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에 관한 부분

지역 간 불균등 발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억제된 것은 어느 정도는 정치적 중앙집권 체제와 민족주의, 그리고 서로 대립하는 민족주의가 반대파 결집의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반영했다. 그러나 효과적으로 서방과 경쟁하고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정권이 자원을 할당해야 한다는 경제적 논리도 반영했다. 주변부 지역들을 향해 이런저런 [균등 발전] 제스처를 취했지만, 진정한 경제 다각화는 이 경쟁적 경제의 필요 때문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우즈베키스탄은 러시아 공장을 위한 면화 생산지가 됐고, 1938년에 우즈베키스탄 지도자들은 "면화를 먹고 살 수는 없다."고 주장하며 경제 다각화 계획을 수립하다가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처형당했다. 여기에다가 지도부의 다른 정치적 선택들도 덧붙여졌다. 모스크바가 추진한 정책들의 대가를 비러시아계 주민들이 치르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쉬운 일이었다. - P175

왜냐하면 농촌 현지의 러시아계 주민들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우랄 지방의 노동자들과 더 긴밀한 연관이 있어서 도시의 불만과 농촌의 불만이 결합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불평등한 처우는 분열시켜 지배하는 암묵적 정책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민족 억압을 극복혀던 1920년대의 긍정적 노력은 1930년 이후 민족 억압을 강화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 P175

그 덕분에 스탈린은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었다. 1928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은 정말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비록 혼란스럽고 불균등한 성장이었지만 말이다.) 그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평가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중략)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협소한 경제적 의미에서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선철 생산량은 1928년 330만 톤에서 1938년 1810만 톤으로 증가했다. 마찬가지로, 표 4.2에서 나오는 도시의 성장 수치 같은 다른 변화의 지표들도 논쟁의 여 - P176

지가 별로 없다. 예컨대, 1926년부터 1939년까지 도시 인구는 2760만 명에서 5610만 명으로 연평균 6.5퍼센트씩 늘어났다(이런 증가속도는 당시까지 세계 경제 역사에서 유일무이했다). 소련은 1961년에야 도시 인구가 50퍼센트에 이르렀지만(영국보다는 100여 년, 독일보다는 50년 늦었다), 이조차도 중대한 진보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변화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경쟁적 공업화와 자본축적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혁명의 마지막 흔적까지 파괴해야만 했다. - P17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