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에 ‘참 쉽다‘라는 말을 하지나 말지 머리말 다음 쪽부터 막힌다. 이해가 안된다. 이 책이 절판이라니 다행이다. 당혹스러움은 나로 끝! 나중에 곡 연습을 위한 정간보(악보)를 볼 때나 봐야겠다.
실연의 연속... 슬픔만 남은 그의 말년.
그 후에도 고흐의 고달픈 연애사는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 몽마르트르에 있던 카페의 주인인 세가토리와 고흐의 말년에 그를 지켜주던 앨리스 미치먼이 고흐의 연인들이었다. 슬픔은 슬픔을 낳는다고 했던가. 이미 사랑과 이별의 상처에 익숙해진 그에게 더 이상의 사랑은 없었다.
아무튼 사람이 권태를 망각하는 것은 그 개인을 위해서든 사회를 위해서든 바람직하지 않다. 권태의 망각은 즐거움의 중독으로 이어지며 악순환을 이루기 때문에 권태를 정면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창조적 열정으로 바꾸는 지혜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그 지혜는 단순히 어느 개인의 양심이나 선택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현상은 물론 구조와 촘촘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직장인을 상상해보자. 그는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기 일쑤고 볼 게 없다는 불평을 늘어놓기도 한다. 우리가 언급했던 수많은 프로그램을 두고 왜 이런 불평을 할까? 우리는 대중문화의 획일성을 지적할 수 있다. 대중문화의 생산자는 모험을 즐기지 않는다. 대중들은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듯 보여도 자신의 입맛을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 따라서 생산자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콘텐츠만을 제공하게 된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모험은 도산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새로움을 가장한 그렇고 그런 콘텐츠가 매일 우리에게 제공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즐거움을 주는 폭력은 늘 존재했다. 예를 들어 로마시대의 검투사나 중세시대의 마녀재판은 권태에 지친 당시의 대중에게 볼거리를 선사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대중매체는 검투사, 마녀재판 등이 제공했던 폭력성을 매일같이 시청자에게 보여주면서 폭력을 일상화하고 있다. 20세기를 지나 특히 인터넷, 모바일폰 등 다양한 디지털 미디어가 발달한 지금은 폭력이 너무나 만연해 있어 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지조차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