명하는 성경들을 시간의 순서를 따라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것이라고 말한다. 첫번째 부분은 유다의 파괴가 일어난 주전 587년의 역사 사건 서술이다. 두번째 부분은 미래에 관한 어떤 소망도 드러나지 않고, 파괴 이후의 상황을 묘사하는 애가(일부 시편, 이사야 63장 7절-64장 11절; 애가)와 신명기 역사서(DH)를 다룬다. 세번째 부분은 심판과 희망이 섞여 있는 성경(예레미야, 에스겔 일부)을 다룬다. 마지막 네번째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환된 제2이사야, 에스겔 40-48장을 다루고 그 희망에 관해 인간이 해야할 반응(학개; 스가랴 1-8장; 성결법전)을 다룬다. 이 책을 읽다보면 무성시대을 살아가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머물러 있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려고 몸부림 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결론에 다다라서 성전 파괴 후, 다시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희망을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여러 신학적 용어들을 정리해 준다. 그 단어들은 소통, 창조성, 기억, 적응, 상속, 포용이다. 이런 용어들을 통해 무성전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은 바빌론, 유다, 이집트 어디에 있든 신앙 공동체를 위해 창조적이며, 통합적인 일들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고, 뭔가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있음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그러나 책의 성격을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포로기의 역사, 문헌, 그리고 신학에 대한 개요"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독자인 나는 이 부분도 아쉽긴 하다. 저자가 "무성전 시대"라는 용어로 글을 풀어나가기로 결정했다면, 부제에서도 "포로기"가 아니라 "무성전 시대"라고 표현했으면 어떨까 싶다. 암튼 유다의 멸망에서부터 두 번째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의 역와 신학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대략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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