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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 비프케 로렌츠 장편소설
(392p /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나는 행복하다.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 과거에는 오점이 단 하나도 없으며 앞으로의 삶에 더이상 바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사소한 것이라도 부끄럽거나 창피했던 순간 하나쯤은 있다. 그리고 어떤 부분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우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적도 있었을 지 모른다. 좀 더 나은 과거와 그로 인해 더 멋진 현실을 살고 싶다는 생각, 지금의 지식을 간직한 채 과거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잘 하거나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나 혼자만의 공상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런데 이 좋은 것(?)을 실행에 옮긴 여자가 여기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샤를로타 마이바흐' 혹은 '찰리'. 부모님께서는 대학에서 경영학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아시지만 대학은 진작 때려치우고 '드링크스&모어'에서 일하며 지낸다. 아주 자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말이지. 물론 그녀의 부모님께는 비밀!
그녀의 첫사랑 '모리츠'가 동창회를 며칠 앞두고 그녀 앞에 나타났고, 동창회 자리에서도 그녀에게 매우 다정했지만 그 모든 것이 이자벨의 질투를 자극하기 위함이었단느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결국 그 동창회 자리에서 험한 꼴을 보이고 돌아선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하나 더 진하게 만들었을 때 그녀가 일하는 드링크스&모어의 사장이자 그녀의 친구인 '팀'의 코트에서 명함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그 명함은 헤드헌팅 회사의 명함이었지만 그 곳에서 냉대를 받고 돌아서는 길에 만난 한 여인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사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라는 제목을 보고 과거를 내 머릿속에서도 지우고 다른 이들의 머릿속에서도 지우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나는 기억을 지우기 전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는 설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만약 찰리가 지워진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는 설정이었다면, 기억을 지우기 전의 삶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이야기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설정으로 인해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했던 인생에 대해 정확히 전달이 되었던 것 같다.
작은 기억 하나가 바뀌면서 그로 인한 파장이 매우 크다. 기억 몇 개를 지웠더니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더 나아진 부분도 있겠지만 못견디게 힘든 부분들도 생기는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아니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장단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장단 중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게 될까?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자유로웠던 이전의 삶일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하고 모든 것이 나와는 다른 삶이지만 그것을 감수하며 억지로 끼워맞춰진 조각처럼 살아가는 삶일까?
과거를 지움으로써 자신의 인생은 달라졌지만 '찰리'는 '샤를로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고 내 삶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행복하지만 분명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은 기억쯤은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교 가는 길에 제대로 넘어져서 얼굴이 까진 적이 있다. 그것도 이마와 콧망울이... 피가 나서 양호실에 갔는데 세상에~ 양호선생님께서 '빨간약'을 발라 주신 것이다. 교실에 갔는데 그 빨간코가 얼마나 창피했던지 교과서를 펼쳐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마음에 아주 큰 상처가 되었다. 또 있다. 초등학교 시절 어디서든 반주를 맡아 하던 때였는데 조용한 순간에 악보가 건반에 떨어졌던 일이... 참 별 것 아니지만 얼마나 얼굴이 빨개졌었는지 모른다. 이 기억들을 나는 지우고 싶지만 만약 내가 반주를 했던 기억이 없어지고, 피아노를 계속 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품에 있는 삼형제들 또한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겠지? 기억을 지우고 얻게 된 새로운 삶은 적어도 '내 삶'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 일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2003년에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2012년에 레드박스에서 이미 출간되었던 소설이다. 이번에 표지도 바뀌고 다시 출간되었는데 가독성도 좋고 읽어볼만한 책인 것 같다. 간혹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이 있기도 하지만 찰리의 유쾌함과 팀의 조화, 게오르크의 의미심장함 등이 잘 버무려졌다. 심지어 모리츠와 이자벨도 말투나 행실은 참 밉상인데 또 웃긴 구석도 있고~ 대박은 하이케 ㅋㅋ게다가 찰리의 부모님은... 부모의 역할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잠시 하게 만드셨다. 은근 감동이랄까?
소설은 재밌게 잘 읽히지만 인생에 대한 진지함을 분명히 담고 있다. 웃으면서 읽고 있지만 그냥 웃으며 흘려보내기 힘든 그런 소설...
2012년에는 만나지 못했지만 2018년 현재 이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사람이 내린 단 한 번의 결정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거야." (p28)
" 내 생각에 행복은 늘 오늘에 달린 거 같아.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 가장 중요해." (66p)
" 너는 네 인생을 알아서 꾸릴 수 있는 충분한 나이야. 네 인생이라고. 너 말고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3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