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파단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의 기억력은 그리 온전하지 못하다. 이틀 전 저녁 식사로 무엇을 먹었냐는 질문에 누군가는 그때의 순간적인 상황이 떠올라 대답할 수도 있고, 혹은 아예 대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의 기억은 마치 한 권의 사진첩 같은 느낌이다. 모든 상황들을 영상처럼 기억하는 것처럼 느끼고는 있지만, 실제 그 상황에 대해 묘사하라는 질문을 받는 순간 정지된 한 장면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조각 나누어진 기억의 파편들을 조합할 수 있는 일반 사람들과는 달리 짧은 사이의 기억 파편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한 남자, 《기억 파단자》는 조각난 기억을 가진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다음 순간, 니키치는 그 의문에 대한 답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앞 문장에 있는 '나'에게 알려주는 메모였다. 왜냐하면, 이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전향성 기억 상실증에 걸린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p. 11)

   니키치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같은 상황을 반복한다.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자신 근처에 놓인 노트를 펼쳐본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노트 주인이 써놓은 메모들을 읽으며 그가 힘든 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내 니키치는 자신이 그 노트의 주인공임을 깨닫는다. '전향성 기억 상실증'. 니키치는 수십 분간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의 기억 상실증을 가지고 있어 사고 이전의 기억을 또렷한 데 반해 그 이후의 기억은 노트에 의존하며 생활한다.
   화법 교실에 다닌다는 노트의 기록에 따라 화법 교실로 갔던 니키치는 이후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 작은 카페로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노트를 정리하고 있던 니키치에게 실밥이 묻었다며 한 남자가 다가오게 되고, 이내 무언가 머릿속을 바꾸어놓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어리둥절하던 니키치는 곧이어 그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지만, 지하철에서 그를 또다시 보게 된 니키치는 무언가 수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 남자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이전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자주 목격되는데……

  괴인의 손이 몸에 닿는 순간 니키치는 졸음이 엄습하며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정신이 돌아오자 먼저 니키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머리카락이 길고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성이 어떤 남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괴인이 심은 가짜 기억임이 분명했다. 니키치는 그것을 확실하게 자각한 것이다. (p. 169)




  《앨리스 죽이기》의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소재로 기억 추적 스릴러를 써 내려간다. 《기억 파단자》는 기억이 수십 분 밖에 유지되지 않는 남자와 반대로 사람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초능력을 가진 남자의 대결 구도를 유지해가며 인간의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며 그 어떤 것도 진실이라고 믿지 못하게끔 만든다. 심지어 마지막 결말에 다다르며 고바야시 야스미는 니키치의 파단된 기억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하는데, 노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니키치의 상황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과연 그 모든 것이 확실하게 끝났는지 의심하게 된다.

  인간의 기억이란 원래 아주 신뢰도가 낮은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 자세한 내용들은 점점 사라진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이틀 전의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흔한 일이죠. 그러니까 기억은 영화나 소설처럼 하나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빛바랜 사진이나 문장을 갈겨쓴 것처럼 작은 조각 같은 것입니다. (p. 187)

  《기억 파단자》를 읽다 보면, 매일 아침마다 기억을 잃는 니키치의 상황 때문인지 항상 비슷한 쳇바퀴를 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니키치가 괴인, 살인마라고 지칭하는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가 나타난 순간,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그러기에 누군가는 조금 지루한 전개라고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의외로 빠른 전개 속도라고 느낄 수도 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화법 교실의 교코 선생이 니키치에게 호전되고 있는 것이 보인다고는 했지만, 초반부에 심하게 당황하던 니키치의 모습은 후반부로 갈수록 굉장히 차분해지고 냉철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독자로서 그가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게 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도쿠씨나 노란 치아의 여인은 고바야시 야스미의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니, 왠지 모를 흥미감이 생겨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앨리스 죽이기》를 비롯해서 그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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