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p8Z536xTpk?si=BhUXYqL8gJdzrq5X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 6대가 엄호비행한 홍범도 장군의 귀환길! 문재인 대통령의 유해 봉환 천명부터 유해 안장식까지...특별했던 78년 만의 귀환길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영상.
당시에는 큰 관심이 없었는데, 지금 윤석열 정부의 홍범도 흉상 철거 조치를 보면서 늦게 봤다. 정부의 관제행사이긴 해도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나도 세계 소수민족(물론 지금은 아시아 소수민족 중심으로 쓰고는 있지만...) 문제로 기고하고 있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신문에 홍범도 장군과 중앙아시아 고려인을 주제로 글을 썼다.
<KSCF 10월 신문>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이야기
김재원(마르크스주의연구자모임)
지지난 호에서 저는 한국의 광주에서 태어나 중국과 북한(조선)에서 활동했던 정율성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정율성은 한국과 중국 모두에서 활동했다는 의미에서 재조명됐고 한중의 우호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그의 고향 광주에 정율성 공원이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정율성이 북한을 위해 노래를 지었다며 기념사업을 중단하라고 합니다.
윤석열 정부가 벌이는 이러한 ‘역사전쟁’의 의도는 경제위기와 미중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사회를 전반적으로 우경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는 육군사관학교(이하 육사) 내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의 흉상도 철거하려고 합니다.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를 크게 무찌른 독립군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머슴 출신에 노동자, 포수였지만 항일운동의 이른 초창기부터 무려 28년간 의병과 독립군으로 활약했습니다. 일제의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그의 아내가 숨졌고 두 아들은 전장에서 잃었습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홍범도 장군이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했던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육사 정신에 맞지 않으며”, “자유시 참변에서 조선인 독립군을 학살했다”며 그를 모욕하고 공격했습니다.
이에 역사학계는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많은 한국인들이 흉상 철거를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국방부 대변인에 질의한 한 언론인은 “홍범도가 입당했던 레닌의 공산당과 스탈린의 공산당은 윤석열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차이보다 더 크다.”면서 홍범도의 러시아 공산당 가입을 이유로 흉상을 철거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한편,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묻혀 있던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도 이런 조치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흔히 러시아어로 ‘까레이스키’로 알려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연변의 재중동포(조선족)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조선에서 독립운동 혹은 생계 문제 때문에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후예입니다.
고려인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시베리아와 연해주를 정복한 일본군과 여러 제국주의 세력과 반혁명 세력에 맞서서 (훗날 “레닌의 공산당”이 되는) 볼셰비키와 협력했습니다. 볼셰비키는 고려인들이 자신들을 도운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살면서 조선어 교육을 받을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수도 모스크바에 세워진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조선인 혁명가들이 입학할 기회도 주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려인 독립운동가들과 볼셰비키의 관계가 항상 협력적이진 못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은 서방과 일본 제국주의의 조계지가 많았던 중국의 상해를 중심으로 한 상해파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에 가까운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한 이르쿠츠크파로 갈라졌습니다.
러시아 볼셰비키들도 이들을 화해시켜서 통합시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 갈등이 깊어지다가 일어난 비극이 자유시 참변이었습니다.
이는 볼셰비키와 가까웠던 이르쿠츠크파 독립운동 무장부대가 상해파 독립운동 무장부대를 일방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었습니다. 갈등을 토론이 아닌 폭력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명백히 잘못된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논란이 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지도자였던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자유시 참변을 일으킨 이르쿠츠크파와 볼셰비키 군사지도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포로가 된 독립운동가 무장부대의 사면을 주장해서 결국은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켰습니다.
하지만 소비에트 러시아와 고려인의 연대는 스탈린이 공산당의 서기장이 되면서 파괴되었습니다. 스탈린은 연해주의 고려인들이 터무니없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제국주의를 도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고려인의 언어를 가르치던 학교도 파괴되었습니다.
이 때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홍범도 장군은 이 당시 자신이 살던 소련이 더는 과거 자신을 지지해준 레닌의 소련과 달리 자본주의 국가들의 포위 속에서 생존만 중시하다보니 자본주의 국가들과 다를 바 없어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회주의 조국’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는 레닌이 자신에게 준 권총을 평생 소중히 여겼으며, 고령인 70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에 맞서 소련군에 자원입대하겠다고 말했다는 증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훗날 북한의 주요 장군이 되는 남일은 원래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사범대학을 다니던 고려인이었는데, 이때 소련군으로 출전해서 베를린 전투까지 치렀습니다.
하지만 고려인들이 ‘사회주의 모국’으로 여겼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러시아인을 ‘몽골’로 여기며 경멸한 나치와 마찬가지로 일반 독일인까지 ‘나치’, ‘독일놈’으로 규정하고 죽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중심이자, 유럽에서 가장 커다란 사회민주당이 있던 독일에서의 혁명 성공을 위해 독일어 교육을 권하던 소비에트 러시아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교사로 근무하거나, 농장에서 일하면서, 소련에서 주요 중간관리자 역할을 차지했습니다.
비록 대다수 고려인들은 러시아어에 능숙했고, 러시아식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고향이 조선(한국)이었다는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구한말의 풍속도 오래 유지했습니다.
저는 2015년 우즈베키스탄 여행 당시 마지막 일정으로 소련 시절 유명한 농장 지도자였던 고려인 김병화의 집에 들렀습니다. 거기서 전시물을 구경하고 버스에 타려는 저에게 연세 지긋한 고려인 어머님이 “본관이 어디냐?”라고 물은 것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고려인들의 삶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에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자국의 민족언어 교육을 강화하면서 러시아어 외에 다른 소수민족 언어에 서툴렀던 고려인들이 직장을 잃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가거나, 1991년 이후 수교한 남한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들은 “러시아어를 잘하는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남한으로 옮기고 극진한 대우를 한 사실은 고려인들에게 조상들의 항일운동을 존중했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결정은 중국의 재중동포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자랑으로 여기던 고려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