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토론회 영상]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
[8강] 대만 문제 – 기원, 변천, 현재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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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문제 – 기원, 변천, 현재의 위기
https://wspaper.org/m/29064
미국의 중국 정찰 풍선 격추 등 날로 첨예해지는 미·중 갈등의 한복판에 대만 문제가 있습니다. 시점을 콕 찍은 중국의 대만 침공설과 전쟁 시나리오까지 나오고 있는 데다가, 한국이 그에 휘말릴 가능성도 큽니다.
2월 28일은 중국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에 온 장제스 세력이 대만에서 대중 저항을 진압하며 2만 명 이상을 학살한 지 76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계기로, 대만 문제의 기원부터 현재의 위기까지 국제주의 관점으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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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만 문제 – 기원, 변천, 현재의 위기
https://wspaper.org/tg/29064
이 글은 3월 1일에 같은 제목으로 열린 노동자연대 온라인 토론회(영상 보기)의 발제문이다. 이 토론은 기획 시리즈 ‘당신이 알아야 할 현대 중국의 모든 것 – 마르크스주의 관점’의 여덟 번째 시간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군사작전을 펼쳐 왔습니다. 미국의 항공모함은 시시때때로 대만해협을 오갑니다. 대만해협은 국제수역이기에 항행의 자유가 있다면서 말입니다. 중국은 대만, 남중국해의 섬들, 댜오위다오 열도 등이 자국 영토라며 반발합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이라는 것이 중국 당국의 입장입니다.
이처럼 최근 모든 면에서 대만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만 문제가 무엇이고, 언제 시작돼 지금의 위기에 이르게 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만 국가의 탄생과 미국의 지원
1949년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륙에서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에게 패배한 뒤 대만으로 후퇴해 이 곳을 통치했습니다.
중국과의 경쟁 속에서 장제스는 강력한 국민국가를 빨리 건설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국가가 주도해 경제 발전을 이끄는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했고, 계엄 통치를 통한 권위주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에 맞선 대중 저항이 벌어졌습니다. 장제스는 이를 폭력으로 진압하며 2만 명 이상을 학살했습니다. 바로 1947년에 벌어진 2.28 사건입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냉전 속에서 서방 세계의 우월함을 보여 주는 본보기로 대만이 필요했습니다. 장제스 정권의 권위주의나 학살은 아무 문제가 안 됐습니다.
1949년 신중국이 탄생한 직후 중국과 대만의 관계, 이른바 양안관계에는 군사적 긴장이 상당했습니다. 중국은 대만을 ‘미수복 지역’으로 여기며 점령하려 했습니다. 대만은 미국의 힘을 빌려 중국에 군사적 위협을 가했습니다.
1970년대, 가까워진 미국과 중국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베트남전쟁 때 크게 바뀌었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중국에 접근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습니다.
1971년 핑퐁외교와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 방문에 이어, 1979년에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었습니다. 이때 미국은 ‘하나의 중국’ 개념, 즉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중국의 주장을 존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대만과는 국교를 단절했습니다.
그러나 대만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9년 미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계기로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을 무효화했지만, 대만을 무력 지원하는 ‘대만관계법’을 제정했습니다. 대만관계법에는 대만의 자국 방위 열망을 충족시키고 필요시 미군이 자동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판매할 수 있다는 문구도 포함됐습니다.
대만의 민주화
1949년 이후 약 40년 동안 대만은 미국의 후원에 힘입어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대만은 홍콩, 싱가포르, 한국과 함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라고 불렸습니다.
그 시기 대부분 동안 대만은 국민당의 장제스와 그의 아들 장징궈가 통치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을 휘둘렀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본토 수복을 명분으로 전국 총동원령 체제를 1991년까지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권위주의 통치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도 꾸준히 발전했습니다. 국민당의 일당 독재를 반대하는 활동가들은 국민당에 속하지 않고 선거에 입후보하는 ‘당외’ 운동을 펼쳤습니다.
1977년에는 국민당의 선거부정에 항의하는 시위인 ‘중리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1979년에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발간하는 잡지 《메이리다오(美麗島)》가 주최한 거리행진이 벌어졌습니다. 1986년에는 민주진보당, 줄여서 민진당이 창당했습니다. 민진당은 부르주아 야당 세력(당외 세력)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회운동 세력을 포괄했습니다.
대만 경제가 발전하면서 노동계급의 규모가 커지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등장하면서 대만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했습니다. 1987년 7월 계엄령이 해제됐습니다. 1990년 3월에는 민주적 국회를 요구하는 들백합운동이 전국에서 벌어졌습니다. 1992년 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161석 중 52석을 차지하며 약진했습니다.
92공지 - 하나의 중국, 각자 해석
1970년대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변하면서 양안관계도 바뀌었습니다. 1979년 1월 미국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대만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1981년 9월에 중국은 대만 문제에 관해 일국양제라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즉, 한 나라에서 두 제도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대만에서는 평화 통일, ‘삼통’(우편과 통신, 비행기, 무역 개방), 친척 방문 등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있었습니다. 1987년 11월 대만은 자국 국민의 중국 내륙 친척 방문을 허용했고, 양안 간 민간 교류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이런 교류 증대 속에서 1992년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중국, 각자 설명”(一個中國 各自表述)이라는 합의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양안관계를 규정하는 ‘92공지’(九二共識)라고 불립니다. 이 말을 쉽게 풀면,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그 의미는 양국이 각자 알아서 해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양안관계가 개선의 방향으로 매끄럽게 흐른 것은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전쟁 위기가 고조되기도 했습니다. 1995년에 3차 대만해협 위기가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 대만 총통 리덩후이가 중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을 방문하고 중국과 대만은 별개의 국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중국은 대만 근처인 푸젠성에 병력을 모으고 대만 가까이로 미사일을 쐈습니다. 이듬해인 1996년에 열릴 대만 총통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독립 주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대만 전역에서 준전시태세가 발령됐고, 미국은 대만해협으로 항공모함 2개 전대를 보냈습니다.
이런 일은 더 근본적으로 1970년대 소련을 고립시키려고 중국과 가까워졌던 미국이 냉전 해체 이후 중국을 점점 더 위협으로 보게 된 것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대만 국민당과 민진당
이렇게 모순된 상황이 전개된 1990년대를 지나면서 대만 국민당은 중국과의 경제 교류를 강화하며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반면 민진당은 대만이 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임을 강조했습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만 대중의 정서도 조금 변했는데,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보다 대만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더 많아졌습니다. 독재 정권에 억압당한 경험과 중국의 위협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습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민진당이 승리해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대만인들의 정서가 독립 쪽으로 기운 것은 아닙니다. 대만인 압도 다수는 양안관계의 현상 유지를 바랍니다.
대만 사람들은 2000년대 민진당 정부 아래에서도, 2010년대 국민당 정부 아래에서도 저항을 벌였습니다.
해바라기 운동은 중국과 대만 사이에 자유무역협정의 일종인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점거 농성자들은 이 협정이 발효되면 서비스 분야의 규제가 완화되고 시장 개방이 대폭 확대돼 대만 경제가 중국에 종속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 2016년에 열린 총통 선거에서는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당선했습니다. 2014년 홍콩에서 벌어진 ‘우산 혁명’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잉원은 임기 내내 지지율이 10퍼센트를 간신히 넘길 정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법정공휴일을 줄이는 노동관계법 개악안이 대중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2020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었습니다. 그러나 2019년 홍콩에서 송환법에 반대하는 투쟁이 크게 벌어지고, 중국에 대한 반감이 대만에서도 크게 증가하면서 차이잉원이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사실상 어부지리로 승리한 것입니다.
양안 관계와 계급 분열, 연대의 정치
이처럼 민진당과 국민당은 국내 정치에서는 서로 비슷하게 노동 개악과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친자본주의 정당들입니다. 두 정당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이냐는 입장에서만 차이가 있고, 이를 활용해 지지를 획득하려 할 뿐입니다.
노동계도 이런 공식 정치의 영향을 받아 친중국 입장의 단체와 독립을 강조하는 단체로 양분돼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만인들은 대만이 중국과는 다른 별개의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실제가 그렇습니다. 이 점에서 대만은 홍콩과 다릅니다. 또 대다수 대만인들은 중국의 한인들과 인종도 다르지 않고 민족 억압을 받지도 않습니다. 이 점에서 대만은 신장위구르나 티베트와도 다릅니다. 또한 현재 대만에서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에 구조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만 문제는 제국주의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양국의 영향력에 휘둘리며 압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대만을 중국에 복속시키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는 제국주의적 강제입니다. 현재 대다수 대만인들은 권위주의적인 시진핑 정부에 반대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배도 중국과의 통일도 원하지 않습니다. 중국과 통일을 할지 현상태를 유지할지는 대만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중국 지배계급은 청 왕조 때 대만이 중국의 일부였으므로 대만이 중국에 통합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에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합니다.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합리화하는 것인데요. 1949년에 제국주의와 봉건제를 무너뜨리고 해방을 이뤘다고 하는 국가가 청 왕조의 질서를 근거로 내세우는 것도 얼토당토않은 일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아시아 지역, 특히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경제 발전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이 지역이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됐습니다.
제국주의적 패권을 위해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반도체 강국인 대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대만은 중국에게 정치적·지정학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곳입니다. 시진핑은 일대일로를 내세워 제국주의적 패권의 열망을 드러내면서 대만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또한 이 지역에 걸린 이해관계를 결코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대만을 동남아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할 교두보로 여깁니다. 1970년대에 중국과 수교할 때부터 이를 염두에 뒀고, 중국과의 경쟁이 첨예해지면서 대만을 더 부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의 노동계급과 좌파는 중국에 대한 견해 차이를 이유로 분열해선 안 됩니다. 대만 지배자들이 추진하는 친자본·반노동 정책에 반대하고, 미국 제국주의와 중국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본토와 홍콩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정치를 발전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