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인문학 - 그 골목이 품고 있는 삶의 온도
임형남.노은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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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동네는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면서도 늘 조용하다. 대부분 이곳을 잠시 지나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이곳에서 생활하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면 복잡하고 좁고 붐비지만 조용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 사는 동네가 펼쳐져 있다. 무수한 집과 무수한 이야기와 가늘고도 길게 끝없이 이어지는 골목이 삶을 덮고 굼실굼실 기어간다. (p. 139)

  90년 대생인 나에게 '골목'은 추억의 공간으로 남아있다. 어린 시절 자칭 '골목대장'이었던 나는 동네 친구들과 골목을 누비며 뛰어다녔다. 모험이라며 골목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숨바꼭질이나 땅따먹기 등 다양한 놀이를 했다. 그렇지만 어느새 골목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아파트나 도로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끌벅적했던 골목은 사라지고, 이웃 간의 단절된 느낌으로 변해가는 곳을 보며 씁쓸해짐을 느끼고 있다.
  《골목 인문학》은 그런 씁쓸함을 채워주는 책이다. 서울의 골목들을 비롯하여 담양, 창원, 군산 등 국내의 여러 골목들에 관한 이야기는 물론 중국, 일본까지 다양한 골목의 정경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시끄러운 도심 속에서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의 골목의 모습이나 각국의 문화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골목의 모습은 읽는 내내 힐링 되는 느낌을 자아낸다.

  도시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다. 그리고 사람의 몸처럼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골목이 잘 살아 있고 건강해야 도시 또한 생기 있게 살아나는 것이다. 큰길이 과시와 소비와 속도를 위한 것이라면, 골목은 그 도시의 맨얼굴이며 그 도시의 정체성이며 또한 삶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p. 310)

 《골목 인문학》의 저자 임형남, 노은주는 골목마다 품고 있는 삶의 온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어우러진 골목을 노닐면서 그들은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내음을 잔뜩 만끽한다. 글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사람 내음은 읽는 이들도 굉장히 따뜻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이제는 삭막해진 아파트의 삶과는 상반되는 분위기를 자아내어 왠지 모를 아쉬움을 남긴다.





  골목길은 일생을 통해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많은 위로를 준다. 이런저런 일들로 생각이 복잡할 때 예전에 걷던 골목길을 찾아간다. (p. 268)

  《골목 인문학》을 다 읽고 나면, 글 속의 골목들을 찾아가고 싶어진다. 이전에 방문한 적이 있다면 새로운 모습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새로 방문하는 골목길은 신선한 느낌을 줄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과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골목길들이 오래 보전되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겐 새로운 영감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추억일지도 모를 골목길. 그곳을 자유롭게 거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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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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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체 릴레이 이론을 채택할 경우, 소거법을 적용하면 결국 그 남자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어쩌면 이걸로 릴레이 이론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얘기지. (p. 301)

   1989년에 발표한 히가시노 게이고의《브루투스의 심장》이 새로운 표지를 입고 독자들에게 다시 돌아왔다. '로봇'과 관련하여 미래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지만, 로봇보다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세계를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할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몇몇 작품을 읽다 보면, 완벽 범죄를 꿈꾸는 주인공이 화자가 되고 어느새 독자들은 그에게 마음을 투영하게 되는데, 《브루투스의 심장》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인간의 욕망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한 데 어우러지도록 만들며 처절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그려낸다.
  어두운 가정환경 속에서 성공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다쿠야는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임원실 직원인 야스코에게 접근하여 정보를 얻고자 한다.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관계였지만, 어느새 내연 관계가 되어버린 다쿠야는 야스코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러나 때마침 전무 딸 호스코와 결혼할 기회가 찾아온 다쿠야는 야스코에게 자신의 아이가 맞는지 추궁하며 그녀를 거절한다. 얼마 후, 다쿠야는 나오키의 호출을 받게 되고 야스코에게 자신을 비롯한 두 명의 남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 남자는 자신들이 아이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녀를 죽이기로 계획한다. 서로의 알리바이를 위해 그들은 시체를 바통으로 한 '릴레이 살인'을 저지르기로 한다. 그러나 살인 당일, 다쿠야와 하시모토는 자신들이 옮기던 시체가 야스코란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아. 태어날 때부터 계층이 나뉘어져 있고, 자신은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그런 인간이 가장 높은 곳에 오르려 하고 있다. 그걸 위해선 사람도 죽일 수 있다…….(p. 407)

   《브루투스의 심장》의 소설 배경은 중공업을 하는 로봇 공장이다. 로봇으로 인한 자동화 산업이 이루어지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한 회사에서 로봇 관리자의 죽음으로 소설을 시작된다. 인간과 로봇의 대비되는 성향을 그려가며 히가시노 게이고는 '성공'을 위해 추악한 짓까지 선뜻하는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다.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로봇과는 달리 인간은 끊임없이 더 높은 곳을 위한 상승을 꿈꾸며 그 선을 넘어서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 준비 과정에서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과감히 없애고자 하는 인물들의 행동들은 때로 로봇보다 더 냉철하다고 생각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ABC 살인사건이라는 플롯 구성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이미 주인공을 범인으로 만들고, 역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소설을 전개해 나간다. 어느새 독자들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을 의심하게 된다. 사실 형사의 기막힌 추리보다 주인공의 추리가 더 스릴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짓말을 하고, 게으름을 부리고, 겁을 먹고, 질투나 할 뿐이다.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대체로 인간은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살 뿐이다. 지시가 없으면 불안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프로그램에 따라 하는 일이라면 로봇이 훨씬 우수하다. (p. 163)

  오랜만에 고전 추리소설 한 권을 읽은 느낌이었다. 대체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은 결말이 다가오기 전까지 범인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큰 특징인데, 《브루투스의 심장》역시 그러하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클래식한 추리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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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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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은 이미 이곳에 와 있어요.



  비채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새로운 신간, 《블러드맨》을 읽게 되었다. 전권은 아니지만 간간이 읽어왔던 모중석 스릴러 클럽의 책들과는 차원이 다른 엽기적이고 잔혹함이 물씬 풍겨 나오는 책이었다. 빨간색이라는 강렬한 색감이 아닌 검은색으로 '피(blood)'를 표현한 표지는 범인의 엽기적이고 잔혹한 행위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만약 검은색이 아니라 빨간색으로 표현되었더라면, 그 색감의 농후함은 굉장히 짙었을지도 모른다.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아버지가 스스로 손에 불을 붙이고 창문을 뛰쳐나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제이크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FBI 출신의 제이크가 고향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어떤 살인 사건 현장에 불려가게 된다. 유명한 화가였던 아버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왔던 것과는 달리 제이크는 사건 현장을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그림을 그려낸다. 그가 달려간 살인 현장에는 살가죽이 벗겨진 채 죽어있는 한 여성과 아이의 시체가 놓여 있었고, 제이크는 과거에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어머니가 떠오르게 된다. 한편, 거대한 허리케인 딜런이 강타할 것이라는 예보가 마을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된다.

  제이크는 머릿속으로 기상천외한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 순간을 그리는 능력이 있었다. 그 괴상하고 섬뜩한 재능은 아버지의 것을 뛰어넘었을 뿐 아니라 괴물들을 사냥하는 데 빛을 발했다. (p. 31)

  '다음 세대의 스티븐 킹'이라는 찬사를 받은 로버트 포비의 첫 장편 소설 《블러드맨》은 제이크의 시선을 따라 잔혹한 살인마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허리케인 딜런이 마을을 강타할 것이라는 예보와 더불어 사건이 진행되면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더하여 범인에 대한 명확한 묘사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 공포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제이크의 아버지 제이콥이 그렸던 수천 장의 기괴한 그림들, 끊임없이 외치는 알 수 없는 그의 말들은 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또 아버님을 어떻게 해드리고 싶어 하는지도 파악하는 중입니다, 콜 씨. 이건 아버님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이 얼마나 감당할 생각이 있는지 알아야 해요.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당신이 아버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요. (p. 301)

  세밀하고 자세한 장면 묘사를 통해 독자들이 모든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하긴 했지만, 잔혹하고 악랄한 살인마의 수법을 제외하고는 내 기준으로 매력적인 부분을 찾기란 조금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300페이지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반복되는 연쇄살인에 어느 정도 범인이 누구인지 예상할 수는 있었기에 끝까지 그 짜릿함을 유지하기까지는 어려웠고 범인이 밝혀진 뒤에는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상황들이 머릿속에 남아 아쉬웠다. 그러나 모든 결말을 다 읽은 후 첫 살인 사건 현장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 반전에 놀랄 수 있다. 호러와 스릴러 두 가지를 동시에 잡고 싶다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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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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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마는 아무래도 이 시스템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것 같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읽은 SF작품을 떠올렸다. 국민 전원에게 IC칩을 심어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국가가 엄중하게 체크한다는 내용이었다. 기분 나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 DNA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게 같은 말 아닌가. (p. 42)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범죄 예방관리국은 범죄를 예방한다는 목적 차원으로 사람들의 모든 정보를 관리한다. 예지자가 범죄 사실을 알게 되면, 이미 데이터 처리를 마친 예비 범죄자의 모든 신상 정보를 수집하여 범죄 현장으로 찾아간다. 또 다른 SF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에서는 인구 제한 정책을 펼치는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IC 칩을 하나씩 지니고 살아가며, 구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개인의 신상 정보는 데이터화되어 국가가 관리하는 세계를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추리 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등록자》를 통해 비슷한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낸다.
  살인 사건 발생 소식을 들은 아사마는 살인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 수사를 시작하여 범인을 쉽게 검거한다. 개인 정보에 대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고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 예방을 위한 DNA 수집이 이루어진다. 특수분석연구소의 연구원 가구라는 이 계획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 후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결과에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프로그램을 개발한 천재 소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가구라는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누명을 벗기 위해 가구라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관리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울까요. 미국에서 처음으로 DNA 프로파일링이 실용화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게 관리될 거다. 위조카드, 가명, 위조여권 등 위조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유전자는 위조할 수 없다, 라고요. 그러니 DNA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말은 인생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자유라는 단어도 의미가 없어지죠. (p. 156)

   《미등록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DNA를 이용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흡사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진보된 과학 기술에 집중하는 것보다 컴퓨터가 아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에 집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구라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생각하기에 컴퓨터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면, 유일하게 인간이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은 예술 창작 분야라고 생각한다. 가구라는 어린 시절 예술가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내면에 또 다른 자아인 류를 만들어내게 된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류는 가구라의 생활에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만을 보장받기를 바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가구라와 류, 두 인물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그려낸다. 과학을 맹신하는 가구라는 끊임없이 류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여기며, 그를 의심한다. 하지만 류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가구라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면서 자신이 가진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육체에 동시에 있는 그들이지만, 이렇게 대립되는 두 인물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만든다.

  도대체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구성 물질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마음이란 존재할까.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행동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p. 84)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에 집중하도록 만들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과는 분위기도, 포함하고 있는 의미의 깊이도 달랐지만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었다. 전기공학을 전공으로 하여 엔지니어로 활동한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  《미등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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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
카타리나 베스트레 지음, 린네아 베스트레 그림, 조은영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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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께 선물 받은 임신과 출산에 대한 성교육 동화책에 푹 빠져 있었다. 책꽂이에서 자주 꺼내 읽어 모든 내용을 외웠을 정도로. 10개월의 시간 동안 지금의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을까란 호기심은 이제 머리가 커서야 채워지게 되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호기심이 많았던 카타리나 베스트레의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를 읽고서야 말이다. 오슬로대학교 생명과학부에서 세포생물학을 연구하고 있는 카타리나 베스트레는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를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세포생물학의 과정에서 풀어낸다. 인간의 가장 작은 세포인 정자와 인간의 가장 큰 세포인 난자가 만나는 과정부터 시작하여 '나'라는 존재가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세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그려나간다.

  처음 몇 시간, 경주는 끝났다. '나'로 자라날 최초의 세포는 유유히 나팔관 아래로 떠내려간다. 벌써 나에 관한 아주 많은 것이 결정되었다. 내 첫 번째 세포는 이 문장의 마침표보다 작지만, 내 몸을 짓는 데 필요한 모든 설계도가 넉넉히 들어간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신체 기관뿐 아니라 눈 색깔이나 코의 모양까지. (p. 24)

  《내가 태어나기 전 나의 이야기》은 정자와 난자의 수정부터 착상, 그리고 그 이후의 세포 활동들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마치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듯이 카타리나 베스트레는 자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들에게 그 과정을 설명한다. 서서히 태아의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에서 심장, 손가락, 발가락 등등 어떻게 세포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그러한 장기 조직들을 이룰 수 있는지 차근차근 짚어나간다. 
  카타리나 베스트레는 태아의 형태를 갖춰가는 과정을 포유동물이나 양서류, 곤충 등 다양한 생물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책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하고, 이렇게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느낀 생물이라면 단연 '초파리'다. 세포의 운명을 결정하는 분자의 역할을 초파리의 탄생 과정에서 찾아낼 수 있다며, 카타리나 베스트레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해답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세포생물학'이라는 분야에 익숙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다. 이제 곧 두 개의 낯선 손이 내 머리를 잡고 끌어내면 눈부신 불빛이 눈을 때리고, 허파에는 처음으로 공기가 가득찰 것이다.
  나는 숨을 쉰다.
  그리고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건 각자가 더 잘 알 것이다. (p. 167)

  출산의 과정에 이르면서 책은 끝이 나지만, 왠지 모를 벅찬 느낌이 든다. 대략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는 태아를 소중하게 보호했고, 태아는 그 기대에 부흥하며 무럭무럭 자랐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아도 이 과정은 너무도 신비하고 감동적이다. 24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24년 전의 오늘, 첫 숨을 내쉰 나는 이 신비한 과정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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