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소련에는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가 없었을까?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 중 중국과 소련의 자본축적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을 읽고
김재원(경상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과 박사과정)
서문
박노자는 최근에 자신이 그동안 강연을 하면서 정리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글을 모아서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출판했다. 본인은 오래 전부터 박노자가 쓴 중국과 소련에 관한 글을 꾸준히 읽어봤기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궁금해서 그의 책을 읽어봤다.
먼저 나는 박노자가 책의 5강에서 러시아 혁명이 조선은 물론 중국, 이란, 인도 등 여러 아시아 국가에 큰 영향을 미친 점을 자세히 서술한 것은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노자가 지적한 대로 “한국은 아시아 국가에서 일어났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연구가 지나치게 부족(박노자, 2017, 226쪽)”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박노자가 <러시아혁명사 강의> 6강에서 “적색개발주의를 미화하려는 것은 아니”라면서도 "시장 자본주의라면 식민지 착취를 통해 그 잉여를 창출했겠지요. (중략) 그런데 소련이나, 중국, 북한은 그렇게 착취할 수 있는 식민지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이들은 일국 내 농업 부문에서 잉여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나아갔습니다."(박노자, 2017: 260쪽)라고 서술한 점을 보고 동의할 수가 없었다.(물론 북한은 식민지를 갖고 있지 않다.) 중국과 소련이 자본 축적 과정에서 농민들을 착취한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는 논외의 대상으로 친다고 해도, 박노자의 위와 같은 서술은 소련과 중국이 각각 중앙아시아를 ‘식민 지배’한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관점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인은 박노자의 입장에 대해 내 생각을 적은 글을 <노동자연대> 신문에 투고하고, 박노자 교수의 페이스북에도 올렸다. 이에 대해 박노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물론 예컨대 자결권 행사가 불가능했던 차원에서는 그루지아 (조지아)나 우즈베키스탄, 티벳 등을 "속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수민족의 자결권 행사를 불가능하게 만든 건 사회주의 대원칙에 대한 부정임에 틀림없죠. 한데 소비에트식 경제가 이윤극대화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기에 중앙에서의 자본축적을 위해 소수자들이 사는 주변부의 노동자들이 초과착취를 받거나 특별한 차별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루지아나 우즈베키스탄 내지 티벳의 현지인 노동자들은 같은 사회권과 같은 노동권을 향유했죠. 오히려, 최근을 이야기하자면 티벳 지역에 대한 민심포섭의 차원에서는 중국공산당은 그쪽 복지제도를 중국 내륙지방 이상 더 철저히 지원합니다. 지금 티벳에서는 농촌지역에서도 무상의료가 실시되는데, 이는 광동 등 일부 부유한 연안지역 이외에는 보기 드문 거죠. 초과착취를 받긴 커녕 중앙아세아 등의 지역들은 쏘련 시절에 중앙으로부터의 지원금을 계속 받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자결권 행사가 불가능하고 정치적으로 중앙에 복속되는 한계는 당연히 있었지만 "보통" 자본제 열강들의 식민지와 좀 다른 형태라고 봅니다.
본인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소련과 중국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지배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결론에서 박노자 교수의 답변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볼 것이다.
본론
1.소련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통치
조정남(1996)에 의하면, 소련의 민족 정책은 ‘형식은 민족적,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라고 하는 민족문제에 대한 형식과 내용의 분리가 특징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민족적인 구획을 초극하는 탈(脫)민족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조정남, 1996: 115-116) 이를 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하 소련)은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각 민족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공동조약을 맺는 형태로 세워졌다. 그리고 각 공화국 내의 소수민족들이 독자적인 ‘자치공화국’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리고 1923년부터 10여 년 간은 소련 각 민족지역에서는 개별 민족어에 의한 교육, 민족 출판물의 확대로부터 당, 정부기관에서 소수민족 공산당원의 채용을 확대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별 민족들의 민족화 내지는 토착화 정책이 당과 정부의 공식노선으로 추진되었다.(조정남, 1996: 128) 이 시기는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으나 러시아 민족주의가 여타의 소수민족 집단의 그것에 비하여 상대적인 면에서 억제되고 있던 시기였다.(조정남, 1996: 128-129)
이 때 소련의 소수민족이었던 타타르족 출신의 공산당원 술탄 갈리에프는 스탈린과 함께 일하면서 “독일 혁명이 실패한 이후에 서유럽에서의 혁명이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근거로, “제3세계 민족”들이 서방에 맞서서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할 “프롤레타리아 민족”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특히 중앙아시아 투르크족들의 근대화 운동인 자디드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이승환, 2011)
하지만 1929년부터 33년에 걸쳐서 스탈린은 자본축적을 위한 대대적인 집단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소수민족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일제 탄압을 시작하였다.(조정남, 1996: 129)러시아 혁명 초기의 소수민족들에 우호적이던 정책은 점차 러시아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자신이 소수민족인 조지아인인 스탈린은 같은 민족인 조지아인들의 반란을 진압해서 ‘조지아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반면에 러시아인인 레닌은 이러한 스탈린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과 함께 일하던 술탄 갈리예프를 “공산주의자로 위장한 투르크족 민족주의자”란 이유로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한편, 스탈린은 소수민족들의 통합을 저해하기 위해 기존의 민족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이 중에 키르기즈족은 산악 지대와 초원 지대에서 오랫동안 같은 민족으로 살았는데도 생활하는 지역 환경이 다르다는 이유로 각각 산악 거주 키르기스족은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초원 거주 키르기즈족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오늘날의 카자흐스탄)”으로 분리시켰다.(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엮음, 2013)
또한, 박노자가 2017년 1월 24일에 <주간 경향>에 기고한 ‘인터내셔널가’에 대한 기사에서 소련 국가가 러시아인들을 ‘찬양’한다는 점을 비판한 것처럼, 소련에 속했던 “민족 공화국”들의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 다 소수민족인 자신들에게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준 ‘공산당’과 ‘러시아인’들을 찬양하는 내용들이다.
2. 중국의 민족 정책과 중앙아시아 통치
중국 민족 정책은 소련 민족정책의 영향을 받아서 다수민족인 한족과 소수민족의 단결과 평등을 중시한다.
1982년에 개정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은 전국의 각 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통일적인 다민족국가이다. (중략) 민족단결을 보호하는 투쟁 중 대민족주의, 주로 대한족주의에 반대하고, 지방민족주의에도 반대해야 한다. 국가는 일체 노력을 다해서 전국 각 민족의 공동번영을 촉진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어서 “각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방은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있는데, 자치기관을 설립하고 자치권을 행사한다. 각 민족은 모두 자기의 언어와 글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가 있으며, 풍습과 관습을 보존하거나 개혁할 자유가 있다.”고 규정했다.(김소중, 2007: 75, 76, 조정남, 2006)
그럼에도 소련의 민족정책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소수민족 공화국’ 대신 ‘민족자치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군이 중일 전쟁 과정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운동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서, 국토의 분열을 야기시킬 수 있는 민족자결주의 대신 항일전쟁을 함께 하는 소수민족의 민족자치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민족 독립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자민족중심주의’로 규정짓고 탄압을 한다는 점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민족정책은 큰 차이가 없다.(김재원, 2017, 조정남, 2006)
그리고 러시아가 정복한 중앙아시아 지역, 즉 ‘투르크족의 서쪽 영토’라는 뜻인 ‘서투르키스탄’을 정복할 때, 오늘날 중국이 지배하는 중앙아시아, 즉 ‘동투르키스탄’인 신장위구르자치구는 청나라 건륭제가 준가르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중국 역사에 편입되었다.
청나라가 서방 제국주의의 개방 요구와 민중반란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신장에서 무슬림 반란이 일어났다. 이 때 청나라 관료들은 신장 문제를 두고 분열했다. 서방 제국주의에 맞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관료들은 “신장은 원래 우리의 땅이 아니었다.”며, 신장을 포기하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좌종당은 “신장을 잃으면, 몽골조차 러시아에 빼앗겨서 수도 베이징이 위험해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청나라 황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좌종당이 이끈 청나라 군대는 신장의 무슬림 반란을 진압했다.(김호동, 2012)
김호동(2012)에 따르면, 좌종당이 정복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신장 민중들은 자신들을 ‘무슬림’ 또는 ‘자기가 사는 도시의 주민’이라고만 규정했다. 심지어 신장 민중들 중에는 신장 무슬림 반란지역을 통일하고, 강압적인 이슬람교 율법을 강요한 야쿱 벡의 통치에 환멸감을 느껴서 “차라리 중국인들이 지배하던 시절이 나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좌종당 이후 신장에 파견된 한족 관리에 의한 ‘한화(漢化) 정책’으로 인해 민족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김호동, 2012)
위구르족 독립운동가들은 한족 군벌과 부패한 지방 지배자들에 맞서서 1933년과 1934년에 존재했던 제1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과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1944년에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웠다. 그런데 스탈린은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을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우호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래서 제2차 동투르키스탄 공화국도 친소 성향의 한족 군벌 성스차이와 연합정부를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 국민당정부가 주도한 이 협상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은 배제되었다. 이에 실망한 카자흐족 출신의 성직자 오스만은 계속해서 성스차이와, 이후 1949년에 세워진 공산당 정부에 맞서 싸웠다.(제임스 A 밀워드, 2013, Milward, James A. 2007)
1949년 많은 위구르족들은 부패한 봉건영주와 한족 군벌들의 지배에 환멸감을 느꼈기 때문에 처음에는 “민족 자치와 개혁”을 약속한 중국 공산당을 환영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소련에 편입되기를 원하거나, 소련식 소비에트 공화국 형태로 신장을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위구르족 공산주의자들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고 처벌하면서, 일부 위구르족들과 카자흐족들은 이에 반대해서 중국정부에 맞서거나 소련으로 망명하기도 했다.(오홍엽, 2009, 제임스 A 밀워드, 2013, Milward, James A. 2007)
중국정부의 탄압과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공산주의에 환멸감을 느낀 신장의 저항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저항 사상으로 이슬람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소련 해체를 보고 “자신들의 독립도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하지만 소련 해체 이후에 독립한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위구르족들의 저항이 자신들에 통치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저항으로 이어질까봐 두려워하고, 새로이 부상한 중국과 친해지기 위해 중국 정부가 러시아와 함께 만든 “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를 "3대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공동 대응을 모색하는” 상하이협력기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오홍엽, 2009)
중국 정부는 신장위구르자치구를 석유와 면화생산지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일대 일로’ 정책을 수행하면서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 영향을 끼치기 위한 발판으로 삼고 있다. 한편, 중국의 지배민족인 한족은 신장에서 “지역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동투르키스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석유와 면화 수입 혜택의 대부분을 가져갔다.(오홍엽, 2009)
결론
지금까지 중국과 소련의 민족정책과 중앙아시아 지배에 대해 분석했다. 이제 박노자의 답변에 대해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박노자는 소련과 중국이 티벳 등 중앙아시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점은 잘못되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에서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대신, 그만큼 지역에 많이 투자를 하기 때문에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들이 운영하던 식민지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설령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할지라도 이 조차도 중앙아시아 소수민족들의 불만을 누그려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조정남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일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인 자신들이 소련 경제 발전을 위해서 희생을 했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많은 비(非)러시아인들은 “연방체제 수립 이래 러시아인들이 그들 소수민족들을 지속적으로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우크라이나인, 그루지아인, 에스토니아인, 라트비아인, 리투아니아인들은 그들 공화국이 연방 정부로부터 받는 혜택보다 중앙 재정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불평해 왔고,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보다 많은 재원, 특히 물자를 러시아공화국으로부터 자기들 공화국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등으로 러시아인들과 소수민족 집단들 사이에는 경제적 불평등을 내용으로 하는 광범위한 갈등이 상존해 왔다는 것이다.(조정남, 1996: 141)”
이는 중국 소수민족 지역도 마찬가지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양호(2016)가 2013년 중국 통계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2년에도 소득격차가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2012년 소수민족 지구의 최저생활 표준은 도시가 311.8 위안, 농촌 최저생활 표준은 146.8 위안이었는데, 신장은 각각 261.0 위안, 128.6 위안에 불과하다. 임금도 한족의 평균 개인 총소득은 24,293안이지만, 위구르족은 13243 위안으로 1만여 위안 이상 차이가 난다(이양호, 2016, 김재원, 2017).
그 점에서 중국과 소련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투자를 한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진정 지역의 소수민족을 위한 투자였다고 봐야하는 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든다.
이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중국이나 러시아 지역의 1차사료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계속 보완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김소중, 2007, 『중국소수민족』, 배재대학교 출판부
김재원 (2017). 민족해방운동으로서 신장위구르족의 저항. 마르크스주의 연구, 14(3), 144-168.
김호동, 2012, 『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사계절
박노자, 2017, 『러시아 혁명사 강의』, 나무연필
오홍엽, 2009, 『중국 신장위구르족과 한족의 갈등』, 친디루스연구소,
이승환, 2011. 술탄 갈리예프의 무슬림 민족공산주의. 코기토, (70), 357-388.
조정남, 1996, 『러시아 민족주의 연구』, 고려대학교 출판부
조정남, 2006, 『현대중국의 민족정책』, 한국학술정보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엮음, 2013,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이념, 종교, 혁명』 3장 소비에트 “제국”은 왜 해체되었는가?: 소련의 이중 체제와 민족 창조 정책을 통해서 본 제국의 “자살”/구자정, 민속원
제임스 A 밀워드, 2013, 『신장의 역사: 유라시아의 교차로』, 사계절.
Milward, James A. 2007, Eurasian Crossroads: A History of Xinjiang, Colombia University Press: NY
인터넷 매체
김재원, ‘중국과 소련에는 식민지가 없었다?- 박노자의 《러시아 혁명사 강의》를 읽고, https://wspaper.org/article/19547’ 《노동자연대》 <검색일: 2017년 12월 26일>
박노자, “[내 인생의 노래]‘인터내셔널’-국가주의 초월한 ‘나의 애국가’”, 《주간 경향》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_id=201701161625431 <검색일: 2017년 12월 26일>
“구원의 행진” https://youtu.be/W5zTJfFzImc <검색일: 2017년 12월 27일>
정부
“테러리즘, 분열주의와 극단주의를 공격하는 상하이조약” http://chn.sectsco.org/docu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