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의 역사 - 유라시아의 교차로 서울대학교 중앙유라시아연구소 교양 총서 2
제임스 A. 밀워드 지음, 김찬영.이광태 옮김 / 사계절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7년 전

청의 신장수복은 쇠락해 가는 청 제국이 감행한 최후의 군사원정이었으며, 청이 결국 신장을 회복했다는 사실은 당시 서구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이후 서구의 역사가들은 신장을 재정복하겠다 청의 결정을 낙후된 대륙적 사고의 한 예이자, 해안 지역에서 더 중요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던 시기에 나타난 내륙 아시아 지역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전략의 반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의 신장 수복은 새로운 사건, 즉 중국을 중앙아시아로 확장시키려는 시도의 서막이었다. 지금까지 이 책에서 필자는 ‘청 제국‘과 ‘중국‘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구분해 왔으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구분이 희미해져 갔다.(중략) 1878년의 재정복과 1884년의 신장 성의 건설 이후, 신장의 청 관헌은 그들 스스로가 한족이었고 따라서 신장에서 청의 정책들은 비록 완전하게 실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한화라는 행동지침을 반영했다.

그사이 신장은 그 서부의 지역[본인 주: 러시아와 영국령 인도]들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식민통치 하에 있던 전 세계의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중앙유라시아의 무슬림들과 투르크계 민족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의 양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지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제안했으며 또한 정치 개혁을 지지했다. 신장은 중앙유라시아에 퍼진 이러한 새로운 담론의 소용돌이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는 점차 관심의 대상을 헬크(민족), 또는 밀례트(국가)로 규정했다. 민족주의는 2가지 방향에서 신장에 나타났다.
(제임식 A. 밀워드, <신장의 역사>, 196-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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