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 의한 모든 정복과 병합이 진보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인 선으로 받아들여지고 러시아 정복에 대한 비러시아인의 저항과 민족해방 투쟁은 반동으로 규정되면서, 그때까지의 ‘보다 나쁜 악‘의 개념(러시아에 의한 비러시아인 지역의 병합이 나쁘지만 다른 열강 제국에 의한 병합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정당하다는 이론)은 폐기되었다.(153-154)

전후의 역사 바꿔쓰기에 대한 당의 요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비러시아 민족은 모두가 원래 독립되어 있었거나 다른 국가에 종속되어 있었거나 상관없이 그들이 러시아제국에 병합되어 자신들의 궁극적인 숙명을 완성하는 것을 학수고대했다고 기록해야 했고 또한 이 병합을 늘 진보적으로 표현해야만 했다. 어떠한 민족일지라도 독립을 보전하려고 하거나, 제정러시아가 병합한 것은 회복시키려는 욕구를 가져서도 안 된다. 또한 어떠한 독립운동도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 보여져야 하고, 외국(특히 영국)의 선동에 의해서 발생하였다고 발생했다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비러시아 민족에게는 이제 자신의 역사를 가질 권리가 없다.(155)

학문으로서 역사뿐 아니라(여기서 중요한 것으로 교과서도 포함된다) 수세기 전부터 민족이 갖고 있었던 역사 기억에도 이 공식이 적용되었다. 이 희생이 된 것은 다음의 장구한 구술 서사시이다. ‘초원의 일리야드‘라고 불리는 키르기즈의 마나스는, 키르기즈의 적들, 특히 중국과 수많은 전쟁을 했던 영웅 마나스를 기리고 키르기즈인의 전설과 민화를 수집한 세계문학에서도 인정받는 최대의 서사시로 간주되고 있다. 우즈베크인의 《알파므시》, 아제리에서 《데데 코르쿠트》로 표현되는 투르크멘의 《코르쿠트 아타》는 12세기 키예프 루시 시대의 유명한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와 비견될 수 있다. 전쟁 전에 이것들은 민족문학의 유산 가운데에서도 가장 명예로운 작품으로 우대받던 것들이다. 그러나 곧 《마나스》의 민족적 성격과 사실성이 문제가 되었고, 당의 대변인에 의해서 《알파므슈》 는 ˝반동적 봉건 사상에 가득 찬 광신적 이슬람 사상을 발산하고 외국인과 비신자에 대한 증오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지적 받았다. 1951년 4월 이후 당은 《데데 코르쿠드》를 ‘반인민적‘이고 ‘반동적‘이라고 비난했다. 그리하여 그 사서들은 도서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민족 영웅에 관한 전시물은 박물관에서 사라졌다.(155-156)

시베리아의 보굴(Vogul) 서사시. ‘얀가알 마‘와 같이 러시아인의 정복을 기뻐하지 않고, 16세기 이후의 정복과 억압에 의한 비참함을 탄식하고, 그것에 대한 선동을 기록한 작품도 비난받았다.(156)

《러시아 민족문제의 역사》 8장 스탈린의 만년-민족들에 대한 테러, 러시아화 정책-비러시아 민족의 역사 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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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소련 해체 이후의 독립한 국가들에서는 러시아화와 정반대로 자국의 전설을 통해 현 국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용도로 서사시가 쓰이고 있다.미나스는 키르기스스탄에서 현재 동상도 세워져 있을 정도로 추앙받는다.

이걸 보면 중국의 소수민족 역사를 대하는 모습하고도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중국의 중화민족 개념은 한족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을 모두 한 민족으로 간주하고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신해혁명 이전의 청 말의 무슬림 반란 가운데 잠시 권력을 잡은 야쿱 벡은 해외 제국주의의 꼭두각시로 규정하고, 이후 위구르족이 세운 최초의 국가 동투르키스탄 이슬람공화국은 영국의 조종받는 위구르족이 세운 걸로 간주한다.
반면에 청나라, 원나라 등의 비한족 제국은 중화민족을 발전시켰다고 보면서 미화한다. 물론 한 때 일부 한족 반원, 반청 투사들을 미화하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 소수민족 지배계급들은 모두 ˝중국인˝으로서 미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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