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민다움 - 배달의민족 브랜딩 이야기
홍성태 지음 / 북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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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광고판 앞에서 배달의 민족을 처음 만났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라는 문구에 '아... 배달의 민족... 광고구나'라고 생각했으니, 아마도 그전에 이름은 들어봤겠지만, 유독 그 광고가 기억에 남아있다. 그 뒤로 치킨 소믈리에 콘테스트를 열고, 광고판 곳곳에 신춘문예 같은 N행시가 걸려있었다. 도처에 제품과 서비스를 알리려는 광고로 둘러싸인 곳에서 이 정도로 뇌리에 남아있는 정도라면 성공한 마케팅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최근에 창업자 김봉진과 저자가 대화하듯 만들어진 책을 읽었다. 우연한 사업 시작과 고군분투의 창업기를 들려주는 책이다. 책은 주제별로 잘 나누어져 있다. 저자인 홍성태 교수의 전공이 경영학이라 해당 학문의 관점에서 접근한 질문과 답변이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챕터 중간마다 유사 사례나 학문적인 개념도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대담 형태라 책이 술술 읽히는데, 무엇보다 내가 생각했던 이상의 기업을 구상하는 배달의 민족 창업자의 생각에 놀랐다. 1등 기업은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긴 호흡에서는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신생기업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던 배달의 민족(배민)은 앱에서 음식을 주문해서 배달해 주는 편리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소위 플랫폼을 조성하고 여기서 이익을 창출하는 기업이다.

그러나 창업자는 문화의 영역을 말하고 있다. 기업은 어떤 이미지로 각인되는가. 소비자는 무엇을 원하고 우리는 무엇을 제공하며 만들어가는가. 이러한 생각의 크기로 운영하는 기업이라면 적어도 현재에 안주하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최근에는 두 차례 좋지 않은 뉴스가 들려왔다.

하나는 독일 자본 딜리버리히어로에 인수되어 요기요와 자매회사가 된 것이다. 상호와 광고에 '민족'이 붙고 강조한 터라 이는 냉소적인 패러디를 양산했다. 우리는 게르만 민족이라거나, 민족을 버린 회사라는 등등.

다른 하나는 수수료 개편으로 인한 점주들과의 마찰이다. 코로나 사태로 호황을 맞은 대표적 기업이기도 한 배민에서 들고 나온 개편안은 소상공인들의 불만을 자극했고, 빠르게 이슈화되자 원점에서 검토하기로 한발 물러섰다.


이러한 뉴스 속에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플랫폼 업체가 새롭게 조성한 경제 생태계는 여전히 과도기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쇠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더 각광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엇비슷한 기능을 제공하는 업체들 가운데서 준 독점적 지위를 가져가는 곳이야말로 스스로의 경쟁력을 확보한 셈이다. 플랫폼은 사용자와 공급자가 모이면 모일수록 영향력이 배가되기 때문이다. 이미 배달의 민족이 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부정적 여론이 지속적인 여론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상, 해당 서비스가 제공하는 편의의 편익을 사용자들이 쉽게 놓아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수수료에 관한 것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버는 모습에 대한 비판이 많다. 수익모델에 관해서는 절반은 옳은 말이다. 영업장에서 제조한 음식을 사용자에게 중계하는 과정에서 수수료를 확보하는 사업 모델이다. 그런데 그 돈을 내는 사람들이 그냥 모이지는 않는다. 여기서 플랫폼 서비스는 생산과 소비 영역에 이익이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용을 한다. 그리고 이 서비스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간과하지만) 비용이 들어간다. 공공에서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검토한다는 뉴스가 있었고, 많은 이들이 수수료가 없거나 저렴한 공공앱의 등장을 환영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러한 공공앱의 존재를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들 업체들 역시 땅을 파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준독점 지위의 업체들은 더 나은 서비스나 혜택을 제공하며 성벽을 공고히 할 것이다. 나중에 정말 독점 상황이 다가오면 어떻게 하나. 테크 기업의 불안은 독점 상황에서도 쉽사리 가격 기준선을 올리기 어렵다는 데 있다. 여전히 많은 이용자가 이들의 자산이 될 테지만, 확실히 기술장벽은 점점 낮아지기 때문에 기업의 이윤 몫을 낮추거나 이용자의 이목을 끄는 홍보, 마케팅이 유효하게 작용한다면 기존 서비스는 언제든 훌훌 떠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배달의 민족이 '문화'에 관하여 생각한다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나름 신생기업이기에 내부적으로도 기업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이 이채로웠다. 이들이 기존과 다른 기업문화를 정착시키면 뒤따르는 기업에게도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레퍼런스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베끼고 모방하려는 패러다임의 전환까지도 염두에 둔다. 소비자의 로열티 확보에 관해서도 고민이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팬클럽이 형성되는 모습은 소비자가 구매 행위에 그치지 않고 홍보나 이벤트에 투사된 기업의 방향성에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충성고객, 단골 고객이 얼마나 확보하는가는 온라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동이 쉬운 이들이 정박할 수 있는 기준은 기본을 충족하면서 차별적이고 탁월한 서비스, 독자적인 브랜드를 제공하는 기업이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모여 '문화'를 구성한다고 가정한다면, '저절로' 형성되는 문화라는 것은 구조와 환경의 단위에서나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모종의 의도적인 배치와 노력이 우연한 사건과 시간대를 거치며 형성되는 '문화'는 이제 사회과학이 아니라 자본과 상품, 서비스가 오가는 비즈니스 영역에서 회자되고 있다. 누가 문화를 형성하는가? 문화에 대항하는가? 발맞추는가? 뒤처지는가? 이러한 분석은 다소 인상적인 수준에서 가늠하던 지난날과 달리 점점 구체적인 분석 틀과 지표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배달의 민족이 위와 같은 환경에서 어떤 기업으로 성장할 것인지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다만 초석을 잘 쌓아가고 있는 과정이고, 가끔은 흔들리거나 잘못되기도 했지만 창업자가 생각하는 기업의 비전으로 미루어보면 현재의 업태보다 더 확장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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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점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 김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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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논의되던 내용이었네요. 인간 수준의 인공지능은 여전히 연구될 것이고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비판에 대한 반론 챕터가 흥미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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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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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은 남성 독자라면 아래의 인용문에 스스로를 대입해서 읊조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평범한 40대 남자였다면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 나는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특히 아이가 있는 여자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실 출산과 육아의 주체가 아닌 남자들은 나 같은 특별한 경험이나 계기가 없는 한 모르는 게 당연하다.(p.170)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는 주인공 김지영씨의 일대기를 빠르게 훑어가는 일대기를 그린다. 본문 중간중간 각주가 달려있는데 흥미롭게도 각종 보고서나 연구결과 혹은 관련 서적이다. 가상의 김지영씨와 그녀를 둘러싼 가족의 일대기를 그리면서 여성의 삶을 아주 보편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실은 별 볼일 없는 한 편의 보고서가 탄생해야 하는데 흥미로운 소설이 되었다.

 

그녀의 삶은 멀리서 보면 나무랄 데 없이 평범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꽤나 험난하다. 에피소드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데 부딪치는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묻어난다. 유년기 부분에서는 주인공의 어머니 삶을 배치하면서 이 소설은 2대에 걸친 시대의 변화 속 여성의 삶을 묘사한다. 어머니는 남자형제들의 학비를 보조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는 전형적인 산업화시대의 여공이었다. 결혼 후에는 김지영 씨를 비롯해서 언니와 동생을 갖는데, 실은 둘째와 셋째 사이에 낙태의 경험이 있다. 요즘 화제에 오르는 EBS의 <까칠남녀>에서도 관련된 내용을 들었는데, 낙태를 하는 비율은 보통 미혼이 많을 거라는 통념과 달리 기혼이 더 높다고 한다.

... 성 감별과 여야 낙태가 공공연했다. 1980년대 내낸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 성비 불균형의 정점을 찍었던 1990년대 초, 셋째아 이상 출생 성비는 남아가 여아의 두 배를 넘었다. ... (p.29)

보편을 묘사하는 소설이 충격을 주는 지점은 이런 데 있다. 모든 중간값을 넣으면 지극히 평범해야 하지만 얼마나 많은 평범함을 우리는 모르고 사는 것일까. 소설이라는 분류표에 들어간 보고서는 이처럼 뜨악한 평범함을 그려낸다.

 

주인공의 성장기는 한국에서 여성이 겪을 수도 있는 문제들을 그린다. 특히 직장에서, 결혼 후 가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은 절절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김지영 씨는 어쩌면 복에 겨운 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녀를 잘 이해해주는 회사 동료와 상사. 그리고 남편이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다. 이런 환경에서도 어김 없이 마주하는 어려움은 결국 사회의 문제로 남는다. 직장에서 여성은 환영받지 못한다. 개인으로서의 여성은 결혼 후에나 출산, 육아기에는 일터를 떠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회사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성별에 따라 임금을 다르게 받는다. 핵심 업무는 점점 남성에게 집중되어 간다.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2014년 통계에 따르면, 남성 임금을 100만 원으로 봤을 때, OECD평군 여성 임금은 84만 4000원이고 한국의 여성 임금은 63만 3000원이다. 또 영국 <이코노미스트> 지가 발표한 유리 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조사국 중 최하위 순위를 기록해, 여성이 일하기 가장 힘든 나라롤 꼽혔다.(p.124)

결혼 후엔 2세를 얼른 보라는 주변 어르신들의 채근과 압박을 받고 임신을 하면서 직장을 포기한다. 육아를 하면서 동시에 부업을 알아본다. 공원에서 유모차를 세우고 벤치에 앉아 1,500원 짜리 커피를 마시는 자신을 향해 직장인들은 맘충 팔자가 상팔자라고 한다. 이쯤 되면 소설에서 그리는 한국의 여성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면서 가정법으로 퉁치기 무색해진다. 오히려 이 소설의 빠른 호흡때문에 실제 한국여성이 겪는 문제들은 많이 생략되어 있고,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너무 착하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인 김지영씨는 특별히 모나거나 별난 인물도 아니다. 그 반대로 무척 신중하고 조금은 내성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녀가 유별난 순간은 별안간 다른 인물로 빙의하는 이상증세를 보이는 때다. 이러한 그녀를 진단하는 40대 남성 정신과 의사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다'고 하면서 이 소설이 말하고픈 주제를 우회적으로 들려준다. 소위 미친 사람을 통해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이라는 것이 사실은 멀쩡한 여성들이 살아내고 있는 일상의 세상이라는 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주인공을 진단하는 의사의 삶을 짤막하게 실었다. 의사는 아내를 통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한다. 그러나 직장에서는 병원 운영을 고려해서 상담사의 후임을 미혼 여성으로 알아봐야 겠다고 생각한다.이를 통해 저자는 여성문제를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여전히 진행중인 문제라고 이중의 암시를 남긴다.

  나는 아내가 그보다 더 재밌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그거밖에 할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게 꼭 하고 싶어서 하는 일. 김지영 씨도 그랬으면 좋겠다.(p174)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p.175) 

 

사회문제는 한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성격의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가리지 않고 어떤 문제에 직면하는 개인은 그 문제를 짊어지고 있는 주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이 겪는 문제에서 이것은 사회적 문제라고 똑부러지게 골라내기는 어렵다. 이런 이유로 어떠한 문제제기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특수한 개인의 불만이나 잘못으로 치부하기 쉽다. 여성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만 봐도 이런 틀은 어김없이 작동한다.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에게 '꼴페미'나 '메갈'이라는 틀로 가두면 끝나버린다. 페미니즘은 큰 틀에서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별로 인한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불이익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에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 이런 주장에 많이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어떤 특별한 경험이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여성문제를 더이상 한 개인이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며 시대에 따라 모습을 달리했을지언정 보편적으로 여성에게(마찬가지로 남성에게) 사회적인 문제점으로 작동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이 소설이 인용하는 평범한 여성들(과 남성들)의 삶이 달라질 것이고 그 끝은 이렇게 달라질 것이다.

후임은 이 선생처럼 훌륭한 직원으로 알아봐야겠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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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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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책세상 독서단으로 활동하게 되어 서평을 남깁니다

 

공포. 우리는 어떤 대상과 현상을 알지 못할 때 공포의 감정을 갖는다. 동시에 호기심도 생긴다.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공포영화가 재현해놓은 상상력의 장막에서도 중요한 동력이 된다. 무서움을 피해 달아나면서도 무서움의 근원을 향한 호기심때문에 극은 갈등구도를 만들어낸다. 이미 알고 있는 자명한 어떤 것에 대해선 공포와 호기심이 아니라 좋고 나쁜 취향의 정도로 바라본다. 그런 면에서 현대까지 살아남은 공포의 대상과 현상들은 오롯이 미지의 영역을 품고 있다. 좀비 또한 그렇다.

이상하겠지만 좀비는 현재 사랑받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을 넘나들며 곳곳에 등장하는 중이다. 이쯤 되면 우리는 더이상 좀비를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색해진다. 어떤 좀비는 뛰어다닌다. 어떤 좀비는 사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좀비는 사랑한다. 이제 좀비는 단순한 언데드가 아니라 언데드의 특징을 가진 '인간'이 될 날이 머지 않은 것 같다. 이렇게 사랑받는 좀비는 어디서 온 것일까? 이런 물음에 힌트를 줄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좀비 연대기>이다.

총 12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선집을 통해 좀비 문학의 초창기 원형을 살펴볼 수 있다. 대다수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아이티, 부두교, 흑인, 노예.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성행하는 마술을 통해 죽은 이들을 살려낸다. 좀비라고 일컫는 이들은 주로 대형 농장에서 노예로 일하는 흑인들이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행동과 초점없는 눈을 가지고 있다. 소설이 사실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좀비의 기원은 아이티의 부두교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의 관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단편들은 좀비 이야기의 무대가 흑인 노예가 일하는 대규모 농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좀비이야기가 정착한 것도 당시 신대륙 미국에서 성행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 <장고>도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농장주와 노예, 자유민과 노예, 백인과 흑인으로 대표되는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소한다. 마찬가지로 당대의 좀비물은 이런 갈등을 공포스럽게 발설하고 있다. 사실상 언데드라는 특성을 제외한다면 좀비는 흑인, 주술사는 농장주에 자연스럽게 매칭이 된다.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제거되고 초점 없는 눈에 부자연스러운 몸동작은 현대 산업사회의 노동계층에도 적용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쯤부터 주술사가 통제하는 좀비라는 원형에서 벗어나 감염을 통한 전파를 선호한 것 같다. 사장님이 통제하기에는 이미 노동자의 숫자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저자들 중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은 잭 런던 뿐이었다. 흥미롭게 읽었던 글 또한 잭 런던의 <천년의 죽음>과 앨피어스 하이엇 베릴의 <좀비 감염 지대>였다. 이 두 작품의 세계관은 좀비가 현대에도 사랑받는 좀비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두 작품은 실험을 통해 좀비가 탄생되는 과정을 그린다. 특히 주술적으로 처리한 공포의 분위기를 과학적으로 바꾸면서 변용을 시도한다. 불로장생의 꿈을 가진 인간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미치광이 과학자는 열심히 연구한다. <천년의 죽음>에선 심지어 아들을 실험체로 쓰기에 이른다. 반면 <좀비 감염 지대>는 이성적인 과학자가 무척 진지한 자세로 연구를 진행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해부를 꺼릴 정도로 나름의 도덕적 기준도 확고하다. 이성적인 실험의 결과로 좀비들이 대거 만들어지지만 원치 않은 부작용은 소설 속에서 대충 해소해버렸다. 그러나 이 두 작품에 나오는 좀비가 과학적인 실험의 부작용때문이라는 상상력 덕분에 현재도 활발하게 재해석되고 있는 소재로 사랑받는다.

사랑받는 공포. 좀비의 원인에 대해서는 조금 더 과학적인 틀에서 해석하는 중이다. 대개 좀비물의 주인공은 좀비의 공격을 피해 좀비가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제거하려고 고군분투한다. 가까운 이들이 좀비가 되어가는 과정은 무척 슬프고 감내하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렇다. 우리는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좀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토록 무서운 공포의 대상은 죽지 않고 무슨 생각인지 모른 채로 오직 살아만가는 우리 사회의 욕망과 구조, 이를 오롯이 수행하는 우리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의 공포스러운 자화상을 보고서.

 

너무 피곤해, 너무 피곤해(p.255)

그들이 나를 찾아와서 살려낸 건 아주 오래전이야. 하지만 난 여전히 죽은 사람이야. 그들이 살려낸 건 육체뿐이지. 난 돌아가서 쉬고 싶어.(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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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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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상반기 책세상 독서단으로 활동하게 되어 서평을 남깁니다

 

이 책의 원제는 Collecting of Nothing이다. 부제는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는 광적인 인물에 관한 자서전의 표지 안에는 저자의 사진이 있다. 저자의 뒤로 납작하게 펴놓은 시리얼상자 박스가 셀 수 없이 많다. 이 사진만 봐도 엄청난 수집광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상상을 넘어서 있었다. 그가 모으는 목록은 소위 가치있는 것들이 아니다. 누구에게도 쓸모 없는 것들에 집착을 한다. 두 장에 걸쳐 저자가 모은 참치통조림 라벨의 목록이 있다. 생수브랜드 라벨이 다섯 장에 빼곡하다. 범상치 않은 저자의 수집벽은 멀리서 보면 괴짜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불편이 될 수도 있다.

 

수집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방식이다. 과거로부터의 대상물들이 현재에 수집되어 미래를 위해 보전된다. (p.66)

내 컬렉션은 나를, 나만을 반영한다. (p.202)

 

저자의 수집에 대한 정의에 따르면 수집의 행위는 시간축을 연결하는 일련의 행위가 된다. 뿐만 아니라 수집은 그 사람을 반영한다. 자서전에다가 자신의 수집벽에 관해 주절주절 써놓는다면 누가 반길 것인가. 공통의 관심사가 있는 사람이라면 강하게 이끌릴 수도 있다. 가령 책을 수집하는 내용을 쓴다면 적어도 장서가들의 눈을 잠시나마 머무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가 참치통조림 라벨이나 생수브랜드 라벨에 홀린듯이 관심을 보일까.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런 대목은 자서전에서 덜어내도 좋을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저자인 윌리엄 데이비스 킹의 삶에서 위의 쓸모 없는 것들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표현해주고 있다.

 

진지하게 읽자면 이 자서전은 한없이 복잡하고 산만하다. 저자의 인생곡선을 어림잡으려고 해도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 대목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정제되지 않고 방향성도 뚜렷하지 않는 저자의 이력서. 모든 인생이 목적을 성취해내는 삶이 아니고 결론을 향해 진행되는 드라마는 더더욱 아니다. 삶은 자꾸 삐걱거리고 인과관계가 불분명한 부조리극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많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자서전에서는 대개 정제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흡사 위인전 같은 각색이 이뤄지기도 한다. 독자로서는 위인전 스타일이 더 읽기 쉽고 무언가 남는 느낌이 든다. 아쉽게도 이 책을 읽고서 남는 것이 있느냐고 한다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겠다. 심지어 저자 또한 자신의 수집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 방대한 '컬렉션'은 나에게 부풀려진 자아감각을 선사했고, 나는 그 부풀림의 중심에 공기와도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식해야 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가진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것들. (p.358)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수집하면서 자아를 부풀렸다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대목은 잔잔한 울림이 있다. 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 온 수집벽은 부족한 자아감각을 보충해주는 것이었고, 이제는 떨쳐 버리지 못하지만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다. 자신의 삶은 수집과 함께였고 그것이 즐거움이자 커다란 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즐거움에 묻혀 살거나 짐을 내려놓기 마련이지만 이 둘을 함께 가지고 가는 저자의 모습은 위인의 모습이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잇고자 하는 현재의 마음가짐이 느껴진다.

 

너무 많은, 아무 것도 아닌 쓸모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수집왕의 삶은 매끄러운 결말이 없을 것 같다. 이런 저자의 삶에 찬성과 반대, 지지와 비판은 자유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 또한 기겁했을 것이다. 개인적인 선호를 떠나서, 그의 삶이 매끄럽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

 

이 모든 것을 어떤 식으로 끝낼 것인가? 나는 이 문장의 울림이 싫다. 최근 나는 나 자신을 수용하려는 마음을 그리고 이제 결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가면을 벗어던졌다.(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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