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희망 패트릭 멜로즈 소설 5부작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 지음, 공진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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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은 잠에서 깼다. 꿈을 꾼 건 알겠는데, 무슨 꿈인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의식의 가장자리 너머로 사라진 것이 무엇인지 떠올리려고 애를 쓸 때의 익숙한 아픔이 느껴졌다. 그러나 달리는 차가 일으킨 바람에 종잇조각이 날리는 걸 보고 차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듯이, 그는 꿈이 남긴 것으로 그 꿈을 추측할 수 있었다. (p. 13)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패트릭 멜로즈 5부작 시리즈의 세 번째 이야기, 《일말의 희망》은 《괜찮아》와 《나쁜 소식》에서 다섯 살, 20대의 패트릭 멜로즈의 하루를 그려내었듯이 30대가 된 패트릭 멜로즈의 하루를 그려낸다. 
  가학적인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로 인해 얼룩져버린 패트릭 멜로즈는 마약 중독자가 되어버린다. 그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살아갈 만큼 그의 인생에 아버지가 차지하는 부분은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마약'이라는 환상과 꿈에서 깬 패트릭은 여전히 방황한다. 그 이전의 상처와 아픔들은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죽고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년기는 지나갔지만, 그 자리에 성숙의 흔적은 없었다. 슬픔과 탈진이 증오와 광기를 숨기는 경향을 '성숙'이라고 하지 않는 한은 그랬다. 많아지는 선택지와 두 갈래길을 늘 마주한 듯한 느낌은 어느새 긴 실종 선박 목록을 보며 부둣가에 서 있는 것 같은 황량한 느낌으로 대체되었다.  (p. 17)

  그 어디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던 패트릭은 여전히 자신이 속해 있는 영국 상류층의 파티에 초대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인해 상류층 사교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고, 친구 조니와 파티에 가지 않기로 약속한다. 물론, 그와 함께 마약 중독자였던 친구 조니 역시 자신이 그 파티에 가게 된다면 또다시 평정심을 잃고 마약에 손을 댈까 두려워 패트릭과 함께 파티에서 빠지기로 한다. 영영 마약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두 마약 중독자들은 그 꿈과 환상에서 깨어난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패트릭 멜로즈가 참석하지 않은 파티의 모습을 통해 영국 상류층의 빛바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곳에 모인 인물들 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그 속에서 느껴지는 허영과 독설, 위선과 아부 등을 세밀하게 꼬집어낸다.
  한편, 패트릭은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던 분노와 증오의 원인을 조니에게 털어놓는다. 스스로가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는 하나,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가장 큰 결심을 하고 실행한다. "하지만 이젠 증오하기도 지쳤어. 계속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어. 증오 때문에 그 일에 속박되는 건데, 나는 더 이상 어린애로 있고 싶지 않아."(p. 115)


  패트릭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수치스럽기도 한 진실을 남에게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불만스러웠다. 고백의 카타르시스는 없었다. 어쩌면 너무 추상적으로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여러 정신적 장애의 집합을 가르키는 암호명이 되어 있었다. (p. 117)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는 못한다. 그저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상처의 억압에서 살짝 벗어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고요한 호숫가에서 보았던 백조 무리처럼, 그도 언젠가 자유로이 헤엄치며 그 기억의 영향 속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3부까지의 내용이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면, 남은 4부와 5부는 그에게 또 다른 의미로 영향을 주었던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라고 한다. 앞으로 패트릭 멜로즈는 어떤 인생을 살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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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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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p. 375)

  때로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예상하고 단정 짓는다. 그것이 사물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간에 우리의 예단으로 하여금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진실은 여러 부분을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판단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진실을 보는 것을 귀찮아한다. 그래서 자기가 편한 대로 예단하고 행동하기 시작하는데, C. J. 튜더의 데뷔작 《초크맨》은 바로 그 예단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느 날 밤, 늦은 시간 차고 문을 열었다가 아이들이 차고 진입로 위에 분필로 그려놓은 일련의 초크맨들을 보고 C. J. 튜더는 이 책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으로 그려진 초크맨은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는 묘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더구나 행맨과 같이 목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나 균일하지 않은 팔과 다리는 기괴한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싹하다면 오싹할 수 있는 초크맨의 느낌들은 소설 《초크맨》에 고스란히 녹아진다.

  사람들은 그런 사건에 항상 호기심을 느낀다. 내가 보기에도 그럴 만한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다. 특이한 주인공, 분필로 그린 섬뜩한 그림 그리고 소름 끼치는 살인. 우리는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초크맨 모양의 조그만 흔적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씁쓸해한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사실은 윤색됐고 진실은 점점 모호해졌다.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다. (p. 89)

  어느 날, 조용한 마을 엔터 베리에 떠들썩한 사건이 일어난다. 살해된 소녀의 토막 난 신체 일부가 발견되었고, 머리는 발견할 수 없어 여전히 사건을 미궁 속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 1986년, 당시 열두 살이었던 에디는 친구들과 무리 지어 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축제가 열린 토요일 밤, 에디는 새로 부임한 영어 선생님 핼로런 씨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예기치 않은 사고가 일어나게 되고 같은 장소에 있던 핼로런 씨와 엮이게 된다. 며칠 뒤, 에디와 가족들은 에디의 친구 개브의 생일 파티에 초대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에디의 아빠는 니키의 아빠인 마을 교회의 목사와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 뒤부터 엔터 베리에서는 섬뜩한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건 장소에는 항상 초크맨이 남겨진 채……

  이제 그리운 추억 여행을 떠나야 하는 시간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햇빛이 아른거리는 오솔길을 걸으며 애틋한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이 길은 웃자란 거짓말과 비밀이 한데 뒤엉켜서 어두컴컴하고, 움푹 파인 구멍들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 길에 초크맨이 있다. (p. 247)

  《초크맨》은 1986년과 2016년이라는 30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주인공 에디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 연계된 두 시점을 연결 짓는 단서들을 종합하여 독자들은 소녀를 살해하고 토막 낸 범인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을 의심한다. C. J. 튜더는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사건들을 나열한다. 그러나 결코 《초크맨》에서는 일반적인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에서 당연시되는 법칙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즉, 저자가 말한 대로 우리는 범인이 누구인지 예단하지 말아야 한다. 
  '페이지 터너'라는 수식어가 적합할 정도로 《초크맨》은 빠른 속도로 전개되며 손에서 놓지 못하게끔 만든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독자들의 등장인물에 대한 의심을 깊어지지만 여전히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C. J. 튜더는 탄탄한 트랩들을 설치한다. 그 누구도 이 소설이 끝나기 전까지 누가 범인인지 단정 짓기 어려워진다. 과연 우리의 예단으로 하여금 보지 못한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스스로 해답을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정답이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다. 우리는 원하는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질문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뭔가 하면 진실은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인 습성이 있다. 우리는 그걸 믿느냐 믿지 않느냐만 선택할 수 있을 따름이다. (p.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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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어 사전 - 보리라고는 보리차밖에 모르는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맥주 교양
리스 에미 지음, 황세정 옮김, 세노오 유키코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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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같이 더운 날씨가 찾아오면 항상 갈증도 함께 찾아온다. 그때마다 다양한 음료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이스커피도 좋고, 달달하면서 상큼한 뒷마무리가 최고인 레모네이드도 좋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찾아 마실 수 있는 범위가 넓어져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맥주를 찾아마실 때도 있다. 톡 쏘는 청량감이 목을 타고 넘어간 뒤에 혀끝에 남아있는 알싸한 그 맛. 맥주 한 모금에 더위에 지친 몸이 시원해짐과 동시에 나른해진다. 더운 여름, 이만한 힐링이 따로 없다.
  이렇게 맥주에 대한 예찬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는데, 사실 나는 맥주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모른다. 처음 주류에 눈을 떴을 때 내가 아는 맥주라고는 부모님이 자주 마시던 카스, 하이트와 같은 캔맥주뿐이었고 대학가 근처에 있는 스몰 비어 가게나 펍, 세계맥주전문점에 방문하면서 수제 맥주 몇 종류 아는 게 전부다. 뭐, 그나마 다행인 건 이 맥알못(맥주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가장 선호하는 맥주가 따로 존재하긴 한다는 걸. 그러나 그 외에 어떤 맥주를 들이대도 그 맛이 그 맛인 것 같은 맥알못이다.




   전 세계 맥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색, 풍미, 도수, 제조법, 역사, 환경에 따라 실로 다양한 맥주가 탄생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26)

  맥주 교양서 《맥주어 사전》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고 인기 있는 맥주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책으로, 맥주와 관련된 용어를 모두 정리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기원된 맥주의 시작은 이집트로 전파됐고,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세기 초반, 일본으로 네덜란드를 통해 맥주가 전해지면서 세계 곳곳에서 맥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저자 리스 에미는 세계의 브루어리(양조장)과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맥주들의 스타일을 정리하고, 맥주와 관련된 문화들을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풀어낸다.




 평소에는 실내에서 맥주를 마시는 일이 많지만, 야외에서 마시는 맥주도 맛있다. 상쾌한 강가에 앉아 맥주를 마시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알딸딸한 상태에서 시라도 한 수 읊어 볼까. (p. 41)

  《맥주어 사전》은 '사전'이라는 이름답게 ㄱ~ㅎ까지 색인이 마련되어 있어 궁금한 용어가 있다면 실제 사전처럼 쉽고 빠르게 찾아낼 수 있다. 저자가 책 처음에 적어놓았듯이 맥주가 생각날 때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을 수도 있고, 어떤 용어에 추가적으로 적힌 페이지를 따라 연결 지어 읽을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나 강하지 않고 은은한 도수로 즐길 수 있는 맥주처럼 《맥주어 사전》도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중세 영국에서는 여성이 에일을 만드는 일을 담당했다. 이렇게 만든 에일은 주로 가정에서 소비됐지만, 에일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에일와이프'라고 불렀다. 흔히 마녀라고 하면 뾰족한 모자, 고양이, 부글부글 끓는 냄비, 빗자루 등을 연상하는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에일와이프에 공통된 모티브였다. 고양이는 맥아를 노리는 쥐를 쫓는 역할을 했고, 뾰족한 모자는 에일와이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표식 같은 것이었다. 맥아즙을 만들 때면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빗자루는 청소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 앞에 걸어 에일 판매처를 나타내는 간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에일와이프들이 마녀였던 것일까. (p. 83)

  술 때문에 나온 배를 가리켜 '술 배', '맥주 배'라고 한다.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찐 것인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으나 술을 많이 마시는 이들 사이에서는 통용되는 표현이다. (p. 90)

  《맥주어 사전》을 읽다 보면,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비하인드스토리까지 엿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더하여 맥주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의외의 맥주어들까지 알 수 있다. 알고 있다면 더욱 도움이 될만한 정보(맥주와 함께 먹으면 좋을 안주들, 맥주 여행자들이 들리면 좋을 세계 맥주 스폿, 맥주와 관련된 칼럼 등)들도 가득 담겨 있어 훗날 맥주에 대한 지적허세미(?)를 발산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다 보니 그저 맥주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자꾸 맥주가 생각났다. 적절하게 차가워진 맥주 한 모금에 남은 이 여름을 무사히 보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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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틀리는 요리점
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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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사회봉사를 다녔던 나는 여전히 첫 사회봉사의 기억이 선명하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요양원으로 배정받았고 그곳에서 청소와 식사 준비를 도와드리는 일을 맡았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길러주신 터라 요양원에 가는 것에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봉사가 꽤나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다수가 치매를 앓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셨는데, 친구와 내게 같은 질문을 계속 물어보시기도 하시고 옷을 수선해야 되니 칼을 가져오라며 소리를 지르 시기도 하셨다. 할 일을 마친 뒤 잠시 쉬는 동안 할머니들을 바라보았다. 그분들이 하실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소파에 앉아 TV를 보시는 게 전부였다. 그 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TV만 보실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 SNS에서 주문이 틀리는 요리점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2017년 6월, 도쿄에 있는 불과 열두 석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단 이틀간만 열린 '주문이 틀리는 요리점'의 소식은 일본의 전 지역은 물론 한국, 미국, 중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이 요리점에서 홀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일반 식당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치매 환자였다. 

'주문을 틀리다니, 이상한 레스토랑이네'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저희 홀에서 일하는 종업원은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분들입니다.
가끔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저자이자 프로그램을 기획한 일본 NHK 방송국의 PD 오구니 시로는 취재 차 나간 치매 환자 간병 시설에서 햄버그스테이크 대신 만두가 나온 것을 보고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의 영감을 얻는다. 책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은 프로젝트가 만들어지기까지, 또 실행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를 담아낸다. 오구니 시로는 이 책을 통해 '치매'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이 바뀌기를 희망한다.
  
  '누구든지 그곳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다소 과장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곳에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오픈 전날 아침, 모두가 다짐한 것이 있었다.
  일하는 사람도, 손님도, 우리도 '하길 잘했다'고 웃으며 돌아갈 수 있는 레스토랑을 만들자고. (p. 140)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가진 가치는 대단했다. 프로그램을 함께 기획하고 실행한 관계자들에게도, 식당을 방문한 손님에게도, 그리고 홀에서 서빙을 했던 치매 환자들에게도 좋은 결과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처음 치매 환자들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손님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지 걱정하던 프로그램 관계자들은 의외로 활발히 움직이는 치매 환자들에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손님들도 그 모습에 즐거워했다. 그 누구도 음식이 잘못 나온다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식당의 컨셉을 이해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관용'이 나타났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맛있는 과자와 읽을거리를 살 수 있다.
그 사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물건을 사는 요시코 할머니의 모습이, 마치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p. 49)

  손님들이 보여준 관용 속에서 치매를 앓고 있던 종업원들이 일을 하면서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되찾는 느낌을 보여준다. 손님에게 다가가는 발걸음이 너무도 가볍다. 중학생 때 봉사를 하며 보았던 할머니들의 모습과 너무도 대조되었던 생기 있고 활기 넘치는 모습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진다. 치매에 대해 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치매를 앓고 있는 환자들을 억누르고 제약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오히려 우리가 그들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만들지는 않았을까?
   이미 고령화 사회가 되어버린 한국에서 노인 문제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늙어서도 나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노후에 대한 걱정과 막연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다. 더구나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병이라고 불리는 '치매'에 걸리게 된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크게 다가온다. 그러나 노인과 장애인,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용'이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그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이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지 말해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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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 뻔한 세상
엘란 마스타이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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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톰 배런은 원래 우리가 살 뻔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1950년대 공상과학 소설에 등장했던 기술 유토피아는 1965년 라이오넬 구트라이더라는 과학자가 무공해, 무제한, 무시무시한 힘이라고 표현할 만큼 혁신적인 에너지 생산 방법을 발명해 냄으로써 가능해졌다. 그것은 바로 구트라이더 엔진으로, 그 덕택에 엄청난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2016년에는 모든 사람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행복하며 편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p. 141)

  영화 <왓 이프(What If)>의 시나리오 작가 엘란 마스타이는 《우리가 살 뻔한 세상》을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유토피아 사회가 펼쳐지는 2016년을 그려낸다. 1965년 라이오넬 구트라이터가 만들어낸 구트라이더 엔진으로 인해 엄청난 과학적 발전이 이루어진 이 세상에서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는 물론, 음식을 만들거나 옷을 입는 데에도 기술이 모든 것을 도와준다. 삶의 대부분을 기술이 대체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그저 엔터테인먼트에만 목적을 두고 살아간다.
  주인공 톰 배런은 이 세상에서 바보 얼간이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시간 여행'을 기획한 천재 아버지 밑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다 아버지의 연구소에 낙하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신임을 받던 페넬로페 베슐러에게 이끌리게 된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페넬로페는 죽게 되고, 그 충격으로 톰 배런은 아버지의 시간 여행 장치를 훔쳐 과거로 돌아간다.

  그건 아마 당신이 가려는 곳에 대해서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과거에 대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없으니까요. 어떻게 그곳에 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뿐이죠. 당신이 우주에 가고 싶었던 건 단순히 로켓 우주선이 잘 작동되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아무도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싶어서였죠. (p. 72)

  《우리가 살 뻔한 세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2016년에 살고 있던 톰 배런이 시간 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전반부와 그리고 '시간의 닻'으로 또 다른 2016년에 살고 있는 존 배런으로 돌아오는 후반부로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전반부의 2016년과 후반부의 2016년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부의 2016년이 지금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매우 비슷하다. 아이폰, 스냅챗, 인스타그램 등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으니.)
  자신으로 인해 바뀌어버린 일들로 톰은 매우 혼란스러워한다. 물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톰만이 아니다. 저자 엘란 마스타이는 2016년의 톰과 또 다른 2016년의 존을 같은 인물이면서도 다른 인물로 그려낸다. 《우리가 살 뻔한 세상》을 읽으면서 톰은 계속 '내가 살던 세상'이라고 지칭하며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며, 또 다른 2016년에 도착해서는 마치 존의 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그가 혹시나 '해리성 인격장애(다중인격장애, 조현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또 다른 2016년에서 존으로 살게 된 톰에게 가족들은 그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한다.)

  아니, 사실 이건 내 인생이 아니다. 이건 '그'의 인생, 바로 존의 인생이다. 내가 여기 오래 머무를수록 나는 점점 사라지고 그가 되어간다. 나의 의식이 내 속에 있는 구부러진 거울 속으로 포섭되고 있는 기분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그건 정말 미치도록 끔찍한 기분이다. 머릿속이 활활 타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p.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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