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홍동우 지음 / 지우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투는 우리가 교회 답지 않지만, 그것은 교회다운 것이다‘ 저자 소개인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상당한 역설이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글을 다 읽고 난 후, 저자는 무엇보다 교회와 공동체에 ‘소망‘이 있다는 그 어떤 ‘강렬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회답지 않아 다투는 우리
홍동우 지음 / 지우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읽기 전>

표지가 눈에 띈다.


1. 색칠이 되어 있는 세 분이 이 책의 주인공인거 같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이들은 뒤를 돌아보거나, 약간 옆을 보고 있는데 이유가 있을까?


2. 제목에 '교회'와 연결된 선을 보면 바로 세워져 있지 않는 십자가가 보이고, 밑에 사람들이 있는 공간을 합치면 나름 교회 모양인거 같다. 헌데 십자가가 비뚤어져 있다. 이는 갈등으로 인해 바로 세워져 있지 못한 교회 모습이자 동시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가 떠오른다(아마 다른 분도 이것을 언급하신거 같다). 교회는 십자가가 바로 세워져 있어야 하기도 하지만, 함께 십자가를 져야하는 공동체임을 역설하는 디자인인가?


3. 뒷면에 바코드가 있는 곳에 앞면과 유사한 형태다. 


​<특징>

1. 세 명의 가상 인물을 놓고 다양한 갈등의 상황을 설명한다. 가상 인물이긴 하지만 실제했던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저자의 경험과 깊은 고뇌가 함께 담겨 있다.


2. 극히 공감하며 읽은 내용들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교회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3. 반복해서 읽었던 챕터 1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자 핵심어는 ‘상황화(contextualization)’다. 저자는 이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영어 단어를 함께 썼고 상황화, 재구성, 헤매는, 뿌리내린, 해석해줄, 걸맞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 단어는 핵심어다. 나름대로 다른 챕터들을 읽으면서 내가 정의내린 핵심어가 있다. 챕터 2는 '십자가 리더십', 챕터 3은 '혼합된 몸'이다. 


<읽은 후>

1. 챕터1이 구약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읽었다. 나의 질문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관점으로 욥기를 보느냐에 따라 중요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상황화'에 지극히 동의하는 입장이다. 상황화에 관한 설명을 극대화하기 위해 잠언-욥기의 내용중 가장 맞는 부분을 돋보이게 글을 쓴 것 같다.


2. 이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책을 내가 읽었던적이 있나 생각해 봤다. 기억나질 않는다. 이 책이 처음이거나, 그 전에 읽었어도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는 새로운 소재의 책이지만, 우리의 삶과 사역 일상에 있는 새롭지 않는 소재다. 그렇기에 더욱 필요한 주제의 책이었다.


3. 이 책을 읽은 분들은 나처럼 '공감', '동의' 등의 현상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이야기이자, 내가 본 상황이자, 그 주인공이 꼭 나 같기 때문이다. 나는 가장 인물들이 했던 생각과 행동을 나도 했었다. 그리고 저자도 성장과정에 있었던 물음들을 나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저자는 그런 상황속에서 씨름했고, 이런 문제들을 성경 본문에서 해답을 찾고자 애썼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 못했던거 같아 지난날이 참 부끄러웠다. 지난날 나의 실수, 부족함 등으로 인해 상처를 입었던 몇 분들이 스쳐지나갔다. 사과하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너무.. 너무 죄송하다. 


4. 저자 소개와 책의 내용에 꼭 맞는 부분이 있는거 같다. 저자 소개에 '-이지만, -이다.'가 있는데 책도 제목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예를 들어 '다투는 우리가 교회 답지 않지만, 그것은 교회다운 것이다' 저자 소개인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상당한 역설이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글을 다 읽고 난 후, 저자는 무엇보다 교회와 공동체에 '소망'이 있다는 그 어떤 '강렬함'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5.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나와 같이 사역을하며, 나와 같이 신학도 좋아하는 한 분이 이런 책을 써주신 것에 대해서 너무 고마웠다. 덕분에 나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제안>

각 챕터를 시작하느 편지글에 저자->청년부 자매에게, 집사->담임목사에게, 은퇴 권사->임직 권사에게 가 있다. 이걸 일률화 했으면 어떨까 싶다. 예를 들면 저자->김호준 청년, 저자->박세직 집사님, 저자->현지우 권사님. 그래서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나름 제시한 해결 방법을 편지형식으로해서 챕터의 마지막에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하지만 이것은 독자인 내 느낌일 뿐, 저자와 출판사의 기획 의도가 훨씬 더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덧 붙이는>

책을 덮고 나면, 이건 '교회다워 다투는 우리'가 더 맞지 않나?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런 효과를 이미 기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역설이 많다. 그리고 저자가 쓴 글은 몇 가지 방법론이 생각 나기도 했다. '독자반응비평' 같기도 하고, '멜랑콜리아'인 것 같기도 했다. 


암튼 무엇보다 이 책을 많은 분들이 읽기를 강력히 추천한다. 이 책의 부제처럼 '다툼 속에서 교회다움을 발견하길' 꿈꾸는 분들에겐 더욱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와 땅의 신학
개리 버지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약성서에 흐르는 중요한 신학적 요지가 "땅과 자손"이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그 외에도 중요한 주제가 많겠지만, 이 두 개의 주제는 특별한 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땅"은 유대인들의 정체성 형성에도 큰 작용을 한 것처럼 보인다. 구약성서에서 흐르는 "땅"에 관한 이야기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어떻게 흘러갔는지 신약 학자 개리 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8장에 거쳐서 "땅"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1. 성경의 유산

 구약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이 챕터에서는 당연 "약속의 땅"에 관련된 이야기에 집중한다. 족장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약속의 땅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야기다. 또한 땅에 관한 하나님의 주요한 말씀 중에 하나는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는 못했다는 것과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땅은 언약과 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땅은 언약과 의를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로 인해 상실되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나님은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선물로 주셨고, 이스라엘은 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랍비들에 의해 땅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2.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그 땅

 여러가지 이유로 디아스포라가 된 유대인들이 살아가는 땅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성지보다 그 밖의 땅에서 사는 유대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필론은 땅을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해석하였다. 다시 성지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세푸스도 필론과 유사하게 땅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우주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모든 땅이 속해있다고 보았다.


3. 예수와 그 땅

 예수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마치 단절하듯이, 땅에 대한 열망과 땅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메시지(예, 로마에 대항)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땅에 대한 열망에 유대감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땅에서 그들이 볼 수 있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또 다른 "땅"으로 재해석하였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메시지에는 유대인들의 가슴속에 있던 땅에 대한 논쟁이 없었고, 오히려 그 땅을 반대한 듯한 모습을 가졌다.


4. 제4복음서와 그 땅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조롱하던 땅 "갈릴리"에 집중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소위 "거룩한 땅"이라고 불린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던 성전이 예수로 대체되었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거룩한 장소 그 자체가 된다. 요한은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공간적 장소인 땅에 시선을 두고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였던 것에서, 진정한 선물인 예수 그리스도에 시선을 돌리게 한다. 요한의 땅의 신학은 기독론으로 완전히 대체된다. 


5. 사도행전과 그 땅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가까이 지냈던 누가는 이제 기독교인들의 정체성은 유대나 갈릴리가 아닌 더 넓은 세상에 있다고 강조한다. 정체성의 핵심을 땅에서 찾았다면 이제는 예수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메시아를 통해 오는 축복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돌아와 유대 땅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땅과 건물(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일하심에 보증이 될 수 없었다. 이제는 문화, 지리적 경계를 넘어가야 했다. 그것이 기독교인과 교회의 사명이자, 정체성이었다. "초기 기독교 안에는 신학적 지역주의가 없었다"


6. 바울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

 유대인들의 영토 중심주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진행된 땅의 유산에 대한 진정한 상속자는 예수라고 보았다. 그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도 있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편화 시킨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7. 바울 이후의 발전들

 신약성서의 비교적 후대의 작품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나그네로 본다. "땅"에 살고 있지만,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요한계시록에도 "땅"에 대한 언급은 많지만, 성지가 아닌 온 세상을 의미했다. 


8. 땅, 신학, 그리고 교회

 버지는 이 장에서 "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영토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다. 비판하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이들은 구약 연구보다는 몇 구절에 의존한다. 땅의 약속은 언약적 신실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자신들의 세계관에 예언자들을 인용하지만, 예언자들의 메시지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이방인과 나그네였다는 것을 땅에 들어간 다음에는 잊어버린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구약성서의 문맥을 무리하게 현재에 적용한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 저자들이 "영토 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버지가 했던 두 개의 중요한 말에 집중하고 싶다.


 "그 땅의 소유권을 묻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질문이 아니다. 대신 신약은 우리가 그 소유주를 아는지, 또는 다른 틀로 말하면 그 땅이 우리를 소유하는지를 질문한다."


"성지를 다시 주장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토를 재정복하며, 다른 종족을 배제하고 한 종족에게 종교적 특권을 부여하려는 외침들에 대해, 신약은 아니라고 말한다. 예수는 그런 것들을 멀리하는 신실함을 요구하였고, 더 나아가 종교적 특권으로 지지를 받던 영토 관련 주장들이 더 이상 설 수 없는 시대와 왕국을 마음에 품으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 책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약속의 "땅"에는 집중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거룩한 땅의 중심이었던 "성전"에는 여전히 집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서의 저자들도 그랬지만, 땅과 성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대체된 후, 그들은 "온 땅"을 향해 나갔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선교"를 나가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에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약속의 땅을 점령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것과 "교회"를 집착하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것 사이의 고민 말이다. 분명 초기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로 그들의 정체성을 다르게 했다. 그것을 잘 기억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들을 경배함 - 초창기 기독교 예배 의식 속의 예수 교회를 위한 신학 1
래리 허타도 지음, 마이클 버드 엮음, 송동민 옮김 / 이레서원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이 책을 소개하려는 이유


 서론의 첫 문장이 큰 궁금증을 가지게 만들었다. “고대 로마 세계에서 ‘종교’의 핵심 표현은 신념이나 고백 문구가 아니라 예배였다.” 그동안 신앙의 상징, 종교의 핵심은 ‘고백’이라고 생각했었고, 하나의 ‘신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배’가 핵심 표현이었다는 그의 말에 궁금증이 생겼다. 추가적으로 저자가 글을 서술하는 요점들에는 ‘의식의 배타성(cultic exclusivity)’과 ‘이중적’ 의식 형태가 있었다. 이것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예배에서 예수의 위치를 찾아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중적 의식 형태는 무엇인지 또한 궁금했다. 


 이 책을 추천하게 된 큰 이유는 호기심과 궁금증이었고,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어떤 새로운 충격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학문적 기대였다.




2. 내용 요약


첫 부분에서는 예수가 종교 의식 속에서 어떻게 경배를 받게 되었는지 학문적 배경을 소개한다. 그 중심에는 ‘종교사학파’가 있었다. 현대까지 이르는 이 연구에 대한 주요 학자들을 정리하고 중간중간 자신의 생각들로 비평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쳐나간다. 이 부분은 흔히 논문의 ‘연구사’에 해당하는 것 같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 종교에서 예배의 중심적 성격들을 설명한다. 그러나 요점은 하나다. 고대 종교에서 나타나는 핵심적 표현은 예배/예식의 관행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의 관행은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며 핵심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저자는 강조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고대 유대교의 유일신론 소개한다. 저자도 언급하듯이 ‘유일신론’에 대한 사전적 접근을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모든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하나님만을 신으로 인정하는 것이 구약성서-고대 유대교로 이어져 내려온 신관이 아니다. 이스라엘-고대 유대교는 다른 종교의 신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었지만(사실, 상관이 없었다), 자신들의 믿음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단일신론’이 더 맞을 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나중에 유일신론과 결합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핵심은 고대 유대교는 유일신론을 통해 분명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외경의 본문들을 보여주며 고대 유대교는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부분에서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독론적 주장이 담긴 문헌(특히, 바울 서신)을 소개한다. 그들의 배타적 예배 의식 속에 예수가 자리하고 있던 위치는 상당히 ‘변이(mutation)’적이었던 것이 저자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예배의 이중적 형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동안 배타적인 성격이 강한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배경에서 하나님과 동등된 위치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예수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웟던 일이다. 부활하신 예수를 하나님과 같이 경배받을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초기 기독교의 형성에 생겨난 놀라운 일이었다고 저자는 본다. 


 다섯 번째 부분에서는 예배 의식 속에 담겨 있던 증거들을 설명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바울서신을 주로 사용한다. 그 의식으로는 기도, 기원/고백, 세례, 성찬, 찬송/시/영적인 노래들, 예언이다. 앞선 저자의 주장처럼 이중적 예배의 형태가 있었음을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예수는 이중적 예배 형태 속에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이다. 이것은 배타성을 지닌 예배 의식을 배경으로 하며,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경험이 독특한 변형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이런 모습이 예수를 경배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요구를 초기 기독교인들은 확신하였고, 그에 대한 순종의 표현이 이중적 예배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3. 생각


1) 100페이지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경배받지 않았고, 신으로 경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섬김의 대상이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신적 지위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이 말을 조금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예수를 신으로 경배하지 않고, 신적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면 예수를 하나님과 동등한 자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2)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핵심적 내용은 다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뭔가 목마른 생각이 든다면, 그의 또 다른 책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해소해야 할 것 같다.


3)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종교 핵심에는 ‘고백’이 있지 않았을까? 했던 질문은 아마도 지금껏 접했던 책들이 ‘고백’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저자는 제2성전기부터 변화되어온 고대 유대교의 상황과 로마를 배경으로 하는 상황에서 종교의 핵심은 배타성을 지닌 ‘예배’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고, 지금껏 그 연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은 책의 첫 페이지에서 가졌던 학문적 기대를 채워주는 좋은 결론이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의 이야기 기술
로버트 알터 지음, 황규홍 외 옮김 / 아모르문디 / 201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좋은 책이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 중에 한 책이 바로 로버트 알터의 "성서의 이야기 기술(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이라는 책이다.


1. 이 책의 참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성서학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성서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를 잘 알고 있는 비교문학 학자다. 그래서 이 책을 보다보면 성서학자같은 느낌도 들고, 문학학자 같은 느낌도 든다.


2. 대부분의 책은 목차만 보아도 저자가 어떤 의도로 서술해 나갈지를 알 수 있다. 1장은 "성서에 대한 문학적 접근"이다. 이것이 저자의 가장 중요한 서술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3. 저자는 흔히 말하는 역사비평의 방법(최종 본문 이전의 상태를 추적하여, 저자 및 배경을 역사적으로 밝히는 방법)이 아닌 문학비평(최종 본문에 관심)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관심의 비중이 "최종 편집자"에게 있음을 말한다(41). 그러면서 중간 중간 자료 비평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설명하는 놀라움을 발견할 수 있다.


4. 알터는 역사비평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아쉬움을 표현한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 자체가 정말 매력있는 노력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5. 그는 미드라쉬 해석에 대한 아쉬움도 말한다. 미드라쉬는 원문의 통일성은 전제로 했지만, 성서가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라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미드라쉬의 해석은 너무 도덕적 교훈에 집착한다는 것이다(28-29)


6. 알터는 이 책을 서술하면서 자신이 펼쳐나갔던 주제들은 단어, 행동, 대화, 서술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그 방법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예로들어 어떻게 설명했었는지, 9장 결론 부분에서 다시 한 번 간략히 설명해 준다.


7. 옮긴이들의 말에서는 알터의 서술 방식과 성서 비평학의 간단한 역사와 그 사이에서 알터의 작품의 위치를 알려준다. 이 부분을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아니면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다면 9-10장 두 번에 걸쳐서 내용을 미리 읽거나, 정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8. 성서를 읽다가 나오는 이야기의 반복, 이야기 사이의 단절 등이 나와 고민을 할 때, 알터는 그 자체가 최종 편집자의 놀라운 기교에 의해서 빠지지 않고 완성도를 높이게 되었다는 결론을 확신있게 내려준다.


* 성서를 전공한 분들이나, 성서를 접하는 분들에게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