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자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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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마는 아무래도 이 시스템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 것 같지 않았다. 어렸을 때 읽은 SF작품을 떠올렸다. 국민 전원에게 IC칩을 심어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국가가 엄중하게 체크한다는 내용이었다. 기분 나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개인 DNA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게 같은 말 아닌가. (p. 42)

  SF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범죄 예방관리국은 범죄를 예방한다는 목적 차원으로 사람들의 모든 정보를 관리한다. 예지자가 범죄 사실을 알게 되면, 이미 데이터 처리를 마친 예비 범죄자의 모든 신상 정보를 수집하여 범죄 현장으로 찾아간다. 또 다른 SF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에서는 인구 제한 정책을 펼치는 디스토피아를 그려낸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모두 IC 칩을 하나씩 지니고 살아가며, 구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해야 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개인의 신상 정보는 데이터화되어 국가가 관리하는 세계를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 추리 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미등록자》를 통해 비슷한 또 하나의 세계를 그려낸다.
  살인 사건 발생 소식을 들은 아사마는 살인 사건 현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머지않아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 DNA 수사를 시작하여 범인을 쉽게 검거한다. 개인 정보에 대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고 국민을 대상으로 범죄 예방을 위한 DNA 수집이 이루어진다. 특수분석연구소의 연구원 가구라는 이 계획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얼마 후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결과에 혼란을 겪게 된다. 그러던 중, 프로그램을 개발한 천재 소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고 가구라는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누명을 벗기 위해 가구라는 혼신의 힘을 다한다.

  관리라고 하는 게 더 알기 쉬울까요. 미국에서 처음으로 DNA 프로파일링이 실용화되었을 때, 어린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모든 게 관리될 거다. 위조카드, 가명, 위조여권 등 위조는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유전자는 위조할 수 없다, 라고요. 그러니 DNA를 국가가 관리한다는 말은 인생을 지배한다는 뜻입니다. 자유라는 단어도 의미가 없어지죠. (p. 156)

   《미등록자》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DNA를 이용하여 범죄를 예방한다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흡사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진보된 과학 기술에 집중하는 것보다 컴퓨터가 아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에 집중한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구라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많은 전문가들이 생각하기에 컴퓨터가 모든 것을 관리하고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다면, 유일하게 인간이 지켜낼 수 있는 능력은 예술 창작 분야라고 생각한다. 가구라는 어린 시절 예술가였던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내면에 또 다른 자아인 류를 만들어내게 된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류는 가구라의 생활에 어떠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공간만을 보장받기를 바란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가구라와 류, 두 인물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를 그려낸다. 과학을 맹신하는 가구라는 끊임없이 류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여기며, 그를 의심한다. 하지만 류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가구라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면서 자신이 가진 신념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육체에 동시에 있는 그들이지만, 이렇게 대립되는 두 인물을 통해서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각하게 만든다.

  도대체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구성 물질이 다르다는 것 외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마음이란 존재할까. 그럼 마음은 무엇인가. 뇌라는 물질이 만들어낸, 행동을 조절하는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p. 84)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범인이 누구인지를 추리에 집중하도록 만들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과는 분위기도, 포함하고 있는 의미의 깊이도 달랐지만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었다. 전기공학을 전공으로 하여 엔지니어로 활동한 그의 경험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  《미등록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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