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의 비밀 편지
스텐 나돌니 지음, 이지윤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란다. 편지를 쓰면 내가 더 이상 여기에 없을 때도 누군가는 내가 남긴 말을 볼 수 있거든. (p. 303)

  편지를 쓰는 순간에는 종이 위에 한 글자씩 꾹꾹 눌러 쓰며 오로지 한 사람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 편지를 받게 될 수신인. 그 수신인을 위한 진심과 사랑은 편지에 남겨지며 언제든 발신인이 그리워지거나 생각날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귀여운 손녀를 사랑한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조금은 특별한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편지를 쓰기로 한다. 《마틸다의 비밀 편지》는 할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12통의 편지로 이루어진 스텐 나돌니의 장편 소설이다. 손녀 마틸다를 수신인으로 하여 편지 형식으로 진행되는 《마틸다의 비밀 편지》는 '마법사'의 삶을 그려낸다.
  할아버지 파흐로크는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깨달았던 12가지의 마법을 편지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가장 어린 시절에 발견될 수 있는 마법사의 자질인 팔 늘이기부터 아름답게, 그리고 다르게 보이기, 공중에 뜨기와 날기, 투명인간 되기, 벽 통과하기 등등 마법사들이 연령대별로 배울 수 있는, 혹은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는 마법들을 이야기한다. 파흐로크는 이런 마법들이 자신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등장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사랑하는 마틸다, 끈기를 잃지 말고 열심히 배우렴. 모든 능력들은 끊임없이 시도하다 보면 저절로 얻어지는 법이란다. 때로는 오랫동안 발전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거야. 하지만 마법은 어느 순간 선물처럼 나타난단다. 네가 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즐거울 때면 네가 아직 못하는 것에 대한 씁쓸함도 잊지 말거라. (p. 34)

  저자 스텐 나돌니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마틸다의 비밀 편지》를 전개한다. 큰 액자 속에서는 2030년에 어른이 되어 이 편지를 읽을 손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담아 편지를 쓰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그려내며, 작은 액자 속에서는 할아버지 파흐로크가 겪은 두 차례의 전쟁과 이후 2017년까지의 삶을 그려낸다. 파흐로크의 경쟁자 슈나이데바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스텐 나돌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독재자의 편에 선 슈나이데바인의 행적과 징병으로 부대에 들어가게 된 파흐로크의 대비되는 삶을 통해서 그 당시의 전쟁이 얼마나 끔찍하고 참혹했는지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마틸다의 비밀 편지》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마법사'라는 픽션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지각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참혹한 전쟁상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현실에 기반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편지 속의 모든 화자들은(파흐로크, 파흐로크의 유언 집행인 레일란더, 파흐로크의 조력자 발데마르 3세) 모두 현실에 기반한 것처럼 이야기하기 때문에 더욱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구분하기에 어려웠다. 그러기에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이 모든 것이 이 세계 어디에선가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항상 변신을 거듭하며 살았다. 마법 기술이 아니라 인간적인 변신 말이야. 그럴 수 있을 만큼 내 인생은 충분히 길었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어느 정도 믿음을 유지하며 살았지.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산단다. 믿음이 없으면 길을 잃기 쉬워.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다 보면 긴 세월이 위험하게만 여겨질 때도 있어. 하지만 또한 그 세월 속에서 믿음이란 개념이 재발견되는 순간도 적지 않단다. (p. 382)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서 파흐로크는 훗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낸다. 마법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없어도, 그저 꿋꿋하게 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지혜도 비슷하지. 지혜에 이르는 마법은 없어. 하지만 그게 아쉽지도 않단다.(p.343)" 라는 말과 함께 마법이 아니더라도 이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편지를 통해 손녀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그 편지를 몰래 엿보는(?) 독자들도 《마틸다의 비밀 편지》를 읽으며 삶을 영위하는데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전 세대에게 배우는 지혜의 값은 너무도 크다. 우리가 그들의 사랑을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ecoming 비커밍 - 미셸 오바마 자서전
미셸 오바마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벌판을 달린다.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어린아이처럼 팔을 흔들면서, 명랑한 함성으로 침묵을 깨면서, 달린다. 메마른 풀을 헤치고 꽃을 뛰어넘으면서 달린다. 처음에는 당연하지 않았을지라도 이제는 당연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벌판을 달려야 해! 당연히 그래야지! (p. 127)

  해맑은 모습으로 벌판을 열심히 달렸던 소녀는 자라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상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가꾸던 그녀는, 직장에서 만난 한 남성과 관계를 맺으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된다. 대중들에게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버락 오바마의 옆자리를 늘 지키고 있던 미셸 오바마의 내면 이야기, 그녀의 자서전 《비커밍》은 버락이 아닌 미셸 그녀의 온전한 이야기를 그려낸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가 사회로 발을 내디디면서 어떤 문제들을 마주하게 되었고, 그녀의 도약을 위한 어떤 발판이 되었는지 5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 속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미셸은 자신의 삶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자신이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그 이전에 자신이 흑인이라는 점. "그때 느꼈던 불편함을 돌아보면, 그 순간 내 인생의 숙제를 직감했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내 출신과 내가 바라는 미래를 내 정체성과 조화시켜나가야 할 터였다.(p. 67)"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보낸 시카고를 떠나 프린스턴 대학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소수의 흑인 여성이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 더 강인해지기로 결심한다. 노력과 결과의 작용을 좋아했던 그녀는 대형 로펌 변호사가 되었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남자, 버락 오바마를 만나게 된다.

  그 시절은 우리의 황금기였다. 결혼 생활의 균형 면에서도 더할 나위 없었다. 그는 그의 목표를 추구했고, 나는 내 목표를 추구했다. (p.248)

  미셸은 버락을 끝없이 지지했다. 그녀가 그녀의 삶을 무척이나 사랑하듯이, 버락이 사랑하는 삶을 존중하고 구축해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로 했다. 더구나 세상에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씨앗을 남기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은 버락의 소망과 일치하며 그의 정치 활동을 지지한다. 《비커밍》의 1부는 한 소녀가 자신의 삶에 놓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면, 2부에서는 자신의 목표를 확고히 하고 이루어가면서 더 강인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버락의 정치 활동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자 미셸은 이제 가정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일들과 가정생활, 그리고 버락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모두 맡으며 그녀가 겪은 시간들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미셸은 당시에 그녀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었을 고민들을 굉장히 시원하고 쾌활하게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태도를 보며, 그녀가 상당히 강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버락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백악관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삶은 더욱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그녀에게 '성난 흑인 여성'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사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잘 살피는 세심한 여성이었고 한편으로는 모든 이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강한 여성이었다.

  나는 위로에 그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나 또한 살면서 힘 있는 사람들로부터 공허한 말을 많이 들어보았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입발림 소리를 해놓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고, 가능하다면 내 목소리를 활용해 목소리 없는 사람들을 드러내겠다고 결심했으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놔두고 떠나는 일은 않겠다고 결심했다. (p. 505)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비커밍》을 집필한 목적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대담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미셸은 여전히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becoming) 이었다. 자유롭게 벌판을 뛰어다니던 소녀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한 걸음씩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다.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역할에 서기도 했다. 그렇게 미래를 보는 시각이 조금씩을 달라졌고 이제 쉰네 살이 되어버린 미셸은 앞으로 더 나아가는 중이다.

  우리가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고 들려주는 것,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는 것,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 힘이 된다. 그리고 기꺼이 남들을 알고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내게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가 되는 일이다. (p.557)

  "나는 내 일이 좋았다.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내 삶도 좋았다.(p.298)" 자신의 삶을 사랑한 여성이 하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이 책, 《비커밍》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을 덮으면서 생각했다. 우리 모두 무언가가 될 수 있다. 아주 크지 않아도 된다. 우선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한 걸음씩 뗀다면, 우리 모두 무언가가 될 수 있다. 그녀의 이야기도, 우리의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짝 미친 것 같아도 어때?
제니 로슨 지음, 이주혜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우울증에 걸리면 '정상인'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탐색할 수 있게 되며, 때로는 그러도록 강요받는다. 자신의 마음이 자꾸 자산을 원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병에 걸렸다고 상상해보라.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악성 장애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p. 17)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은 더 이상 낯선 병명이 아니게 되었다. 연예인들은 방송에 나와 자신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고백하는 것이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많은 일반인들은 그들의 고백에 깊이 공감하고,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마음의 감기'라고 불리는 우울증을 감추기보다 당당히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살짝 미친 것 같아도 어때?》는 저자 제니 로슨이 자신의 블로그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적어내려 간 것을 모아둔 책이다. 자신의 우울증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제니 로슨은 자신의 삶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간혹 그녀가 정신을 놓지 말아야 할 타이밍에 정신을 놓는다고 할지라도, 제니 로슨은 이 모든 이야기들을 굉장히 위트 있는 문체로 풀어낸다. 《살짝 미친 것 같아도 어때?》를 읽다 보면, 그녀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맞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이건 엄연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는 결코 그녀의 아픔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격하게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그녀의 노력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지기에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테이블 밑에 숨거나 화장실에 숨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에 필요할 때 숨을 자유를 허락하는 삶을 만들어왔음을 안다. 불안증이 공격해올 때, 그렇게 느껴지더라도 실제로 내 몸이 나를 죽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자살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지 않으면 교활한 우울증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p. 79)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을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 지내는 상태가 있다. 일상, 꿈, 직장, 인간관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등 생각보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깊은 슬픔의 순간은 너무도 많다.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른 감정의 깊이로 찾아오기 때문에 우울증이란 병은 생각보다 지독하게 느껴진다. 우울증이 찾아오고 나서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을 보인다. 제니 로슨은 자신의 삶에서 행복해지기 위한 목표를 세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시선으로 자신의 삶과 일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박제된 너구리 인형을 가지고 고양이와 논다거나 혹은 코알라 복장을 한 채 아기 코알라를 안기 위해 호주를 방문한다거나.

  어쩌면 다른 사람의 감정을 측정하는 거울이 내게 맞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 저울은 더 크거나 작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저울 대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곳을 헤매며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나는 발견될 것이고, 누군가 왜 내가 이렇게 생겼는지 설명해줄 것이다. 뭐, 아닐 수도 있고. (p. 125)

  우울증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 《살짝 미친 것 같아도 어때?》의 이야기들은 모두 '행복'을 찾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작은 악마처럼 느껴지는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제니 로슨의 다양한 시도는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겁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운을 북돋아준다. 누구든지 이렇게 유쾌하고 즐거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계속해서 내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이 내 삶이고, 언젠가는 이 삶에 익숙해질 테니까. 어쩌면 언젠가 비행기나 무대에 갇히게 되면 똑같이 반응할지도 모른다. 아마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고 느긋하게 내 삶을 즐기게 될지도 모른다.
  또 언젠가는 솔직한 진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저 숨 한번 쉬고 계속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진실을. (p. 328)

  그녀만큼은 아닐 것이지만 때로 나도 깊은 우울감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때가 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회의감과 더불어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오는 지루함과 허무함 등이 겹치면서 스스로를 어떤 구덩이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매일 즐거운 순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처럼, 나도 나만의 방법으로 그 구덩이 속에서 나올 수 있었다. 어쩌면 그 구덩이가 생각보다 깊진 않았을지도 모르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태도다. 제니 로슨이 그랬듯이,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혹시 지금 우울감을 느끼고 있는 당신도 충분히 그것을 떨쳐낼 수 있다고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 라스트 레터
조조 모예스 지음, 오정아 옮김 / 살림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를 써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편지를 쓰는 일이 드물었다. 예쁜 편지지를 하나 사놓고 그것을 가득 채우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은 물론이었고, 그 편지에 내가 하고 싶은 모든 말과 마음이 담길 수 있을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편지지 위에서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차마 하지 못할 말들도 다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다. 상대방의 눈을 보고 차마 하지 못할 말들이 상대에게 어떻게 전해질지 몰라 편지지에 그 진심을 담아내기 어려웠다.
  《미 비포 유》로 베스트 작가 반열에 오르며 세계적인 로맨스 작가가 된 조조 모예스의 또 다른 작품 《더 라스트 레터》는 그녀만의 로맨스 방식을 보여준다. 1960년과 1964년, 그리고 40년이 넘어서 2003년까지의 긴 시간을 넘나들며 조조 모예스는 또 하나의 로맨스를 써 내려간다.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랑을 깨닫는 두 남녀를 통해 조조 모예스는 편지가 가져다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더불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두근거리게 만드는지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당신에게 느끼는 내 감정이 두려워요. 누군가를 이만큼이나 사랑한다는 게 두려워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늘씬한 손가락이 칵테일 냅킨을 접어 비틀었다. (p. 216)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있던 제니퍼는 의식이 들어 깨어나게 되지만, 이내 그전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다. 매일같이 자신을 위해 병실에 찾아오는 남편 로런스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칭찬을 하지만 제니퍼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낯선 느낌을 받는다. 퇴원 후 집에 돌아온 제니퍼는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삶이 모두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매일 저녁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며 사교계 파티에 참가했다는 자신의 지난 과거가 생각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어버린 것만 같은 기시감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런 제니퍼의 옆에서 로런스는 그녀에게 좋았던 부부 생활을 각인시킨다.
  그러나 어느 날 책장을 정리하다가 편지 한 통을 발견한 제니퍼는 자신이 잊어버린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B'라는 이름으로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상대방을 찾고 싶다는 목표감에 휩싸인 제니퍼는 그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로런스는 제니퍼에게 사고가 나던 날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로부터 4년 후, 제니퍼는 남편 로런스와 참가한 사교계 파티에서 자신의 가슴이 알아보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제니퍼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뭔가 잃어버린 것처럼요. 퍼즐 조각이 모두 맞춰지지 않은 것 같은 느낌말이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제발 날 안심시켜줘요. 제니퍼는 속으로 그에게 간청했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안아줘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조금 있으면 모든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말해줘요. (p. 91)

  1부와 2부는 1960년과 1964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편지라는 매개체는 굉장히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다가온다. 앤서니는 제니퍼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편지에 녹여내 그대로 전하지만 제니퍼는 기혼 여성이라는 자신의 처지에 그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한다. 남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음에도 제니퍼는 이혼 여성에 대한 잣대가 심했던 당시 시대 배경 때문에 그와의 이혼을 쉽게 결심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 사이에서 제니퍼는 사랑과 이혼 중에서 불안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의 감정이 더 커진 그녀는 용기를 내고자 한다. 조조 모예스는 제니퍼라는 인물을 통해서 1960년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냉철하게 그려내며,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감정선을 더더욱 세밀하게 묘사한다. 
  40년이 흐른 후 2003년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3부에서는 1부와 2부에서 달라진 시대를 보여준다. 제니퍼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엘리라는 인물을 통해 조조 모예스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이고 더욱 용감한 여성상을 보여준다. 달라진 시대 배경의 흐름에 따라 여성을 향한 사회의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찾아내는 것도 《더 라스트 레터》를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복잡한 게 하나도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아, 로리. 우린 모두 결국에 가서는 타협하고 사는 거지." (p. 533)

  편지의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조조 모예스만의 로맨스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더 라스트 레터》를 읽어보길 권한다. 책의 마지막을 덮을 즈음에는, 문구점에 들러 예쁜 편지지를 사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지금 곁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의 기원
로버트 거워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대체적으로 잘못된 원인을 바로잡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간혹 이미 커져버린 관계로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나타나게 된다. 1918년 11월 11일 종전된 제1차 세계대전은 종식과 더불어 유럽의 혼란을 안겨준다. 영국과 프랑스 등 승전국이 주도한 역사만을 주목하고 있던 우리에게 역사학자 로버트 거위스는 지금까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등 패전국들의 상황에 주목한다. 그들의 상황을 통해 로버트 거위스는 궁극적으로 여전히 유럽과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남아있는 갈등들의 원인을 바로 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바라본다.

  서구의 많은 이들은 1차 세계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고'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한 안전한' 곳으로 만들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가? 결국 현실은 그 정반대였고, 세계대전이나 1919~1920년의 강화조약들이 제기했지만 해소하지 못한 쟁점들은 1914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힘의 불균형을 가져왔다. 대전 전에 자리잡고 있던 유럽 질서는 흔히 여겨지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다. (p. 27)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안정과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종식되지 않은 갈등과 혼란들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으로 시작된다.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의 시작은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면서 러시아를 장악하게 된 이야기부터 다룬다. 볼셰비즘에 대해 러시아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러시아 외부의 유럽 사람들 역시 견해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볼셰비키를 대표로 하는 공산주의와 그와 반대되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헤게모니 싸움이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등을 중심으로 중유럽과 동유럽, 남유럽에서 발생하게 된다. 이 헤게모니 싸움에서 반유대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볼셰비즘'은 러시아에만 특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서쪽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런 인상은 1918~1919년 중부 유럽의 여러 혁명들로 강화되었다. 당대인들은 볼셰비즘을 곪는 상처나 전염병으로 인식하고 묘사했다. 이는 1919년 봄에 볼셰비즘이 더 서쪽으로, 중유럽의 심장부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되는 관념이었다. (p.140)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유대인 학살을 일삼았던 나치즘의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던 계기가 되었다. 볼셰비즘이 반유대주의의 원인이 되었던 사실을 비롯하여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저항적 이데올로기의 치열한 싸움을 로버트 거위스는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읽다 보면, 당시의 유럽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으며 극심한 갈등을 보이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중유럽과 동유럽이 혁명과 반혁명의 혼돈에 빠진 가운데 패전국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파리강회회의가 1919년 1월 중순 개최되었다. 영국의 총리로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훗날 이때를 돌이켜보며 이 강회회의가 지난 세기 유럽의 대규모 강회회의와 성격이 달랐음을 인정했다. (p. 229)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패전국에 복수하는 듯했던 연합국의 태도는 지나친 강화 조약을 강요했고 제2차 세계대전의 기반이 된 민족주의 열정에 불을 지피는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에 찾아온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유럽은 다시 한 번 위기와 폭력적 무질서로 빠져들면서 '민주주의에 안전'한곳으로 바뀔 것이라는 윌슨의 낙관적 예견과는 반대로 유럽은 불황으로 인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주의자였던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나치즘과 파시즘을 더욱 강조하게 되고, 이후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세계사에 대해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는 못했다. 역사에 대해 흥미는 가지고 있었으나 세계사라는 넓고 광범위한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다양한 세계의 문화와 언어, 생각들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지식의 그릇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중학교 이후로 세계사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적어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 《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를 읽으면서 꽤나 고충을 겪었다. 우선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승전국이 아닌 패전국의 시점에 집중하여 전후 사정을 풀어놓는 것과 더불어 아직은 미흡한 당시 사건 배경 때문에 이해하기에 조금 난항을 겪긴 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 로버트 거워스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대전 100주년에 시리아와 이라크에서의 내전, 이집트에서의 혁명, 팔레스타인 문제를 둘러싼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격렬한 충돌이 뒤따르고 있는 데에는 섬뜩한 역사적 아이러니가 없지 않다. 이 갈등들은 대전과 그 직후의 여파가 제기했지만 해결하지 못한 이슈들 가운데 최소한 몇몇은 오늘날까지 우리한테 남아 있다는 증거를 제공하고 있는 게 아닐까?(p. 353)" 과거를 통해 우리는 현재를 배우고 미래를 꿈꿔갈 것이다. 그리고 과거가 남긴 폭력의 씨앗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