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땅의 신학
개리 버지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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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에 흐르는 중요한 신학적 요지가 "땅과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그 외에도 중요한 주제가 많겠지만, 이 두 개의 주제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땅"은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큰 작용을 한 것처럼 보인다. 구약성서에서 흐르는 "땅"에 관한 이야기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떻게 흘러갔는지 신약 학자 개리 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8장에 거쳐서 "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1. 성경의 유산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챕터에서는 당연 "약속의 땅"에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한다. 족장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또한 땅에 관한 하나님의 주요한 말씀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다는 것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땅은 언약과 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땅은 언약과 의를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로 인해 상실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선물로 주셨고, 이스라엘은 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랍비들에 의해 땅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2.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그 땅

 여러가지 이유로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성지보다 그 밖의 땅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필론은 땅을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석하였다. 다시 성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세푸스도 필론과 유사하게 땅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우주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모든 땅이 속해있다고 보았다.


3. 예수와 그 땅

 예수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마치 단절하듯이, 땅에 대한 열망과 땅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메시지(예, 로마에 대항)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땅에 대한 열망에 유대감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에서 그들이 볼 수 있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또 다른 "땅"으로 재해석하였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있던 땅에 대한 논쟁이 없었고, 오히려 그 땅을 반대한 듯한 모습을 가졌다.


4. 제4복음서와 그 땅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조롱하던 땅 "갈릴리"에 집중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소위 "거룩한 땅"이라고 불린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던 성전이 예수로 대체되었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거룩한 장소 그 자체가 된다. 요한은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공간적 장소인 땅에 시선을 두고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였던 것에서, 진정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요한의 땅의 신학은 기독론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5. 사도행전과 그 땅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가까이 지냈던 누가는 이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은 유대나 갈릴리가 아닌 더 넓은 세상에 있다고 강조한다. 정체성의 핵심을 땅에서 찾았다면 이제는 예수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메시아를 통해 오는 축복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돌아와 유대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땅과 건물(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에 보증이 될 수 없었다. 이제는 문화, 지리적 경계를 넘어가야 했다. 그것이 기독교인과 교회의 사명이자, 정체성이었다. "초기 기독교 안에는 신학적 지역주의가 없었다"


6. 바울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

 유대인들의 영토 중심주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진행된 땅의 유산에 대한 진정한 상속자는 예수라고 보았다. 그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도 있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편화 시킨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7. 바울 이후의 발전들

 신약성서의 비교적 후대의 작품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로 본다. "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에도 "땅"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성지가 아닌 온 세상을 의미했다. 


8. 땅, 신학, 그리고 교회

 버지는 이 장에서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영토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다. 비판하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이들은 구약 연구보다는 몇 구절에 의존한다. 땅의 약속은 언약적 신실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세계관에 예언자들을 인용하지만,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방인과 나그네였다는 것을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잊어버린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구약성서의 문맥을 무리하게 현재에 적용한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 저자들이 "영토 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버지가 했던 두 개의 중요한 말에 집중하고 싶다.


 "그 땅의 소유권을 묻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질문이 아니다. 대신 신약은 우리가 그 소유주를 아는지, 또는 다른 틀로 말하면 그 땅이 우리를 소유하는지를 질문한다."


"성지를 다시 주장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토를 재정복하며, 다른 종족을 배제하고 한 종족에게 종교적 특권을 부여하려는 외침들에 대해, 신약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런 것들을 멀리하는 신실함을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종교적 특권으로 지지를 받던 영토 관련 주장들이 더 이상 설 수 없는 시대와 왕국을 마음에 품으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약속의 "땅"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거룩한 땅의 중심이었던 "성전"에는 여전히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그랬지만, 땅과 성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대체된 후, 그들은 "온 땅"을 향해 나갔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선교"를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에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과 "교회"를 집착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것 사이의 고민 말이다. 분명 초기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그들의 정체성을 다르게 했다. 그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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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경배함 - 초창기 기독교 예배 의식 속의 예수 교회를 위한 신학 1
래리 허타도 지음, 마이클 버드 엮음, 송동민 옮김 / 이레서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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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소개하려는 이유


 서론의 첫 문장이 큰 궁금증을 가지게 만들었다. “고대 로마 세계에서 ‘종교’의 핵심 표현은 신념이나 고백 문구가 아니라 예배였다.” 그동안 신앙의 상징, 종교의 핵심은 ‘고백’이라고 생각했었고, 하나의 ‘신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배’가 핵심 표현이었다는 그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추가적으로 저자가 글을 서술하는 요점들에는 ‘의식의 배타성(cultic exclusivity)’과 ‘이중적’ 의식 형태가 있었다. 이것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예배에서 예수의 위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중적 의식 형태는 무엇인지 또한 궁금했다. 


 이 책을 추천하게 된 큰 이유는 호기심과 궁금증이었고,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어떤 새로운 충격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학문적 기대였다.




2. 내용 요약


첫 부분에서는 예수가 종교 의식 속에서 어떻게 경배를 받게 되었는지 학문적 배경을 소개한다. 그 중심에는 ‘종교사학파’가 있었다. 현대까지 이르는 이 연구에 대한 주요 학자들을 정리하고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들로 비평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 부분은 흔히 논문의 ‘연구사’에 해당하는 것 같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 종교에서 예배의 중심적 성격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요점은 하나다. 고대 종교에서 나타나는 핵심적 표현은 예배/예식의 관행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 관행은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며 핵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 유대교의 유일신론 소개한다. 저자도 언급하듯이 ‘유일신론’에 대한 사전적 접근을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구약성서-고대 유대교로 이어져 내려온 신관이 아니다. 이스라엘-고대 유대교는 다른 종교의 신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지만(사실, 상관이 없었다), 자신들의 믿음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단일신론’이 더 맞을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나중에 유일신론과 결합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핵심은 고대 유대교는 유일신론을 통해 분명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외경의 본문들을 보여주며 고대 유대교는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독론적 주장이 담긴 문헌(특히, 바울 서신)을 소개한다. 그들의 배타적 예배 의식 속에 예수가 자리하고 있던 위치는 상당히 ‘변이(mutation)’적이었던 것이 저자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예배의 이중적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배경에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웟던 일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경배받을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에 생겨난 놀라운 일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던 증거들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바울서신을 주로 사용한다. 그 의식으로는 기도, 기원/고백, 세례, 성찬, 찬송/시/영적인 노래들, 예언이다. 앞선 저자의 주장처럼 이중적 예배의 형태가 있었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예수는 이중적 예배 형태 속에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이다. 이것은 배타성을 지닌 예배 의식을 배경으로 하며,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경험이 독특한 변형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이런 모습이 예수를 경배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초기 기독교인들은 확신하였고, 그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 이중적 예배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3. 생각


1) 100페이지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경배받지 않았고, 신으로 경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섬김의 대상이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적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 말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지 않고, 신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면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2)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핵심적 내용은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목마른 생각이 든다면, 그의 또 다른 책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소해야 할 것 같다.


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 핵심에는 ‘고백’이 있지 않았을까? 했던 질문은 아마도 지금껏 접했던 책들이 ‘고백’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제2성전기부터 변화되어온 고대 유대교의 상황과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상황에서 종교의 핵심은 배타성을 지닌 ‘예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고, 지금껏 그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책의 첫 페이지에서 가졌던 학문적 기대를 채워주는 좋은 결론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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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의 사회경제사상
마르틴 헹엘 지음, 이영욱 옮김 / 감은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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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이 책을 소개하려는가? (목적)

헹엘은 친숙한 학자다. 그는 기독교/유대교와 관련된 제2성전기 연구와 헬레니즘 연구에 큰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의 책들 중, “유대교와 헬레니즘”, “신구약 중간사” 등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고, 이는 그의 관심 분야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 준다.


 그의 여러 책들 중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현대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사회경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관점으로 사회경제를 바라보아야 할까?” 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궁금해하는 이 질문에 대해서 헹엘은 답을 찾아보려고 시도하기에 우리에게 의미있는 책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2. 저자의 관점이 기존의 방법이나 이론에 비해 무엇이 특별한가?

 헹엘이 완벽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주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말하다시피 이 책을 쓸 때는 앞으로 이와 관련된 주제가 계속 연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선구적 역할을 했다. 언급하기 쉽지 않았던 사회, 경제의 문제를 헹엘에 의해 서론적 연구가 나오게 된 것은 분명 큰 의미가 있다. 이 책은 초기 기독교(신약성서, 초대 교부들)에 등장하는 “재산”에 관련한 내용들을 다루는 아주 특별한 책이다.


3. 내용 정리

 헹엘은 구약성서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초기 기독교에 집중되어 있다. 시대를 따라 그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해 보겠다. 구약성서에서는 적법한 재산 소유가 가능했지만(예, 십계명), 재산에 대한 권리는 약자를 돌보는 의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희년 제도를 통해 빚과 노예의 해방과 땅의 재분배라는 사상이 녹아 있었다. 구약성서의 세상에서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을 비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산의 오용에 대해서는 비판했다. 인간이 부를 탐하고 매이며, 부정한 방법으로 증식하고, 권력의 도구로 오용하는 모든 곳에서 재물은 숭배를 받는다고 경고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바울서신에는 가난과 부, 재산과 무소유 등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당시 공동체의 빈부의 격차속에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메시지는 유지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예수의 메시지처럼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 공동체로서 재산을 가져야 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이 상실된 것 같아 보였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았다. 개인의 소유는 공동체의 뜻과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사회적 격차는 사라지고, 가난한 자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좋은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못했다. 주후 40년 이후에, 체계적인 경제 생산에 관심이 없었던 그들은 금전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가난한 자들’이라고 불렀던 이면에는 경건한 자들을 위한 명예로운 호칭임과 동시에 실제로 빈곤함을 겪고 있던 현실이 있었다.


고대 교부들도 사유재산은 인간 불화의 근원이라고 정의했고, 당시 사람들은 기술에 억압되지 않고, 사유재산이 필요하지 않은 평화의 시대(거의 원시 시대에 가까운)를 소망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인들만의 고유한 생각이 아니었고, 고대에 널리퍼져있던 신화적 역사에 대한 사유였다.


분명한 것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는 일에 대한 권리를,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2-4세기 기독교인들은 교회 공동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의 빈곤함에도 관심을 가지며 적극적으로 자선을 행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호감도는 더욱 상승하는 시기가 이 때였다. 어느 종교 공동체나 그 외 모임에서도 이렇게 행하는 곳은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는 부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공존할 수 있는가였다. 그래서 헹엘은 소유를 포기하는 급진적 입장, 자족에 대한 철학적-금욕주의적 모티브, 효과적인 균등에 대한 세 가지 입장을 모두 정리해 준다. 세 입장을 정리한 후, 효과적인 균등을 제시하면서도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소개한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묵시적 세계관이나 엄격한 금욕주의적 이상이 아니라, 로고스를 통해 인도될 수 있으며 궁핍한 이웃에게 몫을 충분하게 나누어주는 이성적이고도 규율적인 절제를 강조했다.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는 사유 재산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그는 엄격한 금욕주의와 공로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헹엘은 오늘날과 초기 기독교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10가지 사항을 제안한다. 그 중에서 중요한 제안은 재산은 특정 조건 아래에서 인간을 타락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공적인 통체력으로 권력의 오용을 막아야하고, 의무적으로 이웃들의 안녕을 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한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결단코 재산 모으는 능력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4. 평가

헹엘의 입장은 “낭비와 가난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소비를 거부하고 사치를 포기하려는 마음”을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한 때 유명한 구호였던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 “본질로 돌아가자”가 중요하지만, 그 때로 돌아갈 수도 없을뿐더러 그 때로 돌아가는 것이 좋은 결과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체성의 재점검이다. 헹엘은 서론에서 ‘시대 정신(Zeitgeist)’을 선도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작업을 해야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근원을 바로 알 때에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확신에 찬 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기독교인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서 혼동되는 부분이 있을 때, 우리는 정체성을 다시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바로 알 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좋은 점검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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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그리스도인의 공동읽기 - 예수 시대 기독교 전승은 어떻게 형성되고 보존되었는가
브라이언 라이트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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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의 박사 논문을 기반으로하였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예상하는 학위 논문의 순서가 그대로 녹아있다. 저자의 주요 주제인 ‘공동 읽기(Communal Reading)’이라는 말 자체가 상당히 낯설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이 단어와 저자의 의도를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다. 


 1장에서 저자는 먼저 기독교 전승을 통제해 왔던 ‘공동 읽기’에 대한 연구에 그동안 어떤 한계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연구사를 정리한다. 특별히 그는 ‘공동 읽기’에 관심이 있었던 학자들도 깊은 연구에 다다르지 못했음을 언급한다. 연구사가 있기 때문에 선행 연구의 한계를 명확히 볼 수 있고, 저자의 주장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저자가 밝히고 싶어하는 것은 널리 퍼져 있던 공동 읽기의 사건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2장에서 저자는 ‘공동(Communal)’이라는 단어를 선호하는 이유가 사회적 측면이 부각되고, 둘 이상의 참여가 있던 사건임을 정의해 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동 읽기가 일어난 시점을 기원후 1세기로 주장하고 싶어하는 저자는 1세기 공동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밝히기 위해 초창기 기독교 전승을 통제한 것을 고찰하는데 필요한 변수만을 제시할 것이고, 그 외에는 자신의 연구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2장에서는 저자의 연구 대상의 시기와 장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3장에서는 공동 읽기의 확산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경제와 정치에 대한 설명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기원후 1세기의 지중해 경제는 대부분 번영하였고, 안정된 상태였다고 본다. 이런 상황은 공동 읽기가 널리 퍼졌을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고 설명한다. 물론, 경제적 번영과 안정이 직접 요인이 아니라, 뒷받침했을 정도였을 것이라고 정리한다. 이와 더불어 정치적 안정 또한 공동 읽기의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Q1. 이 부분부터 많은 질문들이 생겨난다. 공동 읽기의 퍼짐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경제와 정치의 상황에 대한 근거가 제대로 제시되었는가? 그리고 기원후 1세기에 정치, 경제가 정말 안정되었을까? 특별히 당시 유대교와 기독교에 적용할 만한 것이었을까? 당시 이들의 역사에는 계속되는 반란과 탄압 등이 이어지는 상황이지 않았나?



 4장에서는 사회적 배경을 제시한다. 당시 엘리트 계층은 읽거나, 받아쓰거나 두 개를 다 할 수 있는 노예를 고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당시 공동 읽기의 사건이 일어난 무대는 다양하였고, 빈번하였다고 본다. 저자는 실내와 실외에서 일어났던 당시 공동 읽기 사건에 대한 여러 문헌들을 증거로 제시한다. 


Q2. 당시 그들은 무엇을 읽었을까? 


Q3. 공동 읽기를 할 수 있는 자료들이 당시에 넘쳐났기 때문에 다양한 곳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가? 


Q4. 그 양이 여러 사람이 여러 곳에서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나? 


Q5. 엘리트가 고용한 노예들은 대부분 문맹이 아니었나? 일정 교육을 받은 노예들이었나? 


Q6. 공동 읽기 자료는 회람용이었나? 복사본이 여러 개 있었나? 


Q7. 저자는 청중이 낭독자의 실수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예를 제시하는데, 그들이 읽었던 자료들은 권위있는 하나의 자료였는가?


5장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일어난 공동 읽기의 사건의 증거가 신약성서외 어디에서 밝힐 수 있는지를 조사한다. 1세기 그리스-로마의 저자들 20여명과 그들의 작품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을 제시한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양은 실로 방대하다. 이후, 유대 자료(마카베오 4서, 필론, 위필론, 요세푸스, 에스라4서)를 소개한다. 이 작업들을 통해 저자는 공동 읽기의 수요는 능력이 다양한 수준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여러 개의 통제의 수단(목격자, 검토, 폐기, 게시, 비교, 저자 확인 등)이 있었고, 공동 읽기에 대한 인상과 반응이 존재했고, 당시에는 글쓰기에 대한 억압도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Q8. 나름의 통제가 있기는 했으나, 저자들 각각에 따라 분류가 되다보니 공통적인 통제의 수단은 없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 통제의 한계가 있지 않았을까?


 6장은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다룬 부분이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약성서에 나타난 공동 읽기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거의 모든 신약성서를 다룬다. 거의 130여 페이지에 가까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다루지만, 핵심은 하나다. 기원후 1세기의 공동 읽기는 넓은 지역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저자가 논의하고자 했던 핵심에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Q9.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다수였다는 언급(216)은 앞선 설명과 상반되지 않는가?


Q10. 두루마리가 아닌 기억으로의 연설이 이어지거나, 메모로 된 형태의 글을 읽었다면 어떻게 통제를 하였을까?


Q11. 공동 읽기의 ‘질 통제(quality control)’은 텍스트 내용에 대한 정확도의 통제인가? 해석에 관한 통제인가(참조. 270)?


Q12. 신약성서의 공동 읽기는 그야 말로 여러 곳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라기 보다 특정 장소(예, 회당), 인물, 계층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263페이지의 언급처럼 텍스트 접근이 가능한 사람이 소수였다면, 그리스-로마 시대에 여러 계층에 의해서 공동 읽기가 이루어졌다는 앞선 언급과 조금 달라보인다.


정리하면, 많은 추천사에서 반복된 것처럼 저자는 상당한 분량의 1차 문헌을 근거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로하여금 놀라게 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본문뿐만 아니라, 부록을 통해 ‘공동 읽기’ 사건이 있었던 추가 증거들을 제시해 준 것은 정말 대단한 연구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아니면 독자인 나의 생각에 궁금증이 많아져서 그런지 각 챕터를 읽을 때마다 여러 궁금증이 생겨난 상태로 다음 챕터를 맞이한다. 다음 부분을 읽으며 어느 정도 해소되는 부분도 있지만, 더 많은 궁금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러나 초반부터 저자가 밝히고자했던 “공동 읽기의 사건은 넓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에 대한 연구는 분명히 밝혀진 것 같다. 그 외에 수많은 질문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추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가능성을 내비칠 수 있기 때문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공동 읽기’라는 특별한 주제를 연구하면서 교과서로 삼을 만한 책이기에는 충분한 것 같다. 


* 또 다른 몇 가지 궁금증


1. 64페이지에서는 아래 갈릴리로, 69페이지에서는 하부 예루살렘으로 표현된 이유가 무엇일까? 같은 단어인 Lower를 사용한 것 같은데 말이다.


2. 책을 계속 읽다보면 ‘공동 읽기’ 보다는 ‘공동 읽힘’ 이나 ‘공동 듣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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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해석 - 마태공동체의 사회정치적 현실과 신학적 상징 체계
김학철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마태복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저자의 의도는 서론에서 충분히 살필 수 있다. 저자는 이미 서론에서 마태 공동체의 상황과 마태복음과의 관계를 밝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태복음을 사회 정치적 현실과 맞선 그들의 신학적 상징 세계라고 표현을 한다. 저자가 표현하듯 예수는 그들이 피할 수 없고, 절망에 빠진 마태공동체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었다. 또한 믿음을 갖게 해주었으며, 현실을 돌파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진 그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맞서서 살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근본적인 핵심이다. 왠지 마태공동체의 상황이 공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즘 시대에도 식민지는 아니지만 눈만 뜨면 한 숨이 가득하고, 불합리함과, 벗어날 수 없는 현실때문일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과연 저자가 바라보는 마태복음의 해석 접근 방법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론을 넘어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저자의 글들을 모아 편찬해 낸 책의 장점이 있다고 한다면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보기 쉽다는 것이다. 내용이 쉽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이미 1장에서부터 신약의 외경(유딧서, 토비트서)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글들이기에 독자들에게 생소하거나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마태 공동체의 상황 주변에 있었던 글들이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데 훨씬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사용을 하였다.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가진 책들은 서론과 본론에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고 해도 결론에서 한 번 더 요약을 해주기 때문에 장점이라고 언급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새로운 해석의 시도를 한 것처럼 보인다(이 시도는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많이 시도된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시도이다). 그것은 부제가 정확하게 그 의도를 밝혀준다. “마태 공동체의 사회정치적 현실과 신학적 상징 세계그래서 각 논문들에서 저자는 마태공동체는 당시 지배 세력이었던 로마의 통치에 맞선 대안적 공동체로 그리고 있다. 나아가 신약 성경은 그 대안적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각각의 논문들이 그 주제에 맞춰서 설명되고 있다. 새로운 시도와 새로운 시각에서 마태복음을 바라본 저자의 시도와 해석은 분명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짧은 지식 때문인지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첫째로, 신약 전공자들이 아니라면 보기가 어렵다. 논문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그 논문의 대상이 신약 학자들 아니었을까?) 글도 내용도 어렵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둘째로, 저자의 시각이다. 이 책은 부제가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로마에 대항하는 마태공동체, 나아가 신약 성경을 한 가지 초점에 맞추어 해석을 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 한 쪽으로만 흘러들어 가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보통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예수와 그가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 집중하고, 그 외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예수에 대해 집중한다고 흔히들 표현한다. 물론 그 외에도 초기 공동체에게 큰 문제가 되었던 거짓 교사, 이단, 은사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저자의 말대로 라고 한다면 예수가 오신 이유도 로마 공동체에 대항하기 위함인가? 예수의 고난도? 부활도? 거짓 교사들의 문제도? 공동체를 무너뜨리려 하는 교회 내부의 문제도? 로마가 무너진 다음에는 또 다른 로마가 있는 것인가? 한 공동체의 특별한 상황일 수도 있고, 조금 더 나가자면 특정 본문은 그런 형태를 나타낼 수 있겠지만, 신약 성경 아니면 좁게는 마태복음이라고 그 하나의 관점으로 전체를 풀어가기에는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는 이 책에서 한 가지 가슴 뜨거운 글이 있다면 저자가 서론에서 말하는 그리고 본론 중간 중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눈만 뜨면 한 숨, 황폐한 땅 아무 소망도 없는 마태 공동체에게 예수의 나타나심과 그 분의 사역은 그들에게 소망과 희망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소망이 대한민국과 각 사람에게 나타났으면 좋겠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다시 오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린 이제 마태 공동체처럼 예수의 사역과 삶을 보며 희망을 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예수님은 살아계신 존재이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시 희망과 소망을 품을 수 있겠는가?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자들이 열매를 맺는 삶 아니겠는가? 우리가 서로를 보며 또한 예수를 모르던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예수를 발견하는 것만이 살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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