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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위구르 사람들이 모두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외로 여행하려는 위구르인은 우선 그 집안이 '깨끗해야' 한다. 당국의 기준에 의하면 '깨끗하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가족이 어떠한 정치적 활동에도 연루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간혹 이것에 대한 검증은 4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학생이나 사업가처럼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깨끗한' 가족력이 있거나 보안국에 줄을 대고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위구르인들 중 나를 지원해주는 학생들이 많지만 공개적으로는 절대 나를 옹호하지 못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레비야 카디르, 알렉산드라 카벨리우스, <하늘을 흔드는 사람>, 열음사, 541쪽

책을 드디어 다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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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소련에는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가 없었을까?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중 중국과 소련의 자본축적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김재원(경상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과 박사과정)

 

서문

박노자는 최근에 자신이 그동안 강연을 하면서 정리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글을 모아서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출판했다. 본인은 오래 전부터 박노자가 쓴 중국과 소련에 관한 글을 꾸준히 읽어봤기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해서 그의 책을 읽어봤다.

먼저 나는 박노자가 책의 5강에서 러시아 혁명이 조선은 물론 중국, 이란, 인도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을 자세히 서술한 것은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노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은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가 지나치게 부족(박노자, 2017, 226)”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노자가 <러시아혁명사 강의> 6강에서 적색개발주의를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시장 자본주의라면 식민지 착취를 통해 그 잉여를 창출했겠지요. (중략) 그런데 소련이나, 중국, 북한은 그렇게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이들은 일국 내 농업 부문에서 잉여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박노자, 2017: 260)라고 서술한 점을 보고 동의할 수가 없었다.(물론 북한은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다.) 중국과 소련이 자본 축적 과정에서 농민들을 착취한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는 논외의 대상으로 친다고 해도, 박노자의 위와 같은 서술은 소련과 중국이 각각 중앙아시아를 식민 지배한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인은 박노자의 입장에 대해 내 생각을 적은 글을 <노동자연대> 신문에 투고하고, 박노자 교수의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이에 대해 박노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물론 예컨대 자결권 행사가 불가능했던 차원에서는 그루지아 (조지아)나 우즈베키스탄, 티벳 등을 "속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민족의 자결권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든 건 사회주의 대원칙에 대한 부정임에 틀림없죠. 한데 소비에트식 경제가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중앙에서의 자본축적을 위해 소수자들이 사는 주변부의 노동자들이 초과착취를 받거나 특별한 차별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루지아나 우즈베키스탄 내지 티벳의 현지인 노동자들은 같은 사회권과 같은 노동권을 향유했죠. 오히려, 최근을 이야기하자면 티벳 지역에 대한 민심포섭의 차원에서는 중국공산당은 그쪽 복지제도를 중국 내륙지방 이상 더 철저히 지원합니다. 지금 티벳에서는 농촌지역에서도 무상의료가 실시되는데, 이는 광동 등 일부 부유한 연안지역 이외에는 보기 드문 거죠. 초과착취를 받긴 커녕 중앙아세아 등의 지역들은 쏘련 시절에 중앙으로부터의 지원금을 계속 받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결권 행사가 불가능하고 정치적으로 중앙에 복속되는 한계는 당연히 있었지만 "보통" 자본제 열강들의 식민지와 좀 다른 형태라고 봅니다.

 

본인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련과 중국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지배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결론에서 박노자 교수의 답변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볼 것이다.

 

본론

 

1.소련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통치

조정남(1996)에 의하면, 소련의 민족 정책은 형식은 민족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 민족문제에 대한 형식과 내용의 분리가 특징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민족적인 구획을 초극하는 탈()민족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조정남, 1996: 115-116) 이를 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하 소련)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각 민족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공동조약을 맺는 형태로 세워졌다. 그리고 각 공화국 내의 소수민족들이 독자적인 자치공화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1923년부터 10여 년 간은 소련 각 민족지역에서는 개별 민족어에 의한 교육, 민족 출판물의 확대로부터 당, 정부기관에서 소수민족 공산당원의 채용을 확대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 민족들의 민족화 내지는 토착화 정책이 당과 정부의 공식노선으로 추진되었다.(조정남, 1996: 128) 이 시기는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러시아 민족주의가 여타의 소수민족 집단의 그것에 비하여 상대적인 면에서 억제되고 있던 시기였다.(조정남, 1996: 128-129)

이 때 소련의 소수민족이었던 타타르족 출신의 공산당원 술탄 갈리에프는 스탈린과 함께 일하면서 독일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 서유럽에서의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근거로, “3세계 민족들이 서방에 맞서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프롤레타리아 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의 근대화 운동인 자디드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이승환, 2011)

하지만 1929년부터 33년에 걸쳐서 스탈린은 자본축적을 위한 대대적인 집단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수민족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탄압을 시작하였다.(조정남, 1996: 129)러시아 혁명 초기의 소수민족들에 우호적이던 정책은 점차 러시아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자신이 소수민족인 조지아인인 스탈린은 같은 민족인 조지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해서 조지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반면에 러시아인인 레닌은 이러한 스탈린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과 함께 일하던 술탄 갈리예프를 공산주의자로 위장한 투르크족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한편, 스탈린은 소수민족들의 통합을 저해하기 위해 기존의 민족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이 중에 키르기즈족은 산악 지대와 초원 지대에서 오랫동안 같은 민족으로 살았는데도 생활하는 지역 환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각 산악 거주 키르기스족은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초원 거주 키르기즈족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오늘날의 카자흐스탄)”으로 분리시켰다.(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엮음, 2013)

또한, 박노자가 2017124일에 <주간 경향>에 기고한 인터내셔널가에 대한 기사에서 소련 국가가 러시아인들을 찬양한다는 점을 비판한 것처럼, 소련에 속했던 민족 공화국들의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다 소수민족인 자신들에게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준 공산당러시아인들을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2. 중국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통치

 

중국 민족 정책은 소련 민족정책의 영향을 받아서 다수민족인 한족과 소수민족의 단결과 평등을 중시한다.

1982년에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의 각 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통일적인 다민족국가이다. (중략) 민족단결을 보호하는 투쟁 중 대민족주의, 주로 대한족주의에 반대하고,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해야 한다. 국가는 일체 노력을 다해서 전국 각 민족의 공동번영을 촉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어서 각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방은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있는데,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자치권을 행사한다. 각 민족은 모두 자기의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으며, 풍습과 관습을 보존하거나 개혁할 자유가 있다.”고 규정했다.(김소중, 2007: 75, 76, 조정남, 2006)

그럼에도 소련의 민족정책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소수민족 공화국대신 민족자치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중일 전쟁 과정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국토의 분열을 야기시킬 수 있는 민족자결주의 대신 항일전쟁을 함께 하는 소수민족의 민족자치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민족 독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자민족중심주의로 규정짓고 탄압을 한다는 점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민족정책은 큰 차이가 없다.(김재원, 2017, 조정남, 2006)

그리고 러시아가 정복한 중앙아시아 지역, 투르크족의 서쪽 영토라는 뜻인 서투르키스탄을 정복할 때, 오늘날 중국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동투르키스탄인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청나라 건륭제가 준가르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중국 역사에 편입되었다.

청나라가 서방 제국주의의 개방 요구와 민중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신장에서 무슬림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 청나라 관료들은 신장 문제를 두고 분열했다.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관료들은 신장은 원래 우리의 땅이 아니었다.”, 신장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좌종당은 신장을 잃으면, 몽골조차 러시아에 빼앗겨서 수도 베이징이 위험해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청나라 황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좌종당이 이끈 청나라 군대는 신장의 무슬림 반란을 진압했다.(김호동, 2012)

김호동(2012)에 따르면, 좌종당이 정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신장 민중들은 자신들을 무슬림또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주민이라고만 규정했다. 심지어 신장 민중들 중에는 신장 무슬림 반란지역을 통일하고, 강압적인 이슬람교 율법을 강요한 야쿱 벡의 통치에 환멸감을 느껴서 차라리 중국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이 나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좌종당 이후 신장에 파견된 한족 관리에 의한 한화(漢化) 정책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김호동, 2012)

위구르족 독립운동가들은 한족 군벌과 부패한 지방 지배자들에 맞서서 1933년과 1934년에 존재했던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과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1944년에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웠다. 그런데 스탈린은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우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도 친소 성향의 한족 군벌 성스차이와 연합정부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국민당정부가 주도한 이 협상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배제되었다. 이에 실망한 카자흐족 출신의 성직자 오스만은 계속해서 성스차이와, 이후 1949년에 세워진 공산당 정부에 맞서 싸웠다.(제임스 A 밀워드, 2013, Milward, James A. 2007)

1949년 많은 위구르족들은 부패한 봉건영주와 한족 군벌들의 지배에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민족 자치와 개혁을 약속한 중국 공산당을 환영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 편입되기를 원하거나, 소련식 소비에트 공화국 형태로 신장을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위구르족 공산주의자들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고 처벌하면서, 일부 위구르족들과 카자흐족들은 이에 반대해서 중국정부에 맞서거나 소련으로 망명하기도 했다.(오홍엽, 2009, 제임스 A 밀워드, 2013, Milward, James A. 2007)

중국정부의 탄압과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에 환멸감을 느낀 신장의 저항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저항 사상으로 이슬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소련 해체를 보고 자신들의 독립도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에 독립한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위구르족들의 저항이 자신들에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저항으로 이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새로이 부상한 중국과 친해지기 위해 중국 정부가 러시아와 함께 만든 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를 "3대 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는상하이협력기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오홍엽, 2009)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석유와 면화생산지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대 일로정책을 수행하면서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의 지배민족인 한족은 신장에서 지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동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석유와 면화 수입 혜택의 대부분을 가져갔다.(오홍엽, 2009)

결론

 

지금까지 중국과 소련의 민족정책과 중앙아시아 지배에 대해 분석했다. 이제 박노자의 답변에 대해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박노자는 소련과 중국이 티벳 등 중앙아시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점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대신, 그만큼 지역에 많이 투자를 하기 때문에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운영하던 식민지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설령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할지라도 이 조차도 중앙아시아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누그려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조정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일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인 자신들이 소련 경제 발전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많은 비()러시아인들은 연방체제 수립 이래 러시아인들이 그들 소수민족들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아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들은 그들 공화국이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보다 중앙 재정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해 왔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보다 많은 재원, 특히 물자를 러시아공화국으로부터 자기들 공화국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등으로 러시아인들과 소수민족 집단들 사이에는 경제적 불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광범위한 갈등이 상존해 왔다는 것이다.(조정남, 1996: 141)”

이는 중국 소수민족 지역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양호(2016)2013년 중국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2년에도 소득격차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 소수민족 지구의 최저생활 표준은 도시가 311.8 위안, 농촌 최저생활 표준은 146.8 위안이었는데, 신장은 각각 261.0 위안, 128.6 위안에 불과하다. 임금도 한족의 평균 개인 총소득은 24,293안이지만, 위구르족은 13243 위안으로 1만여 위안 이상 차이가 난다(이양호, 2016, 김재원, 2017).

그 점에서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투자를 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진정 지역의 소수민족을 위한 투자였다고 봐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든다.

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중국이나 러시아 지역의 1차사료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계속 보완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김소중, 2007, 중국소수민족, 배재대학교 출판부

김재원 (2017). 민족해방운동으로서 신장위구르족의 저항. 마르크스주의 연구, 14(3), 144-168.

김호동, 2012,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사계절

박노자, 2017, 러시아 혁명사 강의, 나무연필

오홍엽, 2009, 중국 신장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 친디루스연구소,

이승환, 2011. 술탄 갈리예프의 무슬림 민족공산주의. 코기토, (70), 357-388.

조정남, 1996, 러시아 민족주의 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조정남, 2006, 현대중국의 민족정책, 한국학술정보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엮음, 2013,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이념, 종교, 혁명3장 소비에트 제국은 왜 해체되었는가?: 소련의 이중 체제와 민족 창조 정책을 통해서 본 제국의 자살”/구자정, 민속원

제임스 A 밀워드, 2013, 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사계절.

Milward, James A. 2007, 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njiang, Colombia University Press: NY

 

인터넷 매체

 

김재원, ‘중국과 소련에는 식민지가 없었다?-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읽고, https://wspaper.org/article/19547’ 노동자연대<검색일: 20171226>

박노자, “[내 인생의 노래]‘인터내셔널’-국가주의 초월한 나의 애국가’”, 주간 경향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_id=201701161625431 <검색일: 20171226>

구원의 행진https://youtu.be/W5zTJfFzImc <검색일: 20171227>

 

정부

테러리즘, 분열주의와 극단주의를 공격하는 상하이조약http://chn.sectsco.org/docu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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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 - 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
오홍엽 지음 / 친디루스연구소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신장위구르족에 의한 차량폭발사고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 중국신장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오홍엽, 친디루스. 정가: 16000) 서평

 

김재원(경상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과 석사과정)

 

지난 10월 말 최근에 출범한 시진핑 지도부의 정책을 결정 하는 중국공산당 3중전회가 열리기 전에 위구르족에 의한 천안문 차량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중국 정부는 이 사건의 배후에 신장위구르족 독립운동세력이 있다고 보고, 위구르족들이 북경에 들어오는 즉시, 휴대폰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럴 때 오홍엽의 중국신장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중국인으로서 중국의 화남이공대학을 졸업하고, ‘신장위구르족 문제를 주제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 학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그가 이 책을 출판할 즈음에 2009년 광동성의 한 완구 기업 에서 위구르족 노동자가 한족 노동자를 강간했다는 누명 을 쓰고 위구르족 노동자 2이 죽고, 많은 위구르족 노동자들이 부상당한 것에 대해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수도 우루무치에 서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이 시위는 중국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100여 명에 달하는 위구르족과 한족 사 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했다. 저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소 수민족 관련 서적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문제가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고자 자신의 석사학위 졸업논문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최대의 장점은 중국정부와 중국 소수민족 연구자, 신문의 자료를 바탕으로 신장위구르족과 한족 갈등의 오랜 역사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상황을 분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낙 후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경제와 민족 문제 해결에 대한 방 안에 대해 고민했다는 점이다.

 

신장위구르자치구는 비록 사막이 많지만, 석유, 쳔연가스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의 국가,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인접국가들 때문에 대외무역도 활발하며, 오 아시스 지형에 따른 아름다운 관광자원으로 인해 충분히 발전 가능성이 있 는 지역이다. 중국 정부도 먼저 개혁개방을 시작한 상하이, 북경, 광둥성 등 동부지역이 발전하면서 벌어진 서부지역의 경제 격차문제 해결하기 위해 서부대개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일본 등 서방과 신장위구르자치구의 대외무역도 계속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중국정부의 개혁개방정책이 서부가 개혁개방으로 지속적인 투자와 한족들이 많은 지역이란 점에서 민족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적은 동부에 비해 사회간접시설이 낙후하다는 점과 중국정부가 연방제 국가가 아닌 단일제 국가로서 에너지자원을 국가 혹은 집체 소유하고 있고, 세금마저 소비세와 소득세는 모두 중앙 이 가져가기 때문에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경제발전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재정지출의 60%를 중앙정부 재정에 의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금사발을 들고 굶주리는’ ‘부유한 빈곤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그마한 경제발전 혜택마저 대부분 1950~60년대 중국정부의 격려로 신장에 이주한 도시 거주 한족들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2003년도 각국 인권보고서>는 따르면, 서부개발프로젝트 과정에서 소수민족은 건축업에 종사할 자격이 없으며, 대부분 사천성과 기타 지역에서 뽑아온 한족들로 노동자들이 충당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 한 경제학자는 신장에서 한족 인구 가 1% 증가하면 1인당 소득은 44위안이 증가한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신장위구르자치구발전을 위해 집중하고 있는 석유와 천연가스파이프 등 기술 분야의 노동자들은 전부 한족이다.

 

반면에 위구르족들은 청나라 때에 가서야 중국 정부의 영역에 편입되어서 중국에 대한 소속감이 약하다. 게다가 그들 은 청나라가 망한 후에는 신장을 지배한 한족 군벌과 국민당에 반대해서 격렬한 독립운동을 펼쳤고, 영국과 소련의 지원 하에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 ‘동투르키스탄인민공화국을 세운 전통이 있다.(그래서 중국정부는 동투르키스탄이란 단어를 독립을 주장하는 말이라고 여겨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초기 중국정부가 신장지역을 점령했을 때만 해도, 위구르족 들은 한족 군벌의 오랜 횡포에서 해방되었다고 여겼다. 그 리고 중국정부가 이슬람교를 탄압하지 않고, 봉건적 사회제도를 개선한 민주개혁을 펼친 것 때문에 정부를 지지했었다. 일부 위구르족 민족간부들은 소련이 카자흐스탄처럼 중앙아시아의 각 민족들이 다수인 지역에 그 민족의 이름의 자치공화국을 만들 었던 것처럼 중국정부가 자신들의 독자적인 공화국인 신장위구르스탄 자치공화국을 만들기를 원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지금의 몽골공화국인 외몽골이 소련의 지원으로 독립한 것과 내몽골이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지원을 받아서 독립하려는 시도를 보고, 중국으 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는 민족자결론을 폐기하고, 항일전쟁에 함께하는 민족단결의 전제하에” ‘자치를 보장하는 민족자치론으로 입장을 바꾼 후였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이러한 주장을 한 위구르족 민족간부들이 공산당원임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자로 낙인찍고 탄압했다. 이것을 보고 위구르족들은 중국정부에 대해 큰 실망을 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정부가 신장을 점령하기 전부터 신장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이런 위구르족 독립 정서를 이용했다. 그 결과, 이닝 주재 소련 영사관의 선동으로 이리지역과 타청지역의 위구르족 5~6만 명이 가축과 중국 정부문서를 훔치고, 소련으로 집단 월경하는 이타사건과 이닝주민 2,000여 명이 참가한 정치적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소련은 위구르족이 만든 동투르키스탄인민혁명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신장 전 지역에 조직을 만들려고 했으나, 중국정부에 진압당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문화 대혁명은 신장위구르족이 믿는 이슬람교에 대한 탄압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많은 모스크가 파괴되었다.

 

현재 위구르족들은 한족들이 잘 살지 않는 남부신장지역 농촌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주로 면화 수입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면화수입조차 화학비료, 종자와 같은 원자 재 가격은 해마다 상승하는 반면에 면화가격은 최저보호가격제도가 없어서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경제개발 과정에서 생태 환경이 악화되면서 경작지가 감소하고 있다.

 

또한 중국정부의 문자개혁 실패로 위구르족 청소년 200여 만 명이 한자도 위구르문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맹상태가 되어버리는 문제와 사회적으로 이슬람종교가 민족경제발전을 저해한 다는 편견을 경험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많은 유랑아 가 신장위구르족에서 배출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구르족들이 믿을 수 있는 안식처는 그들의 신앙인 이슬람교 밖에 없다.

 

중국정부는 마오쩌둥이 생애 마지막 10년에 펼친 문화대혁명에 대해 잘못됐음을 반성을 하면서 종교완화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세계에서 모스크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 되었다. 특히 과거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의 수도였으며, 위구르족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남부신장지역의 중심지인 카스는 문화대혁명 이전보다 더 많은 모스크가 생겼다. 이 때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 이슬람국가들이 코란 등 종교용품을 지원했으며, 중국정부가 석방시킨 위구르족 독립운동가들이 대학 등 여러 교육기관에서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결과, 일부 학교에서는 공공연하게 이슬람교를 가르치는 현상이 생겨서 비이슬람교도들은 살아남기 힘든 지경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동족에 게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설명해야 하는 위구르족 민족간부들은 동족으로부터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대화를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무시당하다가, ‘집단 탈당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거기에 알 카에다와 같은 중국 외부의 이슬람주의조직들 이 독립을 염원하는 신장위구르족 청년들을 지지하면서, 신장위구르족 독립운동가들이 이슬람주의를 받아들이게 됐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2009년 위구르족 저항에 대해 이슬람권에 대해 이 문제를 잘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서방 제국주의에 의해 세력이 약해지던 오스만투르크 제국 말기에 시작되어 모든 투르크족의 단결을 주장하는 범투르크주의도 현재 신장위구르족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터키정부가 2009년 위구르족 저항에 대한 중국정부의 강경 진압을 강력히 비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중국정부는 이슬람 성직자들에게 국가에 대해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교육기관들에게 중국어와 위구르 어 교육을 강화시키면서, 이슬람주의 영향력을 차단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상하이협력기구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있다. 초기 소련으로부터 독립할 때만 해도, ‘범투르크주의이슬람주의적 언어를 구사하던 중앙아시아 국가 지도자들도 독립 후에 증가하는 빈부격차에 따른 민중들이 이슬람주의를 기치로 저항에 나설까봐 두려워서 중국정부의 반테러 정책에 협조하고 있다.

 

한편, 저자는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거주하는 평범한 한족들 역시 어떻게 보면 중국정부의 희생자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점령한 이후에 한족들이 황무지 개발과 소련의 침입과 위구르족의 독립운동을 막는 역할을 하는 신장생산건설병단의 설립 등을 위해 신장지역에 대규모로 이주했다.

 

그 결과, 점령 당시 6%에 불과하던 한족 인구가 40%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수도 우루무치에서는 절대 다수 민족이 되었다. 그 결과, 한족은 신장위구르자치구에서 위구르족 다음으로 많은 민족이 되었으며, 지역적으로 북부신장에 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신장위구르자치구 자체가 사실상 남부신장의 위구르족, 북 부신장의 한족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정부는 개혁개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한족 이주민들에 대해 고향으로의 이주를 허락하지 않는강경책을 펼쳤다. 나중에 자격을 갖춘 일부는 상해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였지만 대부분은 신장에 남아 있어야 했고 자녀 한 명 은 상해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타협책을 마련했다. 1990년대에는 토지임대료와 세금을 낮추어 서부로 자본과 인력을 끌어들이는 정책으로 신장지역으로의 한족 유입을 유도했다.

 

이 사실은 다수 민족인 한족 역시 중국 정부의 '식민 정책'의 희생자라는 점을 잘 보여준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왜냐 하면 이 사실은 한족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자 가장 경제적으로 발달한 동부지역의 한족 노동자들이 정부에 맞서는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신장 거주 한족들 역시 자신들의 자유로운 귀환을 위해서라도 소극적이더라도 신장위구르족의 독립운동 지지가 자신들의 고향으로의 귀환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느끼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장지역에서 한족들이 소수민족 인 위구르족보다 좀더 나은 조건이라 해도, 정치적 억압을 소수 의 공산당 간부로부터 당하고 있다는 점은 위구르족과 마찬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점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신장 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은 위구르 족 분리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폭동과 진압이 일상사처럼 반복되는 악순환만 지속할 뿐 아무런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중국이나 위구르족이나 모두에게 딜레마이다.”라고 결말을 내고 있다. 한족과 위구르족의 갈등이 해결될 가능성은 없 어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드러난다.

 

아무래도 저자 자신이 중국의 다수민족인 한족이고,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사람이 '북한 인권 전문가'이자, 대한예수교 장로회 중경 목사여서 그런지, 위구르족의 독립가능성에 대해 회의 적이고, 이슬람 신앙에 대해 적대적인 것 같다.

 

가령, 그는 문화대혁명 이후에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이슬람교가 부활한 것에 대해 "극단적인" 이슬람신앙을 보여준다고 묘사한다. 이 점은 중국정부가 이슬람주의를 빌미로 위구르족을 탄압 하는 것이 정당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어서 위험하다. 오히려 신장위구르족들이 교육, 경제적 측면에서 완전히 한족(그리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보는 중국 정부)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이에 맞서는 사상으로서 이슬람주의를 택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국정부의 한족이주 정책이 북부신장 소수민족에 대한 민족동화 정책이라는 비난받고 있다고 소개하면서도, 한편, 한족인구의 증가로 신장지역의 전반적인 경제발전을 가져 왔다는 점을 지적하며,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한족을 신장으로 이주시켰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지적도 같이 하는 점도 아쉽다.

 

또한, 연방국가로서 각 주가 독립적인 권한 가진 미국조차 제2차세계대전에서 국가자본주의적인 정책을 펼친 점을 고려하면, 중국정부가 신장위구르자치구 정부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고, 세금제도를 바꿔서 혜택을 준다고 해서, 신장위구르자치구의 경제문제는 물론 민족갈등도 해결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저자도 잠깐 언급했듯이, 신장위구르족들이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점령된 티베트족과의 독립을 위한 협력을 하는 것이 자살 폭탄 테러와 같은 소수의 영웅적인 전술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천안문 항쟁에 대해 신장위구르족 대학생들이 연대시위를 하다가, 동시에 자신들의 자결권을 주장했던 대중운동으로 발전한 것처럼, 힘들더라도 대중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 정부는 독립을 주장하는 운동가들이 교수로 채용되어 있는 신장위구르자치구 최고 교육기관인 신장대학과 여러 교육 기관 등을 감시하는 이유는 이러한 대중운동을 막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족노동자들이 신장위구르족이 적이 아니라, 중국정부에 맞서 싸우는 동지임을 인식하고,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저자가 "대안"이 없다고 말한 한족과 소수 민족의 갈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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