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은 세바스찬의 피아노 연주로 채워진다. 우연히 사랑했던 미아를 다시 만나게 된 세바스찬은 그녀와의 일을 회상하며 그 열렬히 사랑했던 순간을 다시 기억한다. 피아노 선율에 따라 진행되는 세바스찬의 기억들은 오로지 그의 것이며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미아를 향한 그의 마음을 나타낸다. 건반 하나하나 누르며 그는 그녀에 대한 모든 기억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토해낸다. 그녀를 향한 마지막 피아노 연주에 그는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다시는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없는 그 순간에.
  
  지난 삼십 년간 끊임없이 피아노를 연주해 왔고, 피아노가 내 몸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아노는 모든 감정을 완벽히 담아낼 수 있는 악기였다. 슬픔, 행복, 환희, 회한, 비탄. 어떨 때는 그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담기기도 했다. (p. 310)

  그리고 세바스찬처럼 피아노에 모든 감정을 실어 나르는 이가 또 하나 있다. 매트 헤이그의 장편 소설 《시간을 멈추는 법》의 톰 해저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늙지 않는 병에 걸린 그는 430년 이상을 살아오면서 여러 악기에 위로받아왔다. 그런 그가 유독 좋아하는 악기는 다름 아닌 '피아노'였다. 430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오면서 그의 모든 감정들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악기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딱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그 순간, 말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전해지니까.
  매트 헤이그는 '늙지 않는 병에 걸린 주인공'이라는 굉장히 흥미로운 설정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시간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절절한 사랑을 그린 오드리 니페네거의 <시간 여행자의 아내>처럼 매트 헤이그는 톰 해저드라는 인물을 통해 시간을 넘나든다. 톰 해저드의 기억에 기반한 과거와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시점을 오가며 서술하는 방식을 이용해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한편, 남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시간적 차이에서 오는 절망감과 괴리감을 한 번씩 겪는데 (대부분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적 흐름에서 오는 차이에 불편함을 느낀다.) 톰 해저드 역시 그런 감정들을 겪는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싫었다. 죽을 만큼 외로웠기 때문이다. 이건 보통 외로움과 차원이 다르다. 사막 바람처럼 스며드는 그런 외로움이었다. 아는 사람들을 속속 잃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나 자신마저 잃어 간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과 함께 했을 때의 나를 잃어 가고 있다고. (P. 53)

  《시간을 멈추는 법》은 주로 톰 해저드를 통해 인간의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 볼 수밖에 없고, 그들을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을 설정하여 매트 헤이그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사랑, 결혼, 사고방식, 불멸, 자비 등의 주제를 깊이 파헤친다. 그 속에서 톰 해저드는 밀려오는 슬픔에 절망과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공허함을 채울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인다. 톰은 자신의 긴 시간을 끝낼 순간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죽음은 눈 깜짝할 새 벌어진다. 삶과 마찬가지로. 그냥 눈을 감고 헛된 두려움을 흘려버리면 된다. 공포에서 해방되고 난 뒤엔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나는 누구인가? 아무 의심 없이 살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골탕 먹을 걱정 없이 한껏 친절할 수 있을까? 상처받을 걱정 없이 한껏 사랑할 수 있을까? 내일 걱정 없이 오늘을 만끽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속 앗아갈 무정한 시간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p. 480)

  끊임없이 과거에 얽매였던 톰은 뜻밖의 인물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시간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진다. '순간' 이 곧 '영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 하나로. 그는 주어진 순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는 '사랑'을 택한다. 사랑하는 모든 순간은 그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갈 테니.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p. 454)

+
  《시간을 멈추는 법》은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로 제작이 확정된 작품이다. 이 이야기를 먼저 읽고 작품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톰에게 그동안 많은 작품에서 보여줬던 베니의 모습을 모두 투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베니가 맡은 캐릭터 중 닥터 스트레인지의 모습이 가장 많이 오버랩 되었다.) 다 읽고 나니 베니랑 정말 잘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