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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베첸토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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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음악을 연주했고, 그는 어딘가 달랐다. 그가 연주한 것은…… 그가 연주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 이해가 될까? 어디에도 없는 그런 것.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그가 피아노에서 일어나면 그 음악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다. (p.23)
예술가의 삶은 간혹 그들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내린다. 때로는 화려하고, 때로는 비참한 삶의 결정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남긴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원작 소설 《노베첸토》는 배 위에서 일생을 보낸 한 사내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그의 음악과 더불어 삶과 운명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채 100페이지도 되지 않는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삶을 그려내지만 읽는 독자들은 얇은 책의 두께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한 세기가 시작되는 첫 날, 보스턴 항구에 도착한 버지니아 호의 피아노 위에 놓여진 작은 상자 속에서 태어난 지 열흘도 되지 않은 아기가 발견된다. 아기를 발견한 배의 노동자 부드먼은 그에게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마치 자신의 아들인양 아기를 보살핀다. 노베첸토가 8살이 되던 해, 사고로 인해 부드먼이 죽게 되고 노베첸토는 또 다시 고아가 되버린다. 태어나서 땅을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채 살던 노베첸토는 어느 날,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큰 호응을 받은 그는 건반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연주하며 살아간다.
하루는 노베첸토에게 연주하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건반 위에서 손가락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동안 늘 고개를 정면으로 향하고 어딜 그렇게 뚫어져라 보느냐고도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아름다운 나라에 갔었어. 여자들의 머리칼에서 좋은 향기가 나고 사방에 불빛이 반짝이고 호랑이들이 가득했지." (p. 43)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노베첸토라는 인물을 통해 '재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는 재즈 창시자로 불리는 젤리 롤 모턴을 실존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사람들이 더욱 더 노베첸토의 재즈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독특한 것은,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노베첸토가 연주하는 재즈에 대한 곡명을 따로 적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건반 위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그의 손가락들을 상상하고, 읽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뿐이다.
영화를 보지 않은 터라 《노베첸토》를 읽는 내내 노베첸토에 대한 그림이 자유롭게 그려졌다. 배에서 고정되지 않은 피아노에 앉은 채 연주하는 모습은 마치 영화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라라랜드>에서 재즈바를 오픈하고 자신의 마음을 피아노 연주로 표현하던 세바스찬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또, 노베첸토에 대한 소문을 듣고 배에 올라 타 연주 대결을 펼친 젤리 롤 모턴과의 모습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가장 유명한 장면인 피아노 배틀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친 버지니아 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노베첸토의 모습은 영화 <타이타닉> 속 배가 가라 앉는 순간까지 피아노 연주를 하던 악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이런 면에서 두말할 필요 없는 천재였다. 들을 줄 알았고 읽을 줄 알았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그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진 흔적,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았다. 사람들에게 이 모든 것이 쓰여 있다. 그는 집중해서 이런 것들을 읽고 분류하고 배열하고 정리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나가는 광할한 지도에 매일 작은 조각을 끼워넣었다. 그것은 이 세상, 온 세상의 지도였고 끝에서 끝까지 거대한 도시와 작은 카페들, 긴 강, 물웅덩이, 비행기, 호랑이들로 가득한 멋진 지도였다. (p. 45)
《노베첸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장면은, 배에서 내려야겠다고 마음 먹은 노베첸토가 배와 육지를 연결하는 계단 사이에서 고뇌하는 장면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밑으로 내려가던 그는 육지를 바라보다 다시 배로 돌아온다.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그 모습을 통해 노베첸토가 느끼는 두려움을 표현한다. 그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유한한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무한한 삶의 영역으로 걸어가는 그 느낌. 어떤 것이 정답인 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그 느낌. 노베첸토의 고뇌를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착잡함을 느끼게 된다. 건반 위의 삶은 그에게 전부였지만 한편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 자유를 갈망하고 그것을 소망하는 연주를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