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이야기 기술
로버트 알터 지음, 황규홍 외 옮김 / 아모르문디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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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 중에 한 책이 바로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이라는 책이다.


1. 이 책의 참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성서학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성서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를 잘 알고 있는 비교문학 학자다. 그래서 이 책을 보다보면 성서학자같은 느낌도 들고, 문학학자 같은 느낌도 든다.


2. 대부분의 책은 목차만 보아도 저자가 어떤 의도로 서술해 나갈지를 알 수 있다. 1장은 "성서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다. 이것이 저자의 가장 중요한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3. 저자는 흔히 말하는 역사비평의 방법(최종 본문 이전의 상태를 추적하여, 저자 및 배경을 역사적으로 밝히는 방법)이 아닌 문학비평(최종 본문에 관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관심의 비중이 "최종 편집자"에게 있음을 말한다(41). 그러면서 중간 중간 자료 비평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설명하는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4. 알터는 역사비평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정말 매력있는 노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5. 그는 미드라쉬 해석에 대한 아쉬움도 말한다. 미드라쉬는 원문의 통일성은 전제로 했지만, 성서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라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미드라쉬의 해석은 너무 도덕적 교훈에 집착한다는 것이다(28-29)


6. 알터는 이 책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펼쳐나갔던 주제들은 단어, 행동, 대화, 서술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그 방법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예로들어 어떻게 설명했었는지, 9장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간략히 설명해 준다.


7. 옮긴이들의 말에서는 알터의 서술 방식과 성서 비평학의 간단한 역사와 그 사이에서 알터의 작품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9-10장 두 번에 걸쳐서 내용을 미리 읽거나, 정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8. 성서를 읽다가 나오는 이야기의 반복, 이야기 사이의 단절 등이 나와 고민을 할 때, 알터는 그 자체가 최종 편집자의 놀라운 기교에 의해서 빠지지 않고 완성도를 높이게 되었다는 결론을 확신있게 내려준다.


* 성서를 전공한 분들이나, 성서를 접하는 분들에게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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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신학의 탐구 -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앤드류 린지 지음, 장윤재 옮김 / 대장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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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신학을 공부할 때부터 주변인들에게 들었던 말 중에 하나인 ‘맙소사, 그것들은 단지 동물일 뿐이야!”는 그가 동물 신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몇 가지 대답을 한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동물권을 옹호하는 ‘이성적’ 논거는 매우 튼튼하나, 왜 동물에 가하는 고통에 대해서 정당성을 증명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둘째는 기독교는 동물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기반을 이미 가지고 있는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노예, 여성 등에 관해서도). 이것은 현대까지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잘못 해석한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셋째는 지극히 저자 개인적인 고민으로서, 지구 위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며, 동물은 어떻게 대우받을 것인지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1장에서 저자는 종교와 동물보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대화와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동물보호자들을 종교의 지지가 필요하고, 종교는 동물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읽어보면 대부분 종교인들에게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가 훨씬 강하게 들린다.


 그러나 2장에서는 동물에 대한 신학을 다루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감정적인 문제로 여기고 등한시해왔지만, 생각보다 이성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물 문제는 윤리적, 신학적, 영적 도전들이 있음을 저자는 말하고 싶어한다. 윤리적 문제는 동물들의 착취를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것이 대해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모든 내용에서 동물에게 연민과 친절을 보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혼란스러움은 있다. 신학적 도전들에서는 ‘신정론’에 관하여 획일적을 피조물의 한 종인 ‘인간’에게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현 신학을 비판한다.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계시겠는가?” 이것이 저자의 질문이다.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면 신학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영적 도전들에서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다스린다’는 지배권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힘과 지배에 대해 성경은 정당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힘을 가지신 예수는 섬기는 분으로 오셨다. 인간이 힘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3장에서는 동물권에 대한 오해와 동물권에 대한 개념의 발전등에 대한 설명을 한다. 그리고 동물권-신학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도하려고 한다. 


4장에서는 생태신학과 동물신학의 차이를 설명한다. 저자는 그 차이에 대한 기준들을 몇 가지 제시한다. 죽임에 대한 윤리, 고통의 문제, 동물의 경영, 생태신학은 자연속에 자연스럽게? 있는 ‘포식 체계’를 창조주가 만든것이라고 본다. 생태신학은 자연 전체에 관심을 갖는다. 그런데 이 생각속에서 은연 중에 야생 동물을 살상하며, 정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 동물신학은 지금의 자연은 타락했고, 각각의 피조물은 지각있는 존재들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동물신학이 자연 전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물에게 해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5장은 구약, 신약, 조직신학의 분야의 교수들이 동물신학에 대해서 비평한 논쟁에 대해서 저자가 대답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곳에서도 그가 반복해서 이야기했던 내용들이 등장한다. 피조물에 대해서 가진 인식을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보면 동물에게도 모든 피조물들이 존중속에 있어야 한다는 ‘신적 권리(theos-rights)’가 있다는 동물권을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이 저자 주장의 핵심이다. 


6장에서는 외경에서 예수와 동물의 관계를 다룬 작품들을 선별하여 기독교인들이 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문서들에는 동물들에 대한 예수의 모습은 지극히 윤리적이며, 동물들과 공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강조된다. 


 8장은 초기 중국 기독교에 퍼져있었던 동물에 대한 관심과 채식주의를 다룬다. 저자의 생각에 초기 중국 기독교인들은 동물보호를 위한 윤리적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로 평가될 수 있다고 본다. 


 9장은 과연 동물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능한가를 논한다. 이곳에서 그는 동물들을 위한 장례식을 진행했고, 그와 관련된 책을 쓰기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들을 언급한다. 또한 책이 출판된 후에 있었던 다양한 에피소드들에 대해서도 말해 준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놀랄만한 ‘동물의 구원’을 주장한다. 그가 생각한 구원이란, 동물들이 살면서 겪었던 불평등과 고통을 보상받는 차원의 구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10장에서는 교회는 동물을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제안한다. 첫째는 성서 안에서 모든 동물 친화적인 요소들을 끌어내는 ‘동물성서’다. 둘째는 동물이라는 대의에 목소리를 내는 ‘동물신학’이다. 셋째는 동물을 보살피고, 동물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동물목회’다. 마지막 넷째는 동물들의 생명을 경축하고, 인생의 반려자가 된 것에 감사하며, 그들의 고통이 경감되기를 기도하고,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예배 즉, ‘동물 의례’다.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다양한 질문들이 생각난다.


Q1. 2장에서 저자는 동물권이 성서에서 간단히 도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물보호에 대한 신학적 가치를 정립해 갈 때, 충돌될 수 있는 문제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6장에서도 동일한 언급이 있다. 기독교 사상이 동물에 대해 무관심 하거나 적대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문서들도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충돌이 생기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생략되어 있는 것이 아쉽다.


Q2. 율법에 나와 있는 음식에 관한 법을 저자는 인간 중심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길까? 만약 창세기의 논지에 따라 ‘채식주의’가 중요하다면 율법을 어떻게 여겨야 할까?


Q3. 저자는 애완동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동물들을 지극히 사랑하며 아끼는 사람들의 행동은 창조주의 섭리에 맞는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인간을 위해 애완동물이 이용되고 있다고 평가할까? 


Q4. 예수께서 생선을 드시지 않았을까? 세례 요한도 메뚜기를 먹지 않았는가?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저자는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의 말을 빌려 개혁 운동의 세 단계(조롱하기, 토론하기, 받아들이기) 중에 동물 보호 운동이 토론하기의 단계에 와 있음을 좋은 징조로 여긴다. 나도 마찬가지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당연히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과 샬롬에는 모든 피조물의 회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동물신학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물론 애완동물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진행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목회자로서 고민한적이 정말 많다. 저자의 말처럼 현재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토론을 통해 나은 방향이 제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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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다시 묻다 - 사회사를 통해 본 신학의 기능과 의미 비아 제안들 시리즈
후카이 토모아키 지음, 홍이표 옮김 / 비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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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이 연구를 시작했다. 조금 더 상세하게 질문을 생각해보자면, “신학은 교회만을 위한 학문인가?”라는 것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신학이 무의미한 것일까? 저자는 오랜 신학사에서 사회적 맥락과 서로 연결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언급한다. 이는 분명하다. 그래서 저자는 신학이 비그리스도교적으로 사유하는 이들에게도 일정한 의미를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이 책을 시작한다.


 많은 학자들이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로 시도했던 것은 ‘신학 제 분야 해제’다. 이는 성서학, 교회사, 조직신학, 실천신학으로 나누고 이 분야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독특한 접근으로 신학을 접근하려고 했던 사람이 칼 바르트였다. 그는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세계와 사건 ‘그 자체’로 들어가는 것이 신학이 의미하는 바라고 설명했다. 이런 설명을 마친 뒤, 저자는 신학이라는 학문은 현대의 사람들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다는 현실을 마주함에 대해 말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학에 대한 접근은 과거 시대에 있었던 신학의 필요성과 의미를 설명하고 오늘날에도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저자는 ‘신학의 사회적 기능’을 시도한다. 


 신학의 탄생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과 관련이 있었으며, 또한 로마의 정치 사회와 관련이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틀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며, 다른 이들에게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이 신학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최초의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동시대 문화 환경에 맡게 설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후에도 교부, 변증가들에 의해 자신들이 속한 문화속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학문적, 정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슬람교의 패권을 피해 북쪽으로 퍼져나간 그리스도교는 유럽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하된 중세 서유럽에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서 서서히 멀어지고, 세상의 지배 원리로 그리스도교가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의 모든 구조를 그리스도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신학을 필요로하게 되었고, 이 설명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던지는 질문과 비판에 대한 응답을 위해서도 신학이 필요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벗어나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필요했다. 중세 시기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 성서과 교부들의 가르침에 대한 주석으로 그 결과가 나타났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중세 신학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설명했고, 현실 문제에 대해 답을 하려고 애썼다. 현실 세계에서 중세 신학은 철학, 자연 과학, 정치 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종교개혁시기의 신학은 이미 많아 알려진 것처럼 정치와 종교가 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중세신학은 국제적인 가치와 연결되었고,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은 민족적, 국자적인 가치와 결합되었다. 그리고 당시 신학은 중세 신학자들처럼 세계의 진리, 신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 규명 등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당시 신학은 자신이 속한 종파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교회가 정한 교리를 신학이 옹호했고, 개신교회에서는 신학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신조를 새롭게 했다.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들에 의해 신학은 사회를 변혁하는 이론으로 작용하였다. 이전까지 신학은 교회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에 의해 일어난 혁명은 기존 교회 제도를 비판했고, 종교 체제를 혁신하려고 했다.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 교리, 신조, 신학은 교회의 합리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쳤으며, 현실 세계에서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세상과의 선을 긋고 교회와 세상을 향해 비판을 가했던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은 ‘교회’라는 제도는 약화시켰지만, 종교성과 그리스도교라는 종교 자체를 약화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자들의 신앙은 교회의 권위와 제도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문제로 여겨졌다. 신앙을 기초로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교회의 권위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교회로부터의 자립을 선언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교회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의존하지 않고, 개인의 신앙에 집중했기 때문에 신비주의라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당시 신비주의란 황홀경 현상과 관련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는 종교성을 의미했다. 또한 신학이 종교학 안으로 편승됨으로써 하나의 역사적 연구로 여겨졌다. 더불어 신학은 종교심리학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 시기에는 과거 신학의 중요한 요소였던 계시나 기적이 신학의 비학문성과 비현실을 증명하는 요소로 변화되었다. 혁명의 최종점에서는 두 개의 신학으로 분리되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는 전통적 교회와 관련 있는 교회의 신학이다. 또 다른 하나는 교회는 싫지만 신앙은 소중히 여기고, 교회 비판이 크게 작용하는 교회 밖의 신학이다. 


 실용주의적 신학은 미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영국의 상황과 달리 미국은 신앙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 신앙은 구성원이 되기 위해 절차를 밟아야 함을 의미했다. 그리고 한 단체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의 정체성을 말해주게 되었다. 국가의 통제보다는 자유와 경쟁을 통한 상태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청교도가 종교 체제를 혁신하고자 했던 맥락과 유사하다.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신학은 종류도 다양했으며, 쉽게 사라지기도 했다(예, 해방신학, 세속화 신학, 흑인신학 등). 당시 나타난 여러 현상들에 대해 저자는 ‘신학의 시장화’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의 상황에 적절한 답을 줄 수 있는 소비적 신학의 모습을 보게 한다.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 신학은 현실 사회와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현실을 다루었다. 사회나 교회는 신학을 필요로 했고, 신학은 사회와 교회에 기여했다. 현실 세계에서 신학은 당연함과 낯섬을 마주할 때 시작한다. 신학은 상대를 이해하게하며, 나를 보게 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신학이 과거의 신학을 오늘날에 다시 살리거나, 유행에 매몰됨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학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내며 각 교회가 자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한줄평이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존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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