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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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읽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은 <모던 타임스>였다. 불륜을 의심하는 아내로부터 고용된 수염 남자에게 고문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시작했던 <모던 타임스>의 주인공 와타나베는 아내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아내를 무서워하는 마음 아래에는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당신, 용기는 있나?"라는 질문에 와타나베는 "용기는 아내한테. 아내한테 있어. 내가 잃어버리고 다닐까 봐."라고 답한다. 이사카 고타로는 자신의 <킬러 시리즈> 최신작 《악스》의 주인공을 또다시 아내를 무서워하는 남자로 설정한다.





코드네임 '풍뎅이'. 미야케는 겉으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사실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킬러다. 업계에서는 계속해서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유명하지만 집에서는 아내의 말에 전전긍긍하는 지독한 공처가다. 아내를 대처하는 방법을 꼼꼼히 노트에 기록하고 공부할 정도로 그에게 아내는 세상 그 어떤 의뢰보다 어렵다. 살인 의뢰를 처리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아내가 깰까 봐 컵라면보다 소리가 덜 나고, 바나나보다 보존이 오래되는 어육 소시지를 먹으며 허기를 달랜다.

"우리 집사람은 알아." 풍뎅이는 대답했다. "그 소리가 시끄러워서 깬 적이 있었어. 우리 집사람은 말이야, 성실한 회사원이라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 출퇴근 시간이 제법 걸리거든. 그래서 늦은 밤 그런 소리에 깨기라도 해 봐, 큰일 난다고." (p. 11)

풍뎅이와 아내 사이에는 고등학생인 아들 가쓰미가 있는데, 가쓰미는 항상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담당한다. 어머니의 질문에 난색을 표하는 아버지를 도와주기도 하고, 때로는 어머니에게 쩔쩔매는 아버지가 조금은 한심하게 보인다. 단란하다면 단란한 풍뎅이의 가족의 풍경에서 아내와 풍뎅이의 입씨름은 빼놓을 수 없다. 아내의 물음에 풍뎅이는 의뢰를 할 때보다 더 긴장하고 머리를 굴리느라 애쓴다. 이사카 고타로만의 유머는 대부분 아내의 질문에 난처해하는 풍뎅이의 모습에서 잔잔한 웃음으로 나타난다.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아내가 그 말을 해 준 것은 역시 풍뎅이가 일 때문에 녹초가 되어 당장이라도 잠들고 싶을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풍뎅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요란한 리액션을 하며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듯 반응했을 게 틀림없다. 이를테면 "산으로 캠핑 가는 건가! 그거 굉장한데!"라거나 "강이 얼마나 좋은데!"라거나. 어느 쪽이든 임시방편의 반사적 행동으로 알았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 (p. 74)





빨리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고기를 입안 가득 넣으며 생각했다. 시기적으로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의 감정을 잃을 채 사라져 가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p. 147)

가족 그 누구에게도 자신이 킬러란 사실을 밝히지 않은 풍뎅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업계에서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업계 쪽에서는 항상 그에게 은퇴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며, 계속 일을 시키는 실정이었다. 풍뎅이 입장에서는 자신이 그만둔다고 이야기하면 가족을 해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악스》는 이런 풍뎅이의 걱정을 기본적인 바탕에 놓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5가지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은퇴를 결심하는 풍뎅이의 이야기를 담은 AX부터 BEE, Crayon, EXIT, 아들 가쓰미의 시점으로 쓰인 FINE까지 이사카 고타로는 풍뎅이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들을 각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5개의 이야기는 이사카 고타로만의 속도감 있는 문체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금세 넘어가는 페이지에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미안하다. 벌에게 사죄하며, 지금까지 사람들 목숨을 빼앗았을 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반응을 보였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스스로도 놀라 눈가를 닦고 싶었지만 헬멧이 방해를 했다. (p. 110)






당신 아버님은, 당신의 아버지였습니다.

<모던 타임스>에서 아내의 대한 사랑을 "용기는 아내한테."라고 답한 와타나베처럼, 풍뎅이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끝까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풍뎅이의 이야기는 잔혹한 킬러 소설을 읽고 있음에도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악스》는 이사카 고타로만이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다.

자신의 인생과는 너무나 인연이 없는 걸 들이미는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망연해졌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지금까지 뱉어 본 적 없는 따뜻한 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그래, 웃는 게 더 좋아 보여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을 찬찬히 바라보고 말았다. (p. 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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