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 연대기 - 유인원에서 도시인까지, 몸과 문명의 진화 이야기
대니얼 리버먼 지음, 김명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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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인류의 진화는 발전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나무에서 내려와 두 발로 서서 걷게 되면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불을 사용하고 도구를 만들 수 있게 된 인류의 시초는 지금 우리가 이렇게 편하고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양면적이다. 인류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그러니까 인류의 시초가 농사도 짓지 않고 수렵과 채집으로만 살아가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던 질병으로 고통 받으며 살아간다. 발전적이고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인류의 진화 속에서 우리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 몸의 구조와 기능이 왜 그리고 어떻게 지금과 같이 진화했는지에 대해 광범위한 연구를 진행한 진화 생물학자, 대니얼 리버먼은 «우리 몸 연대기»를 통해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과 한계를 밝힌다. 우리 몸은 현대의 식생활과 활동 부족에 잘 대처하도록 적응되어 있지 않다.(p. 38)”라고 말하며 그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쉽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에 대해 흥미로운 시각으로 접근한다. 평소 과학 교양서를 많이 읽지 않았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역사의 흐름을 통해 그는 우리가 왜(why) 이러한 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모든 사람과 모든 몸은 이야기를 갖고 있다. 당신의 몸은 실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갖고 있다. 하나는 당신의 인생, 당신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다. 누가 당신의 부모이고, 그들은 어떻게 만났으며, 당신은 어디서 컸는가, 그리고 인생의 어떤 우여곡절이 당신의 몸을 빚었는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진화 이야기다. 즉 수백만 년에 걸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우리 조상들의 몸을 탈바꿈시킨 일련의 긴 사건들이다. (p. 34)
 
   600만 년 전, 나무에서 살던 인류의 시초는 땅으로 내려와 두 발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직립 보행을 시작으로 인간의 신체는 인류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유인원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과정 속에서 적응하면서도 인류에게는 끊임없이 생물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진화의 길을 걸어오면서 인간은 직립하고, 다양한 음식을 먹고, 사냥을 하고, 다양한 식물을 채집하고, 오래 달리고, 음식을 요리하고 가공하고 나눠 먹게 되었다.(p. 222) 이 모든 과정에서 대니얼 리브먼은 인간의 몸이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예를 들면, 인류의 시초는 큰 턱과 튼튼한 어금니를 가지고 있었는데 식물 채집 과정에서 어려움을 느끼자 인류는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잘게 부숴먹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튼튼한 어금니의 크기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바탕으로 대니얼 리브먼이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물학적 진화보다 문화적 진화로 인해 우리가 현대에 흔히 앓고 있는 불일치 질환들이 유발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자극이 너무 많거나 부족할 때 또는 완전히 새로운 자극이 생겨난 환경 조건에 몸이 적응하지 못할 때 진화적 불일치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미 인간의 진화는 과거에서 멈춰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현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질병이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몸 연대기»는 우리 몸의 진화적 설계와 문명 간의 부조화로 인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한다.
 
   구석기 시대 이래로 얼마나 많은 자연선택이 일어났든, 지난 몇천 또는 몇백 년간 인간의 진화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진화는 자연선택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문화적 진화가 자연선택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빠른 힘이며, 지금까지 문화적 진화는 유전자가 아니라 환경을 바꿈으로써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바꾸었다. (p. 236)
 
   «우리 몸 연대기»을 읽다 보면, 다른 책에서는 보지 못했던 흥미로운 시각이 등장한다. 그동안 우리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인류 역사를 바꾼 사건으로 바라보며, 이 모든 것으로 하여금 인간의 생활의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켰다고 이해했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는 이 두 혁명에 대한 시험 문제를 위해 열심히 파고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몸 연대기»의 저자 대니얼 리버먼은 이 사건이 인류에게는 은총이자 저주로 바라본다. 안락한 생활의 첫걸음이 되어 버린 농업 혁명의 시작을 그는 진화적 불일치 질환을 유발시킨 인류 최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농업은 인간에게 풍족한 음식을 가져다줌으로써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를 수 있게 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일을 요구했고 식생활을 바꾸었으며 질병과 사회악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p. 226)”라며 대니얼 리브먼은 농업이 시작되기 전과 후의 삶을 비교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에너지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지 먹었던 수렵채집인은 다양한 영양소를 섭취한 반면, 수확량이 많은 몇 가지 주요 작물에만 집중했던 농부는 영양소 결핍 상태를 겪게 되고, 농작을 위해 모여 살면서 전염병의 위험에도 쉽게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공공 보건, 위생 시설, 교육이 눈부시게 발전하도록 만든 산업혁명 이후에는 이전에는 없었던 또 다른 불일치 질환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불일치 질환들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과거에는 드물었던 자극이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생기는 질환이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에너지 과잉이 유발하는 비만 관련 질환이다. (p. 348)
 
   만병의 근원이라고 일컬어지는 비만부터 시작해 당뇨병, 심장병, 골다공증, 매복 사랑니, 평발, 암 등 현대인의 질병을 어떻게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지 대니얼 리브먼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까지 덧붙여가며 쉽게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새롭고 유용한 지식들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비만(이라고 쓰지만 다이어트에 관한) 부분과 며칠 전 발치한 사랑니에 관한 기억 때문인지 매복 사랑니(, 신이시여! 제 사랑니들이 온전히 나온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에 관한 부분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게으른 현대인의 표본이나 다름없는 나에겐 다이어트에 대한 가장 논리적인 핑계의 부분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읽는 내내 나의 식생활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 끼니를 편하게 때우기 위해 패스트푸드 등을 자주 먹었던 나로서는 스스로 에너지를 과잉으로 축적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세계가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서 최선이 아니듯이, 우리 몸도 가능한 모든 몸 중에서 최선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몸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 몸을 즐기고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 우리 몸의 과거는 더 적합한 자의 생존이라는 과정이 만들었지만, 그 몸의 미래는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p. 511)
 
   앞으로 인류의 미래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니얼 리버먼이 «우리 몸 연대기»를 통해 인류 진화사부터 문명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내용을 쉽고 체계적으로 정리해 그 답을 이미 제시했다. 내 몸을 일구지 않으면 안 된다.(p.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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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의 결심 -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은모든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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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N 드라마 <혼술남녀>에는 저마다의 이유로 '혼술'을 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내가 혼술을 하는 이유는, 진심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픔을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 삭히는 것이, 이렇게 혼자 마시는 한 잔의 술이 더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난 이렇게 혼술을 한다." 주인공들이 '혼술'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술'이라는 것이 주인공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술은 혼자 마셔도, 누군가와 함께 마셔도 매력적이다. 혼자 마시면 술에게 위로를, 같이 마시면 상대방에게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2018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애주가의 결심》은 '술'에 대하면 빠지지 않는 주희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조금 더 깊게 보면, 주희를 중심으로 하여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망하는 30대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20대에는 어떤 목표라도 실행할 수 있는 패기와 열정으로 버텼지만, 서른을 앞둔 주희는 그 앞에서 현실과의 타협을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자신에게 1년간의 휴식 시간을 선사한다.

  어떤 술은 목 넘김이 부드러운 게 매력적이라면 독주는 혀에서 목 안쪽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찌릿함이야말로 매력의 원천이다. 나는 홧홧한 속을 개운한 국물로 달래고 다시금 슬쩍 독한 술 한 모금을 흘려 넣었다. 비록 혼자 마시는 게 아쉽기는 하지만 짧은 이사의 마무리로 이 이상의 선택은 없을 것 같았다. (p. 38)

  《애주가의 결심》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소설의 화자 주희는 꿈과 현실에 놓여 고민하는 청춘을 그대로 대표하고, 주희의 사촌 언니 우경과 술친구 배짱은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열렬하게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특별하지 않은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위로하는데, 그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스스로에게 금주령을 내린 우경은 퇴근 후 편의점이나 드럭 스토어에서 군것질을 쓸어 오거나 인터넷 쇼핑을 하며 낙을 찾고, 술을 좋아하는 주희와 배짱은 망원동의 술집들을 찾아다니며 즐거움을 느낀다.
 
  활력이 넘치는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그들이 함께 웃는 시간의 유효기간에 대해 몽상했다. 몇 해 뒤에는, 혹은 고작 일이 년이 지난 뒤에는 지금 한자리에 모여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가 소원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이 그들의 인생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누군가의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한때를 스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p. 82)

   《애주가의 결심》은 주희를 중심으로 사건 전개가 이루어지지만 극적이지는 않다. 잔잔한 흐름으로 진행되는 사건 전개는 마치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을 연상시킨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드라마처럼 은모든 작가는 《애주가의 결심》의 주인공들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따뜻한 온도로 데워 놓은 사케처럼. 그래서 주인공만큼이나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그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한편, 술과 적절한 안주의 조화를 중요시 여기는 주희를 통해서 독자들은 다양한 술 종류와 적절한 안주를 접하게 된다. 은모든 작가는 술과 음식에 대해 굉장히 세밀하고 섬세한 묘사를 하며, 독자들은 읽는 내내 주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묘사로 인해 밤에 읽기에는 너무 배고픈 소설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이가 있다는 즐거움이 그대로 전해져 그 부분을 읽는 내내 즐겁다.

  적당히, 기분 좋게, 하고 나는 되뇌었다. 세상에는 무한한 매력을 가진 술이 넘치고 양옆에는 그 매력을 오래도록 함께 들여다보고픈 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얼마든지 적당히,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취한 상태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지만 기분 좋게 취하는 일 자체를 포기할 이유도 없다. (p. 243)

  꿈과 현실이 달라 힘들어도 함께 즐겨줄 이가 있다면 마냥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술에게 위로를 받는 것도 좋지만, 함께 마셔주는 이들과 한바탕 호탕하게 웃어넘기는 것도 위로가 된다. 잔을 맞부딪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따뜻한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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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스티드 캔들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1
에드거 월리스 지음, 양원정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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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아 온 고전 작품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내려오면서 새로운 작품의 원천이 된다. 고전 작품들은 수많은 독자들에게 때로는 묵직하고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깨달은 인간 본질에 대한 고찰론을 펼치는 수단이 된다. 아무튼 수많은 독자들이 고전을 찾아 읽는 데에는 그만큼의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고전을 찾아 읽는 이유는 고전 작품에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도 있는 인간의 심리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킹콩>의 원작 초안을 쓴 에드거 월리스의 작품 《트위스티드 캔들》은 인간의 심리를 단순하지만 심도 있게 추리 소설의 소재로 이용한다. 에드거 월리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바탕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주인공 존 렉스맨이 가진 '두려움'은 이 소설의 사건이 진행되는데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한다.

  "그는 비상한 데가 있는 사람이오." 카라가 말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기가 절대 먹히지 않을 사람이지."
  홀랜드 양이 흥미롭다는 듯 카라를 쳐다보며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무기라니요?"
  "두려움." 카라가 말했다.
 (p. 118)

  추리 소설가 존 렉스맨은 바싸랄로라는 인물로부터 의문의 협박 편지를 받게 된다. 지인인 레밍턴 카라에게 협박 편지에 대한 조언을 구하게 되고, 얼마 뒤 총을 들고 바싸랄로를 만나러 가게 된다. 그러나 뜻밖의 사고로 존 렉스맨은 의문의 살인 사건에 휘말려 수감자 신세가 된다. 렉스맨의 친한 친구인 런던 경시청 경찰국장 티엑스 메레디스가 그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렉스맨은 사면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사면이 선고된 날, 존 렉스맨은 탈옥하여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한편, 티엑스는 존 렉스맨의 지인인 레밍턴 카라와 렉스맨의 사건이 관련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되고 레밍턴 카라의 주변에서 그를 조사한다. 티엑스가 카라를 향해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을 때, 갑자기 카라가 죽은 변사체로 발견되며 사건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빠진다.

  티엑스는 카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는데, 죽은 카라의 얼굴은 공포에 얼어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티엑스는 시선을 돌려 천천히 방을 수색했다. 그리고 카펫 한가운데에서 단서를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크리스마스트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구부러진 작은 꽈배기 양초였다. (p. 170) 

  코난 도일, 애거서 크리스티와 동시대에 사랑받은 추리소설 작가인 에드거 월리스는 《트위스티드 캔들》에서 고전 추리소설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의문의 살인 사건과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경감)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많은 고전 추리소설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연상시킨다. 이 단순한 구도 속에서 에드거 월리스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인물들에게 생동감을 부여한다.
  존 렉스맨과 티엑스 메레디스를 통해 선을, 카라를 통해 악을 표현하며 "언제나 정의는 살아있다."의 결말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현대 추리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반전을 위해 선과 악을 오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피로했다면, 에드거 월리스의 고전 추리소설은 완전하게 분리된 선과 악으로 혼란스러움을 막아준다. 인물에 대한 기본적인 파악이 끝난다면, 오로지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티엑스는 책상 서랍 속에 스스로 '스캔들 모음집'이라고 이름 붙인 작은 빨간색 노트를 삼중 자물쇠로 채워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틈이 날 때마다 이 빨간 노트에 흥미로운 단서들을 적어 놓았는데, 공식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으나 사건을 조사하다가 놓친 실마리를 밝히는 데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사실, 티엑스는 어떠한 정보도 소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수첩 여기저기에다 다소 난잡하게 메모해놓았다. (p. 96)
 
  렉스맨을 통해서 인간이 가진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카라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추악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트위스티드 캔들》로, 고전 추리소설의 미학을 느껴보는 시간을 가졌다. 추리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선, 가끔은 클래식한 작품을 읽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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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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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은 세바스찬의 피아노 연주로 채워진다. 우연히 사랑했던 미아를 다시 만나게 된 세바스찬은 그녀와의 일을 회상하며 그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을 다시 기억한다. 피아노 선율에 따라 진행되는 세바스찬의 기억들은 오로지 그의 것이며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미아를 향한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건반 하나하나 누르며 그는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토해낸다. 그녀를 향한 마지막 피아노 연주에 그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다시는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없는 그 순간에.
  
  지난 삼십 년간 끊임없이 피아노를 연주해 왔고, 피아노가 내 몸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는 모든 감정을 완벽히 담아낼 수 있는 악기였다. 슬픔, 행복, 환희, 회한, 비탄. 어떨 때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담기기도 했다. (p. 310)

  그리고 세바스찬처럼 피아노에 모든 감정을 실어 나르는 이가 또 하나 있다. 매트 헤이그의 장편 소설 《시간을 멈추는 법》의 톰 해저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늙지 않는 병에 걸린 그는 43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악기에 위로받아왔다. 그런 그가 유독 좋아하는 악기는 다름 아닌 '피아노'였다. 4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의 모든 감정들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악기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딱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그 순간,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니까.
  매트 헤이그는 '늙지 않는 병에 걸린 주인공'이라는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절절한 사랑을 그린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처럼 매트 헤이그는 톰 해저드라는 인물을 통해 시간을 넘나든다. 톰 해저드의 기억에 기반한 과거와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점을 오가며 서술하는 방식을 이용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한편,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시간적 차이에서 오는 절망감과 괴리감을 한 번씩 겪는데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적 흐름에서 오는 차이에 불편함을 느낀다.) 톰 해저드 역시 그런 감정들을 겪는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싫었다. 죽을 만큼 외로웠기 때문이다. 이건 보통 외로움과 차원이 다르다. 사막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아는 사람들을 속속 잃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 자신마저 잃어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과 함께 했을 때의 나를 잃어 가고 있다고. (P. 53)

  《시간을 멈추는 법》은 주로 톰 해저드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을 설정하여 매트 헤이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사랑, 결혼, 사고방식, 불멸, 자비 등의 주제를 깊이 파헤친다. 그 속에서 톰 해저드는 밀려오는 슬픔에 절망과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톰은 자신의 긴 시간을 끝낼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죽음은 눈 깜짝할 새 벌어진다. 삶과 마찬가지로. 그냥 눈을 감고 헛된 두려움을 흘려버리면 된다. 공포에서 해방되고 난 뒤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 의심 없이 살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골탕 먹을 걱정 없이 한껏 친절할 수 있을까? 상처받을 걱정 없이 한껏 사랑할 수 있을까? 내일 걱정 없이 오늘을 만끽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속 앗아갈 무정한 시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p. 480)

  끊임없이 과거에 얽매였던 톰은 뜻밖의 인물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시간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다. '순간' 이 곧 '영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그는 주어진 순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는 '사랑'을 택한다. 사랑하는 모든 순간은 그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테니.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p. 454)

+
  《시간을 멈추는 법》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로 제작이 확정된 작품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 읽고 작품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톰에게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보여줬던 베니의 모습을 모두 투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베니가 맡은 캐릭터 중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이 가장 많이 오버랩 되었다.) 다 읽고 나니 베니랑 정말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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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 2 - 열두 명이 사라진 밤, 김영탁 장편소설
김영탁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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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하고자 (주인공 우환에게는 현재인) 미래로 가는 배에서 뛰어내린 우환은 어떻게 되었을까? 빠른 속도로 《곰탕 1》을 읽은 나는 바로 《곰탕 2》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책을 구매할 때, 모두가 1권과 2권을 한꺼번에 준비하라고 일렀다.) 《곰탕 2》에서는 꿈꾸는 목표가 생긴 우환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살인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부산 경찰들의 이야기가 함께 전개되었다.
  아무래도 모든 초점이 배에서 뛰어내린 우환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모든 전개는 우환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곰탕 비법'이 아닌 '가족, 행복'에 집중하고 있는 우환에 따라 소설의 내용은 후자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소설의 제목만큼 곰탕이 중요하지 않아졌다.

  당신은 알았어요. 이미 그때 당신은 변한 겁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예요. 어떻게든 여기서, 이 현재에서 살고 싶었던 겁니다. 어떻게든 행복해지고 싶었던 거에요. (p. 102)

  (타인에게는 현재인) 과거에 머무른다면 자신의 외로움의 근원인 부모와 함께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우환은 다시 곰탕 가게로 돌아온다. 그러나 (우환에게는 현재인) 미래에서 온 사람 중 하나인 박종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래의 기억으로 새로운 부를 축적하고 살아가고자 하며, 그 계획의 일부를 우환을 중심으로 세운다. 박종대의 계획대로 실행하던 우환은 문득,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에게 타인의 일은 모두 이벤트였다. (p. 84)

  《곰탕 2》에서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중요치 않은 인간상이 그려진다. 과거에서 행복하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배의 문을 연 우환으로 인해 미래로 돌아가려던 열두 명의 사람은 익사하게 된다. 미래에서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과거에서 모든 지위를 가지고자 하는 박종대는 과거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들의 신분을 얻으려고 한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일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우환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고 다시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으로 하여금 열두 명의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도, 자신이 과거에 머물기 위한 이유로 사라져야 했던 사람들의 존재를 하나씩 깨닫던 우환은 비로소 다시 행복으로 가는 길을 깨닫게 된다. 독자들은 우환이 깨닫는 과정을 오랜 시간 진하게 우려내야 하는 곰탕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곰탕처럼 따뜻하게 소설이 끝난다.

  고아원에 있는 동안에도 우환은 부모를 기다려본 적이 없다. 막연하게라도 언젠가는 부모가 데려갈 거다,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랬는데, 지금, 우환은 순희를 기다리고 있다. 
  무리를 했다는 것이, 자신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부담이 되고 있었다. (p. 55)

   《곰탕 2》를 읽으면서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곰탕 1》에서 뿌렸던 떡밥을 모두 회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곰탕의 비법을 찾아서 떠난다는 참신한 설정은 후반부로 갈수록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면서 조금씩 루즈해지기 시작했다. 미래와 과거, 시간여행이라는 공상적인 설정을 했으니 레이저 총, 남의 얼굴을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이식할 수 있는 수술 기술 등의 소재를 사용하는 것도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의 배경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우환이 왔다는 2019년의 배경은 마치 우리가 1990년대로 간 듯한 느낌을 자아냈다.)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따뜻한 가족애만큼은 김영탁 감독만의 감성을 담아 잘 표현한 것 같다. 영화 <헬로우 고스트>만큼의 감동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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