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돌이 푸 - 디즈니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 원작 에프 클래식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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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상의와 꿀단지를 들고 미소 지으며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고 이야기하며 많은 어린이들의 친구가 되어준 곰돌이 푸. 디즈니의 색이 입혀진 곰돌이 푸는 여전히 어른이고 아이이고 할 것 없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럼 백 에이커 숲에 사는 진짜 곰돌이 푸는 어떤 친구일까?
  그 어느 때보다 부담이 없었던 독서는 오랜만이었다. 200페이지도 안되는 얇은 두께의 《곰돌이 푸》는 저자 앨런 알렉산더 밀른이 잠자리에 드는 아들 크리스토퍼 로빈 밀른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책이다. 곰돌이 푸는 제외한 나머지 백 에이커 숲속의 친구들은 모두 크리스토퍼 로빈 밀른이 가지고 놀던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하였고,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백 에이커 숲은 주말이나 휴가철마다 놀러 가던 애시 다운 근처 농장 숲을 바탕으로 썼다고 한다. 그래서 《곰돌이 푸》를 읽는 내내,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물론, 그 따뜻한 마음은 백 에이커 숲에 사는 친구들에게까지 전해져 보는 내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즐겁게 지내는 것 말이야. 노래하고 춤추고.
뽕나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즐겁게 노는 거.


  백 에이커 숲은 언제나 즐겁다. 곰돌이 푸는 숲을 거닐면서 항상 어떤 노래를 부를지 고민한다. 때로는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흥얼거리기도 하고, 더 신나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흥이 많은 곰돌이 푸 덕분에 백 에이커 숲은 언제나 노래로 들썩인다. 

  곰돌이 푸, 피글렛, 이요르, 토끼, 올빼미, 캥거와 루, 그리고 크리스토퍼 로빈까지.(아쉽게도 원작 《곰돌이 푸》에서는 티거가 등장하지 않는다.) 엉뚱하고 순진한 곰돌이 푸와 함께 백 에이커 숲속 친구들을 만나보면 순수한 그들의 모습에 함께 즐거워진다. 종종 "저런, 바보 곰 같으니라고!"라는 말을 크리스토퍼 로빈에게서 들어도 그 누구도 푸를 나무라지 않는다. 모두들 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백 에이커 숲속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네.


《곰돌이 푸》를 읽으면서 푸의 엉뚱하고 순진한 모습에도 귀여움을 참을 수 없었지만, 가장 눈길이 갔던 캐릭터는 이요르였다. 늘 구시렁거리는 당나귀 이요르는 가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며 생각지 못한 반응을 보인다. 이요르의 생일 선물을 위해 풍선을 들고 달려오던 피글렛이 넘어지면서 풍선이 터지게 된다. 이요르에게 완벽한 선물을 주지 못하는 피글렛이 미안한 마음으로 풍선 조각을 건네는데, 이요르는 원래 그것이 어땠는지 피글렛에게 물어본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이네.", "어쩐지 그것도 그럴 줄 알았어. 전에 피글렛만 했던 거구나. 그것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크기네. 저런, 저런."이라고 대답하며 피글렛이 건넨 풍선 조각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낀다. 지금 모습이 어떻든 간에 이요르에게 풍선 조각은 소중한 친구 피글렛이 준 '생일 선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어떤 것에도 편견이 없는 백 에이커 숲속의 친구들의 이야기는 동심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한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 부르고 즐거웠던 모습, 작은 것에도 큰 즐거움을 느끼던 그때의 모습들이 절로 떠오르면서 《곰돌이 푸》를 읽는 동안에는 순수해지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백 에이커 숲속 친구들 안녕!

  반짝이는 재치와 유머, 천진난만한 동심과 우정, 엉뚱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하나하나의 캐릭터, 그 속에서 거부감 없이 전달되어 오는 가슴 따뜻한 메시지…….  오히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전해지는 것들이 더 많이 않을까. (p.174 '옮긴이의 말' 중에서)





  "푸야, 너는 아침에 일어나면 맨 처음 생각하는 게 뭐야?"
  "아침으로 뭘 먹을까 하는 생각."
  .
  .
  "피글렛 너는 뭔데?"
  "나는 있지…… 오늘은 또 어떤 신나는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곰돌이 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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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리기의 기적 - 생각을 멈추고 여유를 찾는 뇌의 비밀
스리니바산 필레이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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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쓰려고 거의 한 시간 동안 애를 쓰고 있지만 진척이 전혀 없다고 치자. 그렇다면 펜을 내려놓거나 컴퓨터에서 떨어져라. 그런 다음 뜨개질을 하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손톱 정리를 하는 등 힘들지 않은 활동을 선택한다.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한 활동에 몰두하고, 논문 작성에 진척이 없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좌절을 자기 대화로 씻어 버린다! 자신에게 이 짧은 휴식을 선물하고, 문제의 논문으로 곧 돌아가기 위해 쉬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p. 94)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서평 쓰기를 앞두고 나는 항상 고민에 빠진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온전히 나만의 글을 쓰고 싶은 그 욕구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한다. 그 고민의 구렁텅이에 빠지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적절한 첫 줄을 쓰지 못해 좌절감에 자주 빠진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 글의 첫 줄을 쓰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카페를 찾아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화면을 죽어라 노려봤다. 첫 줄도 쓰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 결국, 밤이 되어서야 글의 첫 도입부를 써 내려간다.

《멍 때리기의 기적》을 갓 읽어서 그런지 아직 그 습관이 몸에 배지는 않았나 보다. 다년간 뇌 과학을 연구해 온 하버드대 정신과 교수 스리니 필레이는 저서 《멍 때리기의 기적》을 통해 뇌의 비집중 모드가 가지는 가치를 설명한다. 나처럼 글을 쓰거나 학업에 매진할 때 우리는 '집중! 집중만이 살길이다!'를 외치며 뇌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 물론, 집중의 힘이 발휘되면 정확하게 목표를 조준하면서 사고와 감정, 행동을 통합해 임무를 수행하고 완수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들은 과유불급이다. 과잉 집중은 먼 미래에 일어날 상황의 중요성을 축소화시키거나 배려의 상실을 야기한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떤 경험이든 뇌 발달에 기여한다. 곧고 좁은 길에서 벗어나면 예기치 않았던 통찰을 얻고, 같은 주제에 대해서라도 새 관점에서 바라보고 열정을 추구하는 정신력을 얻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질을 형성할 수 있다. (p. 17)

스레니 필레이 교수는 우리에게 '비집중 모드'가 필요하다고 한다. 하나의 목표에 집중해 주변을 살필 수 없는 집중과는 다르게 비집중은 멀고 넓은 곳까지 비춰 주변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니까 잠을 자는 동안에도 20%의 용량을 사용하는 뇌에게 집중이 아닌 휴식(비집중)은 더 나은 창의성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비집중 네트워크(DMN, Default Mode Network)를 활성화시키는 동안 뇌는 충전하고 조정해서 필요할 때 창의성을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 침착해지고 혁신으로 향하며 자아감이 강화된다.

비집중은 지적인 형태의 내려놓음이다. 비집중은 사고를 유연하게 해주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항복할 수 있게 해준다. 다음 단계의 사고로 움직일 수 있는 마찰 없는 구역을 제공하고, 자기 본연의 모습과 더욱 깊이 연결시킨다. (p. 59)

《멍 때리기의 기술》을 통해 스레니 필레이 교수는 뇌가 가지고 있는 '인지 리듬'에 대해서 설명하며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중 회로와 비집중 회로 간의 조화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습관, 불확실성, 집중 중독, 집중 재발 등의 과잉 집중을 요하는 행위들이 오히려 인지 리듬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인지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몽상, 마음 방랑, 상상, 공상, 자기 대화, 몸 사용, 명상 등의 비집중 모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는 총 6장에 걸쳐 정확히 어떤 비집중 모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양한 연구 사례와 흥미로운 예시를 이용해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한다. 




창의성을 개발하고 영감에 항복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내려놓는 기술이다. 잠시 길잡이로 삼았던 외부 세계에서 벗어나 내면에 있는 주의의 흐름에 주목한다. (p. 73)

《멍 때리기의 기술》을 읽다 보면, '앞만 보고 달려라!'는 결코 옳은 생각이 아니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2년 전, 공모전을 준비했던 때가 생각났다. 최고까지는 아니지만 최선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팀원들과 카페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곰곰이 생각했다.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라는 팀원의 말에 모든 신경을 노트북에 집중해 검색하고 또 검색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잉 집중 때문에 인풋이 들어가도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 아웃풋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을 비우고자 잠시 화장실로 향했는데, 그때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주변만 둘러보았다. 그렇게 모든 볼일을 마치고 마지막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아!'하고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돌아가는 길엔, 잊어버리지 않도록 중얼중얼하며 모든 신경을 그곳에 쏟아부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결코 최선의 결론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것이 가장 최선이었다. 그때부터 팀원들과 나는 생각이 막힐 때마다 "해우소 한 번 다녀와!"라며 농담을 던지며 공모전을 마무리했다. 

뇌는 마술사처럼 모자에서 새롭고 분명한 기능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만지작거리는 과정을 거치며 발달한다. 우리는 진화를 거치며 뇌를 만지작거려 개발하는 비집중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p. 300)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창의성을 깨우는 방법에 대해 《멍 때리기의 기적》은 뇌가 가진 특성을 기반으로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집중 모드'를 실천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멍 때리기의 기적》을 통해 정확한 뇌 사용법을 알아냈으니 이제 그것을 내면 깊이에서 더 끌어올려 실천하기만 하면 된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에겐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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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시선 - 합본개정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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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리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책장을 넘긴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책의 두께감에 눌려 선뜻 손을 뻗기는 어려웠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흡입력 있는 빠른 전개 속도에 빠져들었다. 미국 3대 미스터리 문학상으로 꼽히는 에드거상, 셰이머스상, 앤서니상을 최초로 모두 수상한 작가 할런 코벤의 《단 한 번의 시선》은 그렇게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1,2권으로 분권이 되어있던 책을 합본으로 개정하여 다시 펴낸 책이었는데, 어쩌면 출판사의 그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한 번 집어 들면, 다시는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소설이다.


  "당신이 맞는 것 같소."
  "뭐가요?"
  "아까 했던 말 말이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스콧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환상을 갖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소." (p. 22)

  검찰청에서 일하는 스콧 덩컨은 어느 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마 몬티 스캔런의 면회 신청을 받고 그를 찾아온다. 스캔런은 스콧에게 십오 년 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고백한다. 사고라고 종결된 스콧의 누나에 대한 죽음에 대해 스캔런은 사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받은 의뢰로 그녀를 죽였다고 자백한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그레이스는 남편 잭과 두 아이와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다. 평소 사진 찍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사진 현상소에 들러 현상된 사진을 받아들고 두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찾아간다. 아이들을 기다리면서 현상된 사진을 확인하던 그레이스는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된다. 네 명, 아니 구석에 있는 한 명까지 다섯 명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던 그레이스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던 사진 속 인물 중 금발머리 여자 얼굴 위에 커다란 엑스 표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남편 잭의 모습이 그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도. 그레이스는 남편에게 이 사진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만 자신이 아니라고 얼버무리던 남편 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된다. 

  공간. 잭은 분명 공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공간이 필요하다는 게 어색하고, 짜증나고, 모호한 핑계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더 견딜 수 없다는 끔찍한 완곡어법만큼이나 무의미한 말이었다. 만약 그런 의미로 한 말이라면 적어도 단서는 될 수 있었겠지만 이 경우엔 달랐다. (p. 108)




어쩌면 우리는 모든 진실을 알면 안 되는 건지도 몰라.
어쩌면 진실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닌지도 모르지.

  평온한 일상에 우연히 날아든 사진 한 장은 그레이스의 끝없는 추락을 예고했다. 할런 코벤은 거미줄같이 촘촘한 인물관계를 설정한 뒤 잘 짜인 퍼즐 조각들을 독자들에게 흩뿌린다. 그레이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건에서 독자들은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보다 많은 인물의 수에 처음에는 혼란스럽지만 이내 생동감 있게 살아있는 인물들 틈에서 함께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게 된다. 가독성이 높은 할런 코벤의 소설은 독자들을 꽤나 깊게 소설 속으로 끌어당긴다. 
  일상을 바꿔버리는 사건 하나로 시작된 《단 한 번의 시선》은 결말로 향할수록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그레이스와 스콧은 물론이고,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추락시킨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달려든다. 인물들 간의 겹겹이 쌓인 오해 속에서 왜곡된 기억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할런 코벤은 침착하게 그 진실을 풀어나간다. 그가 마지막에 풀어 놓은 사건의 진실을 아는 순간, 전혀 생각지 못한 사실에 조금은 놀라기도 했다.

  "난 당신이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합니다, 베스파 씨. 진실을 들을 때가 온 거란 말입니다. 이제 이 모든 건 여기서 끝을 맺어야 합니다. 바로 오늘. 그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난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과거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걸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고 난 뒤 날 어떻게 처리할지는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p. 465)


인간은 계획을 세우고, 신은 비웃는다.



그레이스는 진실을 덮기 위해 누군가 철두철미하게 세워 둔 계획을 모두 알게 된다. 그 계획을 모두 밝힌 그녀는 혼란스러움을 잠재울 수 없게 된다. 할런 코벤은 그레이스와 함께 혼란스러운 독자들에게 마지막 또 다른 반전을 선사한다. 모든 것이 밝혀진 마당에, 편하게 긴장의 끈을 놓자마자 뭔가에 세게 맞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역시 스릴러 소설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녀는 그를 그려보고 싶었다. 존도, 셰인도 아닌 잭을 그려보고 싶었다. 왠지 혼란스럽고, 망설여질 것 같았지만 막상 캔버스 앞에 앉으니 붓이 절로 춤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의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p. 574)

  《단 한 번의 시선》을 다 읽고 나서, 할런 코벤의 또 다른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색해보니 그의 소설은 대부분 5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두께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아마 또다시 더운 여름밤, 서늘한 스릴러가 읽고 싶어진다면 나는 주저 없이 할런 코벤의 작품을 집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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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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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모던 타임스>였다. 불륜을 의심하는 아내로부터 고용된 수염 남자에게 고문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던 <모던 타임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아내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아내를 무서워하는 마음 아래에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당신, 용기는 있나?"라는 질문에 와타나베는 "용기는 아내한테. 아내한테 있어. 내가 잃어버리고 다닐까 봐."라고 답한다. 이사카 고타로는 자신의 <킬러 시리즈> 최신작 《악스》의 주인공을 또다시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자로 설정한다.





코드네임 '풍뎅이'. 미야케는 겉으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사실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킬러다. 업계에서는 계속해서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유명하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말에 전전긍긍하는 지독한 공처가다. 아내를 대처하는 방법을 꼼꼼히 노트에 기록하고 공부할 정도로 그에게 아내는 세상 그 어떤 의뢰보다 어렵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아내가 깰까 봐 컵라면보다 소리가 덜 나고, 바나나보다 보존이 오래되는 어육 소시지를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우리 집사람은 알아." 풍뎅이는 대답했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깬 적이 있었어. 우리 집사람은 말이야, 성실한 회사원이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출퇴근 시간이 제법 걸리거든. 그래서 늦은 밤 그런 소리에 깨기라도 해 봐, 큰일 난다고." (p. 11)

풍뎅이와 아내 사이에는 고등학생인 아들 가쓰미가 있는데, 가쓰미는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어머니의 질문에 난색을 표하는 아버지를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머니에게 쩔쩔매는 아버지가 조금은 한심하게 보인다. 단란하다면 단란한 풍뎅이의 가족의 풍경에서 아내와 풍뎅이의 입씨름은 빼놓을 수 없다. 아내의 물음에 풍뎅이는 의뢰를 할 때보다 더 긴장하고 머리를 굴리느라 애쓴다. 이사카 고타로만의 유머는 대부분 아내의 질문에 난처해하는 풍뎅이의 모습에서 잔잔한 웃음으로 나타난다.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내가 그 말을 해 준 것은 역시 풍뎅이가 일 때문에 녹초가 되어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을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풍뎅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요란한 리액션을 하며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듯 반응했을 게 틀림없다. 이를테면 "산으로 캠핑 가는 건가! 그거 굉장한데!"라거나 "강이 얼마나 좋은데!"라거나. 어느 쪽이든 임시방편의 반사적 행동으로 알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p. 74)





빨리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고기를 입안 가득 넣으며 생각했다. 시기적으로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정을 잃을 채 사라져 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p. 147)

가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킬러란 사실을 밝히지 않은 풍뎅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업계에서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업계 쪽에서는 항상 그에게 은퇴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며, 계속 일을 시키는 실정이었다. 풍뎅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만둔다고 이야기하면 가족을 해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악스》는 이런 풍뎅이의 걱정을 기본적인 바탕에 놓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5가지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은퇴를 결심하는 풍뎅이의 이야기를 담은 AX부터 BEE, Crayon, EXIT, 아들 가쓰미의 시점으로 쓰인 FINE까지 이사카 고타로는 풍뎅이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들을 각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5개의 이야기는 이사카 고타로만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금세 넘어가는 페이지에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미안하다. 벌에게 사죄하며, 지금까지 사람들 목숨을 빼앗았을 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반응을 보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 눈가를 닦고 싶었지만 헬멧이 방해를 했다. (p. 110)






당신 아버님은, 당신의 아버지였습니다.

<모던 타임스>에서 아내의 대한 사랑을 "용기는 아내한테."라고 답한 와타나베처럼, 풍뎅이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끝까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풍뎅이의 이야기는 잔혹한 킬러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악스》는 이사카 고타로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인생과는 너무나 인연이 없는 걸 들이미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망연해졌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지금까지 뱉어 본 적 없는 따뜻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래, 웃는 게 더 좋아 보여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을 찬찬히 바라보고 말았다.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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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 1
조승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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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영단어를 외우기 위해 나는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고작 영단어 외우는 데에 사투를 벌일 것까지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의 기억력이 정말 부러울 뿐입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영단어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무작정 노트에 단어를 적어가며 단어를 외우기도 했고 스스로 테스트를 반복적으로 하며 강제로 머릿속에 각인시키려고 했다. 유사한 발음이나 비교적 쉬운 단어들을 연상시켜 외우는 방법도 시도해 보았다.
그나마 시도한 방법 중에 조금 효과적인 방식은 단어의 어원을 구분하여 암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많은 어원을 다 외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어원들을 이용해 새로운 단어를 마주했을 때 정확한 뜻은 몰라도 어떤 어감으로 사용되는지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영어에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이처럼 '언어 공부광'으로 만들어준 작은 깨달음은 바로 '언어는 사람 공부'라는 것이었다. 단어를 외우는 동안 단어 하나하나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스며들어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단어 배우는 것이 그림이나 음악 감상 이상으로 흥미진진해진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에 남녀와 가족 간의 사랑·배신·갈등, 전쟁의 잔인함과 영웅들의 발자취, 예술과 문학의 원천이 숨어있기 때문에 단어 공부야말로 더없이 재미있는 사람 공부다. (p. 4)

언어 공부가 사람 공부라니!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영어 단어들의 유래를 풀어내며 누구나 쉽게 인문학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모든 학문들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치들을 말하고 있는데(p.334) 저자 조승연은 그 답을 영어 단어의 뿌리에서 찾는다. 사람들이 왜(why), 어떻게(how) 그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풀어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답을 제시한다.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은 '욕망'과 '유혹'으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 '사랑'과 '가족'으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 '인간 사회'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 '예술'과 '여가'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 '전쟁'과 '계급'으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 '인간 심리'로 알아본 이야기 인문학으로 총 6가지의 테마로 이루어져 있다. 파생된 단어들끼리의 연관성, 비슷한 성격의 단어들로 엮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 진행하기 때문에 한 번 책을 들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 다시 책을 내려놓기 어려워진다.
언어에는 크게 6가지(기호성, 자의성, 사회성, 역사성, 규칙성, 창조성)의 특성이 있는데,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은 일정한 내용을 일정한 형식으로 나타내는 기호성,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사라지고 새로 생기는 역사성,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인 사회성에 주목하여 단어를 파헤쳐 간다.
예를 들어,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불리던 카사노바 casanova는 원래 여자들의 적이 아니라 질투 많고 가부장적인 남자, 여자의 마음을 구속하려고 억지 부리는 남편의 적이었다는 사실, 샴페인 champagne, 캠퍼스 campus, 캠핑 camping, 캠페인 champaign, 챔피언 champion이 모두 '시골', '밭'을 뜻하는 라틴어 '캄파니아'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 수도승이 입었던 의복에서 비롯한 카푸치노 cappuccino, 지금과는 정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었던 pretty, luxury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로 파생되고 변화된 단어들의 유래는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언어는 그런 역사와 동반 성장해왔다. 우리가 생각 없이 사용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인간의 자부심과 존엄성이 배어있으니, 그 의미만 제대로 알고 사용해도 인간의 자부심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p. 339)

《언어천재 조승연의 이야기 인문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언어학, 역사학, 사회학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하며 이 모든 학문들이 하나처럼 느껴지도록 한다. 언어를 통해 "사람"을 배운다는 조승연의 신선하고 독특한 관점은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것처럼 작용한다.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언어들을 만나게 된다면 앞으로 언어를 배우는 일이 즐거울 것 같다. 흠흠, 다시 영어 공부를 재밌게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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