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파단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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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온전하지 못하다. 이틀 전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냐는 질문에 누군가는 그때의 순간적인 상황이 떠올라 대답할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기억은 마치 한 권의 사진첩 같은 느낌이다. 모든 상황들을 영상처럼 기억하는 것처럼 느끼고는 있지만, 실제 그 상황에 대해 묘사하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정지된 한 장면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조각 나누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할 수 있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짧은 사이의 기억 파편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한 남자, 《기억 파단자》는 조각난 기억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다음 순간, 니키치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앞 문장에 있는 '나'에게 알려주는 메모였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전향성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 11)

   니키치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자신 근처에 놓인 노트를 펼쳐본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노트 주인이 써놓은 메모들을 읽으며 그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내 니키치는 자신이 그 노트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전향성 기억 상실증'. 니키치는 수십 분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기억 상실증을 가지고 있어 사고 이전의 기억을 또렷한 데 반해 그 이후의 기억은 노트에 의존하며 생활한다.
   화법 교실에 다닌다는 노트의 기록에 따라 화법 교실로 갔던 니키치는 이후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작은 카페로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고 있던 니키치에게 실밥이 묻었다며 한 남자가 다가오게 되고, 이내 무언가 머릿속을 바꾸어놓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어리둥절하던 니키치는 곧이어 그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지만, 지하철에서 그를 또다시 보게 된 니키치는 무언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남자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이전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자주 목격되는데……

  괴인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니키치는 졸음이 엄습하며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먼저 니키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어떤 남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괴인이 심은 가짜 기억임이 분명했다. 니키치는 그것을 확실하게 자각한 것이다. (p. 169)




  《앨리스 죽이기》의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소재로 기억 추적 스릴러를 써 내려간다. 《기억 파단자》는 기억이 수십 분 밖에 유지되지 않는 남자와 반대로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초능력을 가진 남자의 대결 구도를 유지해가며 인간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그 어떤 것도 진실이라고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심지어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며 고바야시 야스미는 니키치의 파단된 기억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데, 노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니키치의 상황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과연 그 모든 것이 확실하게 끝났는지 의심하게 된다.

  인간의 기억이란 원래 아주 신뢰도가 낮은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 자세한 내용들은 점점 사라진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이틀 전의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흔한 일이죠. 그러니까 기억은 영화나 소설처럼 하나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빛바랜 사진이나 문장을 갈겨쓴 것처럼 작은 조각 같은 것입니다. (p. 187)

  《기억 파단자》를 읽다 보면, 매일 아침마다 기억을 잃는 니키치의 상황 때문인지 항상 비슷한 쳇바퀴를 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니키치가 괴인, 살인마라고 지칭하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가 나타난 순간,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조금 지루한 전개라고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의외로 빠른 전개 속도라고 느낄 수도 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화법 교실의 교코 선생이 니키치에게 호전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고는 했지만, 초반부에 심하게 당황하던 니키치의 모습은 후반부로 갈수록 굉장히 차분해지고 냉철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독자로서 그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도쿠씨나 노란 치아의 여인은 고바야시 야스미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니, 왠지 모를 흥미감이 생겨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앨리스 죽이기》를 비롯해서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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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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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게 된다면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될까? 아마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서보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시선을 돌리면 끝이 보이는 유한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어느 순간에 머물 수 있게 되지만, 우주와 같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라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끝에 집중하기란 어려울 테니 말이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가장 유한적인 존재, 아마 나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지 않을까. 《보헤미아 우주인》은 바로 그런 철학에서 시작된다.

  지구는 이제 하늘 깊은 곳에서 빛나는 점이었고, 한 개의 구두처럼 작아진 집이었다. 하루에 한 번 나는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파랗고 하얀 행성, 나와 내가 아는 이들을 지탱해줄 그곳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내 고향 행성에 대한 찬사와 비교해보면 금성은 상당히 칙칙했고, 끊임없는 폭풍우와 화산 폭발로 더할 나위 없이 적대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표면의 모래와 바위는 잔잔한 엿기름처럼 사람을 현혹하는 모습이었다. (p. 119)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는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현상을 '초프라'라고 이름 짓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지구로부터 4개월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먼지 입자를 분석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 체코에서 야쿠프는 세계의 미옥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4개월 뒤 다시 이 푸른 지구에 돌아온다면 자신을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의 무거운 죄를 씻을 수 있고, 자신은 체코의 영웅이 될 테니……
  영화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그리고 <마션>을 떠올리게 만드는 《보헤미아 우주인》은 야로슬라프 칼파르시의 첫 데뷔작이다. 신비한 우주 현상과 그것을 밝히기 위한 단서를 가져오는 우주인의 여정으로 큰 밑그림을 그린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야쿠프를 통해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고독과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감 등 복잡하고도 심오한 감정들을 밑그림 위에 그려낸다. 인간의 감정 외에도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체코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던 1989년 벨벳혁명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지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시체였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워지면 몸은 성가신 영혼 없이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고대한다. 사람의 몸이란 이렇게 간단하다. 맥박이 뛰고 분비하고 삐걱거리면서 한 박자, 두 박자씩 한 시간 또 한 시간을 채워간다. 몸은 노동자이며 영혼은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자. 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낄낄대며 웃을 뻔했다. (p. 186)

   처음 지구를 떠나 초프라로 향하는 야쿠프의 모습은 영화 <마션> 속 장면을 연상케했다. 홀로 화성에 남아 자신이 생존하는 과정을 일일이 녹화하듯이, 야쿠프도 자신이 초프라로 가는 모습들을 영상 통화를 통해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지구에서 멀어지면서 그에게 큰 걱정을 남겼던 것은 지구에서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외계 생물체와 마주하게 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초프라로 떠나기까지의 일생을 회상한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굉장히 시크한 문체로 야쿠프가 느끼는 감정들을 묘사한다. 차분하고 냉정한 어투로 읊어가는 그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상당히 외로운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또, 아버지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대신 짊어지면서 고독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이 사실을 야쿠프 스스로가 느끼기보다는 그의 아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해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이는 어릴 적부터 죄책감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지른 죄라는 큰 짐을 어깨에 메고 다녔죠. 하필이면 그는 우주 비행사가 되었어요. 고귀하고 멋진 일이지만 구원을 추구하는 그이를 따라갈 의지가 저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이는 먼 우주에 뭔가 마법이 있어서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거든요. 자꾸 억울해지죠. 그래서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어요. 남은 인생이 아직도 긴데, 내가 원하는 건 뭐지? 필요한 것. 야쿠프가 자기 목표를 추구하면서 아내는 기다릴 거야, 언제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난 뭘 하지? (p. 332)

  유한적이라고 생각했던 자신 속에서도 어쩌면 무한한 갈망이 있어 당황할지도 모른다. 고독함과 갈망,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싶다면 《보헤미아 우주인》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 남겨진 것들이 있다. 나는 우주를 지나 여행했고, 비할 데 없는 진실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이곳 지구의 생활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 어떤 것들은 불멸의 영혼 속에 존재하면서 자신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을 느끼기를 갈망한다. 우주 그 자체처럼 끝이 없고 무한히 확장한다. (p. 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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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 - 빅뱅부터 2030년까지 스토리와 그래픽으로 만나는 인류의 역사
김민주 지음 / 김영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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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나는 세계사보다는 한국사를 더 선호했다. 과거의 사건들을 연도별로 구분하며 일련의 흐름으로 쭉 나열해 온 역사 교과서로는 넓고 방대한 세계사보다는 좁고 집약적인 한국사가 더 외우기 쉬웠으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세계사의 아주 큰 부분을 제외하고는 그 사건의 이면에 대해 자세히 알 길이 적었다.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역사에 관한 책들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큰 사건들을 중심으로 역사 교과서처럼 과거의 흐름을 나열할 뿐이었다. 그러나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의 경우에는 기존의 역사 교과서와는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 접근방식과 비슷하게, 인간이 오랜 기간 축적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우주 초기의 빅뱅부터 현재까지를 분석하는 빅히스토리 방식이 있다. 이제 역사학자는 서양사, 동양사, 한국사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 물리학, 생물학, 지질학, 기후학, 환경학, 공학, 건축학, 해양학, 고고학, 인류학, 문화학, 도시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을 포함하여 폭넓게 공부해야 한다. 폴리매스, 즉 심도 있으면서 박식한 존재가 되지 않고서는 진정한 역사학자가 될 수 없다. (p. 12)

  책의 저자 김민주는 자신이 추구하는 폴리매스에 집중하여 《김민주의 트렌드로 읽는 세계사》를 풀어나간다. 인문학의 핵심은 방만한 지식이 아니라 적절한 질문에 있음을 바탕으로 하여 역사에 대해 100가지 질문을 하며, 단순히 한 나라의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 파급효과를 지닐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과거의 사실을 뛰어넘어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연결될 수 있는 이 질문을 통해 저자 김민주는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며 그 속에서 우리가 사고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낸다.
  이 책은 독특한 시작으로 첫 포문을 연다. 인류의 첫 탄생부터 시작하는 여느 역사 책과는 달리 이 책은 독특하게도 '추리소설가 에드거 엘런 포, 19세기에 이미 빅뱅이론을 썼다고?'라는 질문으로 우주의 첫 탄생, 빅뱅부터 시작한다. 지구라는 작다면 작은 행성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광활한 우주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 읽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시대별로 정리하기 했으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연도별은 아니다. 기원전 3000년, 기원전 500년, 800년, 1430년, 1750년, 1910년, 1990년, 2030년을 시대를 구분하는 연도로 삼아 여덟 시대로 나누어 설명한다. 과거의 사건들을 나열한 것이라고 생각한 '역사'에 대한 편견을 깨며 미래 2030년까지 바라보는 것도 독특한 마무리다.

  현재 4차 산업혁명이 3차의 연속인가 아니면 새로운 혁명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기존 인터넷기술의 확장으로 치부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은 인공지능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저성장 늪에서 구해낼 또 한 번의 점프라며 많은 기대를 품기도 한다. 어느 쪽이 맞는가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얼마나 혁신성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느냐 그리고 얼만큼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p. 427)

  '과거 700년에는 세계에서 어떤 도시의 인구가 가장 많았을까?', '각 나라의 국부는 어떤 사람일까?',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창조성이 가장 높은 서양화는?', '세계사 책에 등장하는 직업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등등 흥미로운 질문들로 시작하여 다양한 방면의 지식들로 답을 해주기 때문에 역사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모든 내용의 끝에는 'Think'라며 교과서로는 '생각해봅시다'와 비슷한 문제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그런 질문들로 하여금 몇몇 내용들이 조금은 얕은 깊이처럼 느껴진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기존의 역사 책과는 달라 흥미로웠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유기적으로 이어진 이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떤 미래를 대비해야 되고 만들어 가야 할지 좋은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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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그림 하나 - 오늘을 그리며 내일을 생각해
529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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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하는 영국 드라마 <마이 매드 팻 다이어리>에서 레이는 타인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일기장에 털어놓는다. "Dear my diary."라며 가장 가까운 사이인 엄마나 친구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자신의 속마음을 써 내려간다. 일기장은 묵묵히 레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그 어떤 조언도, 참견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레이가 하는 말에 집중한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밤이 되면 문득 타인에게 말하지 못한 속마음들이 가슴을 쿡쿡 찌른다. '마치 오늘 밤에 이 감정을 어디다 털어놓지 못하면, 너는 잠에 들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빈 허공에 대고 중얼거릴 수는 없으니 간간이 쓰는, 일기장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다이어리를 꺼낸다. 몇 줄이라도 끄적이고 나면 괜스레 속이 시원해진다.



  하루 그림 하나는 일러스트레이터 529 작가가 쉽게 잠들지 못한 1년의 밤을 담아낸 그림일기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무엇 하나라도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그림일기 속에는, 529 작가의 단편적인 하루가 귀여운 일러스트와 함께 담겨 있다어떤 이야기든지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일기장에 529 작가는 그 누구보다 진솔하게 그리고 적어 내려간다. 복학과 더불어 기존에 하고 있던 일들이 많이 쌓여 있는 터라 529 작가의 이야기에 매우 공감됐다
  
  기한은 정해져 있는데, 떠오르는 것들은 성에 차지 않으니 속이 탄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면 그림은 오히려 딱딱하게 굳어 나간다. 마음에 안 들어! (p. 11)



  급한 마음에 엉터리로 적은 문장들을 보면서, 이렇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엉성하게 흘려버렸을까 생각하게 된다. (p. 63)

   조급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해낸다는 것은 더 나은 순간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529 작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나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만약 내가 일기를 써 내려간다면, 10월 한 달 동안은 이런 내용들이 너무도 많을 것 같다. 잘하지 못한다는 자책과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많은 일들에 지친 요즘이니까. 《하루 그림 하나》를 읽으면서 그나마 조금은 쉬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는 안도의 한숨과 조금의 위로도 얻었다.
  문득 든 즐거운 생각이 있다면, 《하루 그림 하나》를 날짜에 맞춰 매일 밤마다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 나는 이런 하루를 보냈고, 이런 감정을 가졌다고 서로 공유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어서. 남은 2018년 동안 나도 최대한 많은 것들을 기록하고 남겨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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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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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음악을 연주했고, 그는 어딘가 달랐다. 그가 연주한 것은…… 그가 연주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어디에도 없는 그런 것.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그가 피아노에서 일어나면 그 음악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다. (p.23)

  예술가의 삶은 간혹 그들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내린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비참한 삶의 결정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남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원작 소설 《노베첸토》는 배 위에서 일생을 보낸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그의 음악과 더불어 삶과 운명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채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삶을 그려내지만 읽는 독자들은 얇은 책의 두께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한 세기가 시작되는 첫 날, 보스턴 항구에 도착한 버지니아 호의 피아노 위에 놓여진 작은 상자 속에서 태어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아기가 발견된다. 아기를 발견한 배의 노동자 부드먼은 그에게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치 자신의 아들인양 아기를 보살핀다. 노베첸토가 8살이 되던 해, 사고로 인해 부드먼이 죽게 되고 노베첸토는 또 다시 고아가 되버린다. 태어나서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살던 노베첸토는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큰 호응을 받은 그는 건반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연주하며 살아간다.

  하루는 노베첸토에게 연주하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건반 위에서 손가락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늘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고 어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느냐고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 갔었어. 여자들의 머리칼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사방에 불빛이 반짝이고 호랑이들이 가득했지." (p. 43)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노베첸토라는 인물을 통해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재즈 창시자로 불리는 젤리 롤 모턴을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사람들이 더욱 더 노베첸토의 재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독특한 것은,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노베첸토가 연주하는 재즈에 대한 곡명을 따로 적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건반 위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들을 상상하고, 읽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터라 《노베첸토》를 읽는 내내 노베첸토에 대한 그림이 자유롭게 그려졌다. 배에서 고정되지 않은 피아노에 앉은 채 연주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라랜드>에서 재즈바를 오픈하고 자신의 마음을 피아노 연주로 표현하던 세바스찬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또, 노베첸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배에 올라 타 연주 대결을 펼친 젤리 롤 모턴과의 모습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가장 유명한 장면인 피아노 배틀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 버지니아 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노베첸토의 모습은 영화 <타이타닉> 속 배가 가라 앉는 순간까지 피아노 연주를 하던 악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런 면에서 두말할 필요 없는 천재였다. 들을 줄 알았고 읽을 줄 알았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그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진 흔적,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았다.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이 쓰여 있다. 그는 집중해서 이런 것들을 읽고 분류하고 배열하고 정리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나가는 광할한 지도에 매일 작은 조각을 끼워넣었다. 그것은 이 세상, 온 세상의 지도였고 끝에서 끝까지 거대한 도시와 작은 카페들, 긴 강, 물웅덩이, 비행기, 호랑이들로 가득한 멋진 지도였다. (p. 45)

  《노베첸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배에서 내려야겠다고 마음 먹은 노베첸토가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계단 사이에서 고뇌하는 장면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밑으로 내려가던 그는 육지를 바라보다 다시 배로 돌아온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그 모습을 통해 노베첸토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유한한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무한한 삶의 영역으로 걸어가는 그 느낌. 어떤 것이 정답인 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그 느낌. 노베첸토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착잡함을 느끼게 된다. 건반 위의 삶은 그에게 전부였지만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연주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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