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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 우주인
야로슬라프 칼파르시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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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우주에 혼자 남게 된다면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 될까? 아마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서보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자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시선을 돌리면 끝이 보이는 유한한 공간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어느 순간에 머물 수 있게 되지만, 우주와 같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라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끝에 집중하기란 어려울 테니 말이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가장 유한적인 존재, 아마 나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지 않을까. 《보헤미아 우주인》은 바로 그런 철학에서 시작된다.
지구는 이제 하늘 깊은 곳에서 빛나는 점이었고, 한 개의 구두처럼 작아진 집이었다. 하루에 한 번 나는 망원경의 초점을 맞추며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파랗고 하얀 행성, 나와 내가 아는 이들을 지탱해줄 그곳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내 고향 행성에 대한 찬사와 비교해보면 금성은 상당히 칙칙했고, 끊임없는 폭풍우와 화산 폭발로 더할 나위 없이 적대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표면의 모래와 바위는 잔잔한 엿기름처럼 사람을 현혹하는 모습이었다. (p. 119)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관측된 적 없는 혜성 하나가 태양계로 진입하면서 거대한 먼지 폭풍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이 특이한 현상을 '초프라'라고 이름 짓고, 세계 각국은 저마다 지구로부터 4개월 떨어진 곳에 있는 이 먼지 입자를 분석해 우주를 연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그리고 인구 천만의 작은 나라, 체코에서 야쿠프는 세계의 미옥이 쏠린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인공이 된다.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은 무겁지만, 4개월 뒤 다시 이 푸른 지구에 돌아온다면 자신을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체코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데 일조했던 아버지의 무거운 죄를 씻을 수 있고, 자신은 체코의 영웅이 될 테니……
영화 <그래비티>, <인터스텔라>, 그리고 <마션>을 떠올리게 만드는 《보헤미아 우주인》은 야로슬라프 칼파르시의 첫 데뷔작이다. 신비한 우주 현상과 그것을 밝히기 위한 단서를 가져오는 우주인의 여정으로 큰 밑그림을 그린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야쿠프를 통해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극한의 고독과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감 등 복잡하고도 심오한 감정들을 밑그림 위에 그려낸다. 인간의 감정 외에도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체코의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서던 1989년 벨벳혁명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지금 나는 때를 기다리는 시체였다. 죽음이 이렇게 가까워지면 몸은 성가신 영혼 없이 영원한 안식에 들기를 고대한다. 사람의 몸이란 이렇게 간단하다. 맥박이 뛰고 분비하고 삐걱거리면서 한 박자, 두 박자씩 한 시간 또 한 시간을 채워간다. 몸은 노동자이며 영혼은 탄압을 일삼았다. 노동자 계급을 해방시키자. 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낄낄대며 웃을 뻔했다. (p. 186)
처음 지구를 떠나 초프라로 향하는 야쿠프의 모습은 영화 <마션> 속 장면을 연상케했다. 홀로 화성에 남아 자신이 생존하는 과정을 일일이 녹화하듯이, 야쿠프도 자신이 초프라로 가는 모습들을 영상 통화를 통해 지구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한다. 지구에서 멀어지면서 그에게 큰 걱정을 남겼던 것은 지구에서 자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외계 생물체와 마주하게 된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초프라로 떠나기까지의 일생을 회상한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굉장히 시크한 문체로 야쿠프가 느끼는 감정들을 묘사한다. 차분하고 냉정한 어투로 읊어가는 그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가 상당히 외로운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다. 또, 아버지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대신 짊어지면서 고독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음을 알게 된다. 야로슬라프 칼파르시는 이 사실을 야쿠프 스스로가 느끼기보다는 그의 아내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얼마나 괴로웠을지에 대해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그이는 어릴 적부터 죄책감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지른 죄라는 큰 짐을 어깨에 메고 다녔죠. 하필이면 그는 우주 비행사가 되었어요. 고귀하고 멋진 일이지만 구원을 추구하는 그이를 따라갈 의지가 저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이는 먼 우주에 뭔가 마법이 있어서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거든요. 자꾸 억울해지죠. 그래서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어요. 남은 인생이 아직도 긴데, 내가 원하는 건 뭐지? 필요한 것. 야쿠프가 자기 목표를 추구하면서 아내는 기다릴 거야, 언제나……라고 생각하는 동안 난 뭘 하지? (p. 332)
유한적이라고 생각했던 자신 속에서도 어쩌면 무한한 갈망이 있어 당황할지도 모른다. 고독함과 갈망,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감정들을 느끼고 싶다면 《보헤미아 우주인》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그렇다. 이 세상에 남겨진 것들이 있다. 나는 우주를 지나 여행했고, 비할 데 없는 진실을 목격했지만 여전히 이곳 지구의 생활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 어떤 것들은 불멸의 영혼 속에 존재하면서 자신의 무한히 깊은 곳에 있는 모든 것을 느끼기를 갈망한다. 우주 그 자체처럼 끝이 없고 무한히 확장한다. (p. 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